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p. ..나는 임신한 적은 없지만 아주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됐어. 나 자신에게, 내 남동생에게, 내 어린 엄마에게도 엄마가 되려다 보니 내 안 아주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했어. 존재의 속살까지 들어가 나 자신의 힘뿐 아니라 태어나지 않은 너의 영혼까지 발견했지. 어쩌면 두 개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설명은 못하겠어. 그렇지만 왜 그래야만 했는지는 말할 수 있어.
30p. ...계급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으니, 우리의 경험이나 우리가 느끼게 되는 수치를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 즉시 무효화될 수밖에 없었지. 계급을 인식하지도 않았고 입 밖에 내어 이야기하지도 않았어. 그러니 나 같은 아이, 즉 가족의 비밀을 파헤치고 서랍 속을 뒤져 내가 사랑하는 속을 잘 알 수 없는 사람들의 과거를 알아낼 단서를 찾기를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하루하루가 조용히 좌절감의 대못을 박아넣는 것 같았단다. 내가 어릴 때 느꼈던 가장 주요한 감정은 문제가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겠는데 다들 문제가 없다고 말할 때 느끼는 좌절감이었어.
58p. ...우리 여자들은 이런 뼛속 깊이 흐르는 걱정을 물려받았어. 베티 할머니도 처음 가본 햄버거 가게나 길가 모텔 안에 들어가서 둘러보고 괜찮다 싶을 때 하는 첫마디가 늘 "깨끗하네"였지.
58p. ..그래서 어릴 때 내가 맨날 하지 말라는 말만 듣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말하지 마, 숨 쉬지 마, 웃지 마, 울지 마. 내 존재로 인해 드는 비용, 먹는 음식,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차지하는 공간, 나는 전부 의식했고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비용이 정당화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내 존재의 가치는 우리 어머니나 그 이전의 무수한 사람들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당연한 게 아니라 입증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지.
116p. ..위험이 곳곳에 있는데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삶은 몸뿐 아니라 뇌에도 흔적을 남겨. 뇌에서 원초적 공포를 느낄 때 싸우거나 도망가는 반응을 관장하는 편도가 커지고 그 상태가 유지되지. 만성 스트레스 아래에서 과도한 각성 상태가 계속되다 보면 신체에도 영향이 가는 거야.
125~126p. ..어딘가에서 "내가 소화하지 못한 것은 남에게 전달하게 된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어. 그래서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사람이 바뀔 뿐 아니라 계급의 지표와 결과 등 삶의 요소들마저 바뀌는 모양이야. 좋은 사람들의 슬픔, 분노, 두려움을 받아 소화한다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알아. 보통 밤에 혼자 깨어 누워 있을때 일어나는 일이란다. 무언가 쓰디쓴 것을 영혼으로 삼켜, 그게 안을 할퀴다가 마침내 녹아 흩어지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는 조금 괜찮아지는 느낌이야.
162p. ..시골은 어떤 경치나 스타일, 의식적 태도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실제적·물리적 공간이었어. 시골 경험은 사실 시골을 상품화하는 문화의 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로 정의되는 거지. 시골은 절대적인 고독이 끝없이 뻗은 곳, 이따금 고속도로를 타고 한참 달려 사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만 간간이 그 고독에서 벗어나는 곳이야.
202p. ..오후가 되면 아이들 몇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에서 나갔어, ‘영재 프로그램‘이라고 하는 뭔가 비밀스러운 것에 참가하려고 지하로 내려가는 거래. 그런 게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지만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있었지. 날마다 아이들이 내려갈 때마다 나도 얼마나 같이 가고 싶었는지 몰라. 나는 그때까지 살면서 내내 목구멍 속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올 것만 같은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느낌을 안고 살아왔거든. 그래서 기회의 기미를 띤 것이라면 무엇에든 신경을 곤두세우게 됐지.
248p. ..새끼 돼지, 송아지, 병아리 들과 달리 아무도 너를 시장에 내다 팔거나 도축장으로 끌고 가 고기로 갈아버릴 수는 없었지. 너는 농부와 농장 동물들의 삶을 결정짓는 시장을 넘어서는, 국가와 교회가 네게 부과하는 수치를 넘어서는 존재니까. 너는 내가 내 방 거울 안에서 보는 여자아이보다 더 절절하게 살아 있는 존재, 불확실한 세상보다 더 고요한 존재,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성스러운 존재였어.
265p. ..나도 자라면서 가끔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어. 나한테는 충분히 좋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게 뭔지 알지. 어떤 때에는 부끄러운 건지 뭔지 모를 때도 있었지만.
393p. ..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들을 ‘게으르다‘고 간주하는데 우리한테는 그보다 더 심한 모욕은 없어.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진보주의자들은 자신의 능력 덕에 부를 얻게 되었지만 관대하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세금을 내는 거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할 수 있어.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 실패를 인정하고 자기를 도와줄 가능성이 더 높은 당에 표를 던지거나, 아니면 다른 당, 희망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근면한 노동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다른 당에 표를 던지거나. 어려운 선택 아니니. 나도 처음에는 엄마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였어. 사실 부모님의 정치관을 이어받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친구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지.
409p. ..내가 사는 곳과 내가 살았던 곳의 이야기를 짜 맞추어야 한다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어. 도무지 모아지지 않을 듯 먼 거리였으니까.
410p. ..너는 내 것이 되지 않을 가난한 아이였어. 내가 영영 아이를 갖지 않을 것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너를 가질 수가 없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