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은 여전히 수많은 상심의 이별과 행복한 만남이 얽히는 가장 감정적인 공간이다. 만약 방사선 측정기처럼 작동하는 ‘감정 측정기’가 있다면, 그래서 어떤 공간에 떠다니는 슬픔, 행복, 기쁨, 설렘, 절망 등의 감정을 측정할 수 있다면, 아마 세상의 모든 공간 중 공항에서 가장 다양하고 많은 감정이 측정되지 않을까.

..우리는 텔레비전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보고 있지 않다. 실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텔레비전이 우리를 보고 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응시’하며 끊임없이 시선과 말을 건네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텔레비전이다....

..책걸상을 두 개 놓으려면 방이 크거나 많아야 했다. 크고 푹신한 소파를 놓으려면 그것을 놓을 만한 거실이 먼저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거실이 있기 위해서는 조금 더 ‘잘’ 살아야 했다. 의자는 사물이나 가구를 넘어 내가 선망하던 일종의 계층, 문화, 삶의 양식 같은 것을 대변하는 기호였다. 하지만 우리 집엔 배고플 때 마술처럼 펼쳐지는 양은 밥상, 좌식 책상이라고 주장하는 밥상, 꼬리 긴 학이 우아하게 노니는 할머니의 자개 화장대, 방바닥에 깔린 이불, 재래식 변소 등이 있었을 뿐 의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 집은 마치 어른들이 사라지고 아이들만 남은 도시처럼 키 작은 공간이었다.

..입식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이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의 의자를 물려받고 그것을 다시 자식에게 물려주곤 한다는 이야기가 언제나 부러웠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간과 사연을 지금 우리의 공간 한쪽에 놓아두고, 다시 그곳에서 또 다른 사연을 담아가며 사는 것. 그리고 그것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삶의 역사성을 가지고 싶었다. 기억과 시간과 감정을 오래된 사물에 담고 그것에 또 다른 이의 기억과 시간을 축적하는 그런 역사성을. 하지만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경험한 우리의 도시처럼, 우리 집 역시 어떤 기억과 시간이 축적된 사물을 갖지 못했다. 대신 합성수지나 플라스틱으로 쉽게 만들어지고 쉽게 사용되고 쉽게 버려지는 사물들만이 공간에 넘쳤다. 가난한 사회에서는 좋은 재료로 정성스레 만든 사물을 소유하기 힘들었다. 그것은 물질적인 부의 결핍보다 더 근원적인 결핍을 안겨주었다.

..이 반 평의 공간에서 우리는 몽상하고 욕망하고 휴식하고 잠들고 꿈꾸고 깨어난다. 슬플 때, 아플 때, 피곤할 때 우리는 이 작은 공간에 몸을 누인다. 이곳에서 때론 절망하고 자주 슬퍼하고 종종 사랑한다. 그리고 대개 우리는 침대에서 태어나고, 마지막 호흡을 멈춘다. 사람이 살면서 조금은 겸손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침대의 공간 크기 때문이 아닐까. 침대가 아무리 커져도 항공기나 유조선처럼 커질 수는 없다. 침대는 침대로 정의되는 크기를 넘어서지 않는다. 낮에 어떤 대단한 일을 성취하든, 혹은 어떤 사소한 일에 절망하든 우리는 결국 이 반 평 크기의 사물에 몸을 누이고 잠이 든다. 그리고 결국 침대보다 더 작은 다른 사물에서 영원히 잠들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난다.

...명확하게 들리는 것을 듣는 능력은 실은 능력이 아니다.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것은 ‘확인’이나 ‘점검’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듣는 일에는 사랑의 능력이 필요 없다. 만약 사랑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일에서 시작된다면, 그것은 빛이 너무 많은 공간이 아니라 조금은 부족한 곳에서 비롯되는 일이다.

...어떤 옷을 정리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지만 비교적 쉽게 버릴 수 있는 옷도 있었다. 그런 옷에는 유용성이 아니라 기억이 부재했다. 대개 자주 입지 않은 옷들이라 함께한 날이 적었다. 함께한 날이 적은 만큼 옷에 담긴 풍경도 적었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상태 좋은 옷이 버려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반면, 어떤 옷은 쉽게 버릴 수 없었다. 대개 그런 옷은 낡았고, 그만큼 옷에 담긴 기억이 많았다. 낡은 옷일수록 버리지 못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평생 달고 다닌 얼굴이지만, 또 여기에 형성된 여러 기관을 통해 보고 듣고 먹고 말하고 싸우고 사랑했지만, 막상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는 이 얼굴이 꼭 내 것만은 아니었다. 이 얼굴로 수많은 말을 하고 표정을 지었지만, 꼭 내 뜻대로 말하고 표정 지은 건 아니었다. 내 얼굴은 나를 위해서 기능하기보단 종종 남을 위해서 애쓰곤 했다. 평생 나보다 다른 이가 훨씬 더 많이 본 내 얼굴은 내 것이지만 동시에 내 것이 아니기도 했다. 얼굴을 풍경처럼 보는 것은 거울을 통해 본 내 얼굴이 꼭 나만의 얼굴은 아닐 수도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내 얼굴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고 나만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 얼굴은 그간 살아오며 만났던 사람과 마주쳤던 사건과 감당했던 감정이 뒤섞인 아득한 풍경이었다.

...이제 내 삶도 천천히 살펴볼 때다. 가끔씩 천천히 거울에 담긴 ‘얼굴’을 바라본다. 그럴 때, 얼굴은 먼 곳이 된다. 타인처럼, 낯선 여행지의 풍경처럼, 때론 달의 뒷면처럼.

..기억이 시간과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기억은 공간과 상관한다. 아니, 기억은 그 자체로 공간이다.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함께 갔던 무수한 공간과 풍경을 떠올리지 않고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릴 수 없고, 함께 뛰어놀던 골목과 놀이터를 떠올리지 않고 어릴 적 친구를 떠올릴 수 없다. 어떤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공간을 떠올린다는 의미이고, 그렇기에 공간이 내밀할수록 그 기억도 함께 내밀해진다. 그래서 바슐라르가 말했듯이 깊이와 내밀함을 부여하는 수직성이 부재한, 즉 옥상이나 지하가 없는, 오로지 수평성만 존재하는 아파트에 사는 일은 어쩌면 작은 비극일지도 모른다. 위로 오를 수 있고 아래로 내려올 수 있는, 또 많은 구석이 존재하는 주택은 그만큼 많은 기억을 만든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통해 수평에서 다른 수평으로 이동하는, 단조로운 평면을 가진 아파트에는 다양한 구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만큼 기억도 단조로워진다. 단기간의 경제성장과 도시화가 만들어낸 결과겠지만 내밀함이 부재한 아파트의 대대적인 보급은 어쩌면 소비사회의 전全 사회적 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만 자고, 일하고, 소비하기 위해 배터리를 충전하는 곳으로 주거 공간을 전락시키는 어떤 전략. 먹고 놀고 쓰고 공감하고 즐기고 읽고 듣고 공부하고 파티를 열고 사랑하는 일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집 밖에서 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해지는 어떤 전략. 이 총체적인 전략을 통해 아파트에 부재한 내밀함을 풍족한 외부 소비 공간에서 끝없이 소비하여 대체하는 것이 전 사회적 구성원의 비계획적 계획은 아니었을까.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경제 발전은 집의 내밀함과 추억의 내밀함을 잃고 얻은 대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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