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라는 이렇게 결론 지을 것이다.
..‘내 이야기는 낙서 위에 덧쓴 낙서일 뿐이야. 네 책에 적합하지 않아. 그러니 나를 내버려둬, 레누. 사람들은 소멸에 관한 이야기 같은 것은 하지 않아.‘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에도 릴라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몸을 숨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나. 나이가 들수록 릴라를 잘 모르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나.

.."우울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아. 자기 상황에 만족하는 사람들이나 글을 쓸 수 있는 거야. 여행을 하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나 글을 쓸 수 있는 거라고. 말도 그런 사람들이 하는 거야. 궁극적으로 자기 말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이야."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야?"
.."응.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 간혹 그렇게 되더라도 아주 잠시 동안일 뿐이야. 그 외에는 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헛소리일 뿐이야. 지금 내가 하는 말처럼 말이야. 아니면 모든 것이 제대로 통제되고 있는 척할 뿐이지."

...그에게 상처를 주고 그를 다시는 보지 않을 생각에 나는 고통스럽게 시들어갔다. 교양 있고 자유로운 여인은 꽃잎을 잃고 두 아이의 어머니인 여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여인은 유부남의 정부인 여인에게서, 유부남의 정부인 여인은 광분한 창녀에게서 멀어져갔다. 우리는 모두 다른 방향으로 뿔뿔이 흩날릴 참이었다.

..프랑코는 다정스레 속삭이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프랑코는 암울한 목소리로 자기는 사랑이란 아무런 두려움이나 혐오감 없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될때야 비로소 완전히 끝나는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마치 발밑에 바닥이 진짜로 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발을 질질 끌면서 방에서 나갔다....

..그때 릴라는 분명 ‘경계의 해체‘라는 표현을 썼다. 릴라가 그 표현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릴라는 힘겹게 그 말의 뜻을 설명했다. 릴라는 내가 ‘경계의 해체‘가 무엇인지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아주기를 바랐다. 릴라는 숨을 헐떡이면서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릴라는 사물과 사람의 경계는 섬세해서 무명실처럼 잘 끊어진다고 말했다. 릴라는 자기는 항상 어떠한 사물이나 사람의 경계가 해체되어 그 내용물이 다른 대상 위로 쏟아지는 모습을 봐왔다고 했다. 이질적인 물질이 녹아 서로 합쳐지고 뒤섞이는 모습을 목격해 왔다고 했다. 릴라는 평생 삶의 경계가 단단하다고 믿으려고 애써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우리의 삶이 상처나 충격에 내구력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릴라는 도무지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릴라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믿음도 없었다. 릴라는 분노하며 분개하면서 언제나 우리 위에 군림해왔고 모두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해왔다. 그런 릴라가 정작 자신을 녹아내린 액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껏 릴라가 한 모든 노력은 결국 자기 형태를 잃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사물과 사람을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조종했는데도 액체가 범람하면 릴라는 스스로의 형태를 잃어버렸다. 그럴 때면 혼돈만이 유일한 진실이 되었다. 그렇게나 활발하고 용맹한 릴라는 사라지고 겁에 질려 무無가 되고 말았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그제야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은 나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았다. 어머니는 나와 작별 인사를 할 때면 먼 옛날 내가 어머니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어머니가 내 안에 쏙 들어와 계속 남고 싶다는 듯이 내 품에 꼭 안겼다. 어머니가 건강할 때는 어머니의 몸이 내 몸에 닿는 것이 싫었지만 지금은 좋았다.

.."나는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어. 내 아내는 ‘지금 이 순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모호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 의미를 이해했다. 안토니오는 자기도 내 생각에 동의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 밖에 또 다른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기 나름대로 내게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인 현재의 시간이 아니라 20년 전에 해당하는 어느 날 중에서도 아주 짧은 시간을 살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키스하고 속삭였다.

..드디어 나는 나고 릴라는 릴라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내게는 이제 릴라의 권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나만의 권위가 생겼으니까. 나는 나 스스로 강해졌음을 느꼈다. 이제는 내가 출신의 피해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내 출신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출신에 어떠한 형태를 부여하고 나와 릴라를 비롯한 모두를 위해서 우리의 출신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날 나를 나락으로 끌어내리던 것이 이제는 나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해줄 바탕이 되었다....

...나는 릴라가 나를 상류사회의 일원이기는 하되 그들과는 다른 존재로 생각해주기를 바랐다. 릴라 자신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릴라는 내가 내 동료들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말을 들으며 재미있어 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이 계속 내 동료로 남기를 바랐다. 가끔 릴라가 내가 정말로 대중에게 현실을 가르쳐주고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나에게 집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릴라는 내가 책을 쓰고, 잡지와 신문에 기고하고 가끔 텔레비전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어야만 내가 고향에 남기로 한 결정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게 그런 후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릴라의 친구이자 릴라와 이웃으로 지낼 수 있는 전제 조건인 것 같았다.

