12p.
..그 이듬해 제인은 백혈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할 채비를 해야 했다. 겨우 마흔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제인은 발병하기 전에 쓰고 있던 시 몇 편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중 하나의 제목은 <양로원에서In the Nursing Home>, 어머니의 말년을 다룬 내용이었다. 시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달리는 말이었는데 원이 점점 작아지다가 마침내 멈춘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내 원의 크기도 작아지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균형 감각이 더 나빠지고 가끔은 넘어지기까지 한다.

19p.
..세상에서 동떨어진 우리들의 존재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냉담할 수도 있고 친절할 수도 있다.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은 언제나 어떤 종류의 우월감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어떤 여성이 내가 한 어떠한 일을 높이 평가하는 글을 신문에 투고한 경우를 보자. 그녀는 ‘점잖은 신사‘라는 표현으로 나를 높여준다. ‘노인‘이란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또한 다른 수식어를 통해 내가 심술궂고 시원찮은 늙은이가 아니라는 점도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멋진‘ ‘신사‘라는 표현을 통해 그녀는 나를 상자 속에 집어넣는다. 내 머리를 쓰다듬거나 내가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자 말이다. 혹은 내가 꼬리를 흔들고 손바닥을 핥으며 비위를 맞추는 소리를 내는 것을 그녀는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29p.
..글을 쓰다 마주치는 문제들 중에는 배워서 미리 피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예컨대 내가 쓴 시나 에세이는 대부분 끝이 너무 길게 이어진다. 혹시 이해하지 못했을까 봐 덧붙이는데, 방금 내가 한 말은 이런 의미다. 이 같은 표현은 잘라내라. 단어들로 하여금 섬광처럼 결론을 내리게 만들고 당신은 빠져나와라.
..독자와 페이지 사이에 필자(나, 나 자신)가 침입할 때가 있다. ‘나‘라는 주어로 문단을 시작하지 말라. 문단뿐 아니라 문장 자체를 인칭대명사로 시작하지 않도록 노력하라.
..‘나를‘, ‘나의‘ 같은 표현을 가능하면 피하라. 회고록을 쓸 때 다음과 같이 쓰지 말라. ‘어린 시절 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 대신 ‘어린 시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쓰라.

67p.
...그러나 행복한 결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행복하다면 아직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74p.
..내가 속한 세대가 소리 내어 읽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책으로 출판하는 것보다 다른 플랫폼에서 출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면서 시가 변하는 것을 귀로 느꼈다. 소리는 항상 나에게 시로 이끄는 도입구 역할을 했지만 애초에 소리는 활자를 눈으로 볼 때 상상이 가능한 대상이었다. 큰 소리로 발성되는 입 안의 주스인 모음과, 입 안의 건더기인 자음은 낭송 중인 시에게 차츰차츰 몸체를 만들어준다. 딜런 토머스Dylan Thomas가 그 방법을 보여줬다. 찰스 올슨Charles Olson은 "형태는 내용의 연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사실 내용은 구강 섹스를 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영어로 된 시 중에 가장 에로틱한 것은 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Paradise Lost>이다.

133p.
..어떤 명예는 영광스럽다. 어떤 불명예는 불명예스럽다. 어떤 명예는 다소간 불명예다. 은총과 망신. 직업적인 문제와 사적인 문제. 재앙과 생존.

174p.
...내 불멸성은 아마도 장례식 후 6분이 지나면 소멸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문학은 제로섬게임이다. 시인 한 명이 부활하면 다른 시인이 좀 더 죽는다. 스톡홀름에서 돌아오는 노벨상 수상자처럼, 우린 그걸 이해하고 한숨을 쉰다.

198p.
..내 난제는 죽음이 아니라 늙음이다. 내가 균형 감각을 잃어가는 것을, 자꾸만 뒤틀리는 무릎을 걱정한다. 일어나고 앉는 게 힘들어지는 걸 걱정한다. 어제는 안락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었다. 나는 앉아서 잠드는 사람이 아니다. 매일매일 게으름이 나를 무기력하게 한다.
..앉은 채로 무엇을 할지 공상한다. 스웨터를 입을까, 아니면 파이 한 조각을 먹을까, 아니면 딸에게 전화를 할까. 어떨 땐 공상을 떨쳐버리고 일어서기도 한다.
..크리스마스나 생일에 물건을 받는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그것이 책이라도 마찬가지다.

208p.
...내가 서른이었을 때, 난 미래에 살았었다. 왜냐하면 현재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쉰 살, 예순 살이었을 땐 사랑과 일로 충만한 날들이 해마다 되풀이되었다. 노년은 의자에 앉아 있다. 저술을 약간 하고 점점 작아져간다. 기진함은 에너지를 막는다.

216p.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종류의 예술도 사랑하고 생활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자신을 전혀 다른 열정에 노출시켰을 때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219p.
..난 회화와 조각에 대해 아주 많은 것들을 배웠다. 하지만 제일 많이 배웠던 건 아마도 시에 관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무어가 로댕Auguste Rodin을 인용하는 걸 들었는데, 로댕은 또 어떤 석수의 말을 인용했던 것이었다. "어떤 표면을 생각할 때 그것이 어떤 부피의 연장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말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