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3p. ..자신의 병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결코 자신을 ‘정신병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내 모습을 똑바로 직시했을 때, 지금의 나는 단지 몇 가지 어려움이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심리치료나 약물치료를 통해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은 운 좋은 사람들과 달리, 나는 평생 병명도 알지 못하는 이런저런 문제들로 고통을 받아왔다. 물론 지금이야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회복‘의 온전한 개념은 과연 내가 무엇으로부터 회복될 것인가, 하는 고통스러운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가령 약물중독의 경우, 회복되면 약을 하기 이전의 본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그 밖에 정신병의 경우, 몇 가지 증상에서 벗어나면 어느 정도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됐다는 진단을 받는다. 하지만 돌아갈 굳건한 자아가 없다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기본적으로 망가진 상태라면? 기억하는 것이라곤 온통 고통과 외로움뿐이라서 ‘정상적인 상태‘, ‘건강한 상태‘가 어떤 건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면? "넌 아주 행복한 아이였단다."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절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니 무엇으로부터 회복할 수 있겠는가?
61p. ..마음관찰은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고, 상황을 변화시키려 애쓰지 않은 채, 그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가만히 바라보는 기술로서, 변증법적 행동치료 가운데 수용 전략의 기초이다. 그룹 훈련에서 우리는 눈을 감은 상태에서 강물이 흐르고 강물 위로 나뭇잎들이 떠다니는 풍경을 상상하도록 지시받았다. 각각의 나뭇잎은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과 같다. 나뭇잎을 붙잡을 필요는 없다. 쫓아다닐 필요도 없고, 나뭇잎의 존재를 부정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모든 것들을 지나가게 내버려두는 것뿐. 흐르는 강물 위를 떠 가는것이 잘려진 머리든 낡은 타이어든 간에 말이다....
71p. ..고작 대여섯 살 때에도 나는 밤에 눈을 감으려 하지 않았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눈을 감아버리면 별도 없는 캄캄한 밤하늘처럼 머릿속이 온통 어둠으로 가득 찼고 그 속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우주여행에 관한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던 장면과 흡사했다. 우주선을 벗어난 우주비행사가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텅 빈 우주 공간 속으로 무력하게 하강하는 장면 말이다....
78p. ...닥터 M이 나와서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말할 때 구부정하게 앉지 않으려고 신경 쓰면서, 이건 마치 남자친구와 선생님과 아버지에게 한꺼번에 면접을 보는 것 같았다.
91p. ..이로써 나는 우리의 내적 경험이 ‘불안정한‘ 정서가 아니라 명확한 정서를 특징으로 할지 모른다는 주장을 다시 한 번 접하게 됐다. 마샤 리네한 박사는 우리가 감정의 화상을 입은 희생자와 같다고 말한다(1993a). 자나리니 박사는 이처럼 특별한 종류의 고통, 즉 경계성 인격장애의 고통 자체를 장애로 본다. 우리는 한 차례의 끔찍한 고통에서 또 한 차례의 고통으로 내동댕이쳐진 정서적 간질 환자다. 내면의 요소에 따라 오염되고 외부의 요인으로 상처받는다. 지금까지 나는 이 같은 고통을 없애려 애쓰며 살아왔지만, 그럴수록 더욱 깊은 고통 속으로 빠져들 뿐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겪은 후에도 내게 남은 선택은 여전히 자살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다니, 도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101~102p. ..내 자극 요인은 고립감, 과거에 대해 생각하기, 돈 관리, 무시당하는 느낌… 등, 단순히 사회적 접촉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걸 이내 깨달았다. 사실상 거의 모든 요인들이 나에게 당혹스러움을 촉발시키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차츰 확신하기 시작했다. 이건 감정을 감싸는 피부가 벗겨진 상태에서는 생살이 드러나 가느다란 깃털이 스치기만 해도 쉽게 상처를 입게 된다는 리네한 박사의 설명과 상당히 유사했다(1993a). 내 인생이 허물어질 땐 이런 자극 요인을 방어하는 수단들도 약해져 나는 점점 모든 일에서 거의 항상 상처를 받았다.
122p. .."더 자주 외출하거라." 엄마가 말했다. "그렇게 어쩌다 한 번씩 나가니까 한 번 외출할 때마다 가벼운 트라우마를 입는 거야. 자주 외출하면 그 환경에 점점 익숙해질 거다." 나는 내 광장공포증을 알아봐 준 엄마가 고마웠다. "그리고 만날 그 어두컴컴한 데만 돌아다니지 말고." 엄마가 덧붙였다. "적극적으로 사람을 사귀도록 노력하렴.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말이야."
124p. ...하지만 지금 나는 내가 말도 못할 만큼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엄마의 인정이 필요했다. 비록 그 사실이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큼 엄마를 무섭게 할지라도. ..그렇지만 우리 두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을 주지 않고도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기는 할지 모르겠다.
126p. ..과도기 모임에서 사람들은 ‘회복을 위한 일자리‘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나는 다시 삶에 참여하는 법을 배워야 하므로 이 일을 시작할 것이다. 나는 내 느낌과 반응을 다스리는 훈련을 해야 하고, 왜곡된 생각과 감정이 나를 통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141p. ...이른바 경계성 인격장애 치료라고 하는 걸 받은 지 거의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아무 때나 불쑥불쑥 솟구치는 분노,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편집증, 죽 끓듯 변하는 변덕 등의 내 증상들과, 무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 외롭고 무력한 존재인 것만 같은 그 모든 감정들이 더 이상 병의 증상이 아니라 내 건강 상태에 대한 실질적인 반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진단이 정신건강 시스템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시스템들) 안에서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과, 사실상 그 반응이 우리를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틀 속에 가두어놓는, 이른바 증상이라고 하는 것들을 촉발시킨다는 사실도 마침내 깨달았다. 이러한 상황을 임상 용어로 ‘의인성 질병(iatrogenic)‘ 이라고 하는데 치료가 오히려 더 큰 병을 일으킨다는 의미다.
