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p.
..프랑스 소설을 읽어보면 몰락한 귀족 가문에 태어난 사람이 유산 몇 푼으로 자기 몸 하나는 어찌어찌 먹고살아도, 사람들과 어울려 세속의 기쁨은 나누지 못한 채 평생 외롭고 무능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 많다. 세상에 이름을 떨칠만한 전문분야를 찾아 연구를 하고 싶어도 그만한 돈이 없고, 직업을 구해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데가 없다. 그러니 하는 수 없이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고 낚시를 하고 무덤가를 거닐며 돈 없이도 살아갈 방법을 강구해낸 것이다. 나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행위 자체나 분위기는 거의 비슷하리라.

46p.
..그러나 비위생적인 뒷골목에 사는 사람들이 여전히 미신과 탕약에 의지해 세상은 덧없는 꿈이라며 생명을 간단히 체념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의학이 진보하지 않았던 시대의 사람들이 병고와 재난을 태연히 받아들이고 간명하게 살았던 모습에 깊은 경외심이 인다. 무릇 근대인이 기뻐 환호하는 ‘편리‘라 부르는 것만큼 의미 없는 것은 없으리라. 도쿄의 서생이 미국인인 양 편리하다고 만년필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문학이든 과학이든 진정한 진보가 있기는 있었는가. 전차와 자동차는 도쿄 시민들이 시간을 절약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가.

60p.
...니혼바시를 등지고 에도바시 위에서 수로를 바라보면 마름모꼴을 이룬 넓은 물길 한쪽에 아라메바시와 뒤이어 시안바시가 보이고 다른 한쪽에 요로이바시가 보인다. 이곳 연안의 상가와 창고, 도로와 다리가 어우러진 번화하고 혼잡한 모습은 도쿄 시내 물길 풍경 가운데 으뜸이다. 특히 연말 야경처럼 다리 위를 오가는 자동차 불빛이 강가의 가로등불과 함께 밤새 물 위에 어지러이 흔들리는 모습은 긴자 거리의 가로등보다도 월등히 아름답다.

69~70p.
...우타가와 도요쿠니는 그 시대(교와 2년(1802)) 여러 계급의 여성 풍속을 그린 그림첩 『이마요카가미時勢粒』에서 골목 풍경을 묘사했다. 이런 우키요에에서 볼 수 있듯 골목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서민이 살아가는 공간, 해가 드는 큰길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생활이 숨어 있다. 고독하고 덧없는 삶도 있다. 은거의 평화도 있다. 실패와 좌절과 궁핍의 최후 보상인 태만과 무책임의 낙원도 있다. 서로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신혼살림이 있는가 하면, 목숨 건 모험에 몸을 맡기는 밀애도 있다. 골목은 좁고 짧기는 해도 풍부한 멋과 변화를 지닌 장편소설과 같다 할 수 있으리라.

83~84p.
..명소나 고적은 어디라 할 것 없이 실제로 가보면 대체로 겨우 이건가 싶을 정도로 시시하기 마련이다. 다만 거기까지 찾아가는 동안 길이나 주변 광경 및 그와 관련된 부수적 감정에 의해 후일담이 될 만한 흥미로운 이야기로 이어지곤 한다. 아리마의 고양이 무덤은 실제로 가보니 낚시도구 파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보다도 훨씬 더 시시한 돌조각에 불과했다. 과연 이것이 고양이 무덤의 토대일지 아닐지도 불명확할 정도였다. 우리는 옛 조병창 건물 일부가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벼랑 한쪽에서, 낮인데도 컴컴할 정도로 하늘을 뒤덮은 노목의 가지와 잡초가 우거진 벼랑 중턱에서 한두 개쯤 굴러다니는 돌을 발견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곳으로 오기까지 벼랑 오솔길과 그 주변 광경은 우리 둘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110p.
...‘후리소데 화재‘(1657년 에도에서 일어난 대형화재. 후리소데란 미혼 여성이 입는 소매가 긴 예복인데 옛날 한 소녀가 짝사랑하는 소년의 옷과 똑같은 모양의 옷을 만들어 즐겨 입다가 우연한 사고로 죽는다. 부모는 딸의 시신에 그 후리소데를 입혀주는데 화장 전에 절에서 일하는 이들이 그 후리소데를 벗겨 팔아버리고 다른 소녀가 그 후리소데를 입지만 그녀도 곧 죽는다. 사람들이 후리소데를 두려워하여 혼고 혼묘지에서 독경을 외며 불속에 후리소데를 던져넣었는데 돌연 강풍이 불어와 불이 붙은 후리소데가 절의 본당 지붕으로 날아가 불이 붙었고 혼고에서 유시마, 스루가다이, 핫초보리, 니혼바시까지 불이 옮겨 붙어 3만 명 넘게 죽었다)로 유명한 혼고의 절 혼묘지 건너편 언덕은 기슭을 흐르는 하수와 작은 다리가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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