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p. ..밟으면 무너지는 잔교 같은 세계를 달리면서 작은 머리에 다 담지 못할 만큼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았다. 행복의 행 자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어린 모습 그대로 숨졌다. 전쟁에서 진 뒤에도 굶주림과 말라리아로 고생하고, 동물처럼 소유되고, 그래도 목숨을 건진 도민들은 이렇게 된 바에야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주마! 하는 불굴의 생명력를 키워냈다. 젖은 쥐는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벌거숭이는 노상강도가 무섭지 않다. 굶주림과 빈곤의 극에 몰린 도민 대부분이 ‘센카아기야‘를 자처하게 되었다. ..미군 창고나 기지에서 물자를 훔쳐낸다. ..그것이 센카아기야다.
254~255p. ..작은 놀라움은 이내 감명으로 파도쳤다. 야마코는 감탄했다. 어떤 것들은 어두운 뿌리처럼 세계로 뻗어 나가 약한 부분을 찾고 무너질 리 없던 견고한 것마저 꿰뚫어 무너뜨리고 만다. 그런 일은 섬 한쪽 구석 뒷골목에서도 일어난다. 끈기 있게 시간을 들이며 소소한 행위를 거듭하여 침묵의 견고한 껍질마저 깨뜨린다. 그리고 그런 소소한 변화는 커다란 너울의 예감이 되어 세계로 돌아간다.
382p.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아도 할머니들은 야마코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있는 듯했다. 영혼을 잃었다면 몇 번이고 채우면 되지, 하며 맥이 빠질 만큼 쉽게 이해해주었다(생기를 잃은 사람, 영혼을 잃은 사람에게 다시 일어설 지혜를 주고 기도해주는 것도 유타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였다).
390p. ..가령 섬의 어느 해안이라도 좋으니 황혼 녘에 모래사장으로 나가보라. 바다를 마냥 바라보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하는 일도 없이 황혼에 물드는 섬사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혼이 돌아가는 저쪽 세상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재회할 누군가와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몽상하는 것이지.
440~441p. ..하나의 풍경을 계속 바라보는 것은 어딘지 무서운 것이구나, 하고 야마코는 생각했다. 한치도 흐트러짐 없이 응시하고 있으면 그 풍경에 빨려 드는 기분에 빠진다. 이쪽에 머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방어본능이 위험을 회피하려고 일부러 신경을 분산시키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수평선 너머도, 기지 철조망 너머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야마코가 갖지 못한 감성을 가진 자만이, 보통 사람이 멈춰버리는 지점을 지나 건너편으로 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쪽 편에는 없는 미지의 재물을 가지고 돌아와 이 세계를 풍부하게 색칠할 수 있다. 가령 그것은 천재라 불리는 예술가일 수도 있고, 아주 뛰어난 음악가일 수도 있고, 선택받은 한 무리의 센카아기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 저쪽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자도 있다— 야마코는 자기가 알고 있는 그런 남자들과 상통하는 자질이 분명 우타에게도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514p. ..깊은 샘 밑바닥에서 솟아 올라오는 것. 잘못 다루면 목숨을 빼앗길 수도 있는 진실— 그 조각이 길어 올려진다. 우물물에 섞인 자양분 결정을 건져 올리듯이. 듣는 이들의 ‘그릇‘의 질과 크기도 이때 시험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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