..나는 사람은 각자 자기 편한 대로 기억을 정리한다는 사실을 오래전에 깨달았다. 나 역시 지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는 놀라곤 한다. 하지만 릴라의 경우 나는 사람이 자기의 이익에 반하는 방식으로 기억을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나는 이게 언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릴라는 표준어의 장벽 뒤로 몸을 숨겼고 나는 그런 릴라에게 사투리를 쓰도록 유도했다. 우리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때는 사투리를 썼으니까. 릴라가 사투리로 생각한 것을 표준어로 번역했다면 시간이 갈수록 나는 표준어로 생각한 것을 사투리로 번역해야 했다. 결국 우리는 거짓된 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릴라는 감정을 드러내야 했다.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을 쏟아내야 했다....

...나는 이제 내가 정말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내게 릴라가 주는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릴라가 내게 영감을 준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조차 숨기려 했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한번은 이런 사실을 글로 쓰기까지 했다. ‘나는 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마음속에 릴라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놓고 그런 릴라의 모습에 견고한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릴라는 릴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릴라는 나처럼 하지 못하는 것이다. 티나의 비극과 허약해진 릴라의 신체와 불안한 머리 역시 릴라가 처한 위기를 구성하는 일부 요인이었다. 하지만 릴라가 ‘경계의 해체‘라고 부르는 병의 근본적인 원인은 릴라가 릴라이기를 원치 않는 데 있었다....

..릴라는 지적이었지만 이를 활용해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이란 저급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귀부인처럼 자신의 지성을 허비했다. 니노는 바로 릴라의 이런 점, 즉 대가를 바라지 않는 릴라의 지성에 매료되었다. 이러한 릴라의 특성은 다른 수많은 여성과 차별되는 것이었다. 릴라는 그 어떠한 가르침이나 필요 또는 목적에 굴복하지 않았다. 릴라를 제외한 우리 모두에게는 무언가에 굴복했던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통해 시험과 실패와 성공을 겪고 나서 우리 자신을 현실에 알맞게 재조정했다.

.."대답한 거야. 네가 이해하지 못한 척할 뿐이지. 글을 쓰려면 삶의 의미가 될 정도로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해. 그런데 나는 살고 싶은 마음도 없어. 나는 한 번도 너처럼 강렬하게 살려는 의지를 가졌던 적이 없어. 우리가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순간 나 자신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해질 것 같아. 그런 내가 글이라니 당치도 않아."
..그전부터 릴라는 종종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지워버리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지만 1990년대 말부터, 특히 2000년대 이후로는 그 말을 짓궂은 후렴구처럼 입에 달고 다녔다. 물론 릴라의 말은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릴라는 그 말을 하는 것을 좋아했고 전혀 다른 상황에서 그 말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우리의 오랜 우정사를 돌이켜볼 때 나는 릴라가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티나가 실종된 후 릴라가 가장 힘겨웠던 순간에도 그랬다. 릴라에게 자기 삭제란 미적 욕구에 가까웠다.

..릴라의 집착은 때에 따라 온도차가 있었다. 한번은 내 명성을 트집 잡아 악의적인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이름 하나에 딸린 이야기가 너무 많아.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이름이란 결국 피와 살과 말과 똥과 하찮은 생각으로 가득 찬 자루를 묶고 있는 끈에 불과해."
..릴라는 이름 이야기로 나를 한참 놀려댔다.
.."엘레나 그레코라는 끈을 푼다고 그 자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그 기능은 변하지 않아. 물론 그전보다 엉망이 되겠지. 특별히 장점이랄 것도 단점이랄 것도 없이 망가져갈 거야."
..릴라는 기분이 특별히 우울할 때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내 이름이라는 매듭을 풀어 버리고 싶어. 풀어서 내다버리고 싶어. 잊어버리고 싶어."

..아이들은 나로서는 아직까지 감히 생각조차 못하는 태도와 목소리로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권리를 주장하며 자의식으로 충만하다.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내 딸들과 같은 행운을 가진 것은 아니다. 부유한 국가에 만연한 평범함 속에는 부유하지 않은 세계의 공포가 내재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공포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폭력이 우리들의 도시와 일상에 침투하면 그제야 흠칫 놀라며 불안해했다.

...나는 두 인형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곰팡이 냄새가 났다. 나는 인형들을 내 책등에 기대어 놓았다. 보잘것없고 못생긴 인형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혼란스러워졌다. 소설과는 달리 진짜 인생은 일단 지나간 후에는 명확해지기 보다 모호해지는 법이다. 릴라가 이토록 명확하게 자신을 드러냈으니 이제 다시는 릴라를 보지 못해도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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