169p. ...살 가치가 있는 삶을 만들자는 변증법적 행동치료의 구호는 그저 목숨만 붙이고 살아 있으라는 의미라기보다,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또 다른 변증법적 방식도 마음에 간직하게 되었다. 즉 우리가 가진 병이 모든 인간관계와 사회적 기능을 악화시켜 기본적으로는 실패한 삶이라는 황무지를 헤매겠지만, 그럼에도 궁극적으로 살 가치가 있는 삶을 만들기 위해 삶의 작은 편린들을 모아가면서 묵묵히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194p. ...우리에게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씨앗 하나가 있다. 그렇다면 이 씨앗이 어떻게 커다란 나무로 자라는 걸까? 우리의 장애를 배양하는 환경을 리네한 박사는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함(invalidation)‘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리네한 박사는 ‘남용(abuse)‘ 이나 심지어 ‘방치(neglect)‘라는 용어가 아닌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함‘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상처받기 쉬운 아이의 내적 경험들—생각, 감정, 느낌, 확신—이 보호자와 양육자로부터 어떻게 무시되거나, 부인되거나, 일관되지 않은 반응을 얻거나, 벌을 받거나, 지나치게 단순화되는지 설명했다. 가족 내에서 (혹은 학교나 심지어 문화 내에서) 반응의 ‘무조율(nonattunement)‘이 결국 근본적인 생물학적 취약점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리네한 박사에 따르면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환경은 부정적인 감정을 통제하거나 감추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사소하게 취급될 뿐만 아니라, 가뜩이나 쉽게 상처받는 이들에게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자기 기준에 따라 산다고 비난한다(1993a).
234~235p. ..그런데 이 옷을 입는 순간 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웬만한 문제는 쉽게 쉽게 넘겨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한편, 이대로 위대한 투우사나 소방관이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내 몸속에서 활발하게 분비되는 아드레날린 작용으로 몸으로 할 수 있는 직업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토바이는 이토록 놀라운 힘을, 아니 그 이상의 힘을 발휘했다. 마침내 오토바이에 올라탔을 땐 가슴 속에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려서, 순수하고 청량하며 명료하게 빛나는 세계가 내 가슴 속으로 앞다투어 들어올 것만 같았다. 이런 기분은 완전히 깨어 있는 의식 상태로 두려움에 접근하도록, 격앙된 반응을 일으킬 때마다 이성적인 마음을 끌어들이도록 나를 재촉했다. 오토바이는 변증법적 행동치료 기술을 실행할 또 다른 장소이기도 했는데, 예전에 변증법적 행동치료 모임에 참여했을 때 내가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탄 경험을 묘사하는 과제를 여전히 활용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참가자들이 모두 의아하다는 듯 눈알을 굴리던 모습을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과제를 통해 우리는 카운터스티어링(countersteering,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중력을 조절하기 위해 회전할 때 역방향으로 조종하는 방법—옮긴이)이 어떻게 상반된 행동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는지, 정지 신호에서 어떻게 대인관계 효과를 연습할 수 있는지 경험했었다.
266~267p. ..‘정당성을 인정한다(validate)‘는 말은 정말 중요한 말이다. 이 말은 누군가가 아무리 문제가 많아 보이고 어딘가 장애가 있어 보이더라도, 그 사람의 감정과 행동, 생각을 타당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이 말은 ‘잘못됐음을 입증한다(invalidate)‘는 말과 반대 의미로, 리네한 박사는 잘못됐음을 입증한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취약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경계성 인격장애의 증상을 촉발시키는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1993a). 앨리슨은 내가 장애가 있음을 인정해주고, 이 모임에 참석한 것이 얼마나 힘든 결정이었고 그동안 내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이해해줌으로써, 바로 이 정당성 인정이라는 강력한 알약을 나에게 제공한 것이다. 정당성을 인정받았다는 인식이 내 안의 작은 구멍을 가득 메웠다. 나는 근본적인 수용을 비롯해 그 밖에 모든 기술들을 연습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해왔지만, 이러한 기술들은 나 자신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그 위로가 불안전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은밀히 장애를 유지하며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271p. ...이 모임의 노출 연습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여러 모습 가운데 차단되었거나 서로 충돌하는 부분들에 접근하는 것과 관련되었다. 이 기법은 리처드 슈바르츠(Richard Schwartz)가 심각한 대식증 여성 환자들을 연구하면서 개발한 ‘내적 가족체계(Internal Family Systems, IFS)‘라 불리는 치료법에서 추린 내용이다. 환자들이 자신의 다양한 부분들을 너무나 자주 언급하는 걸 목격한 슈바르츠는 내적 경험이 내면세계의 각각의 요소들에 따라 체계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체계는 가족관계와 매우 유사하게 작동하며 각각의 부분들은 그 나름의 독자성과 목표와 가치를 지닌다. 내적 가족체계 치료는 언뜻 좀 희한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은—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복수의 자아를 지니고 있고, 이러한 복수의 자아 혹은 인격은 각각의 역사와 역할, 연합체, 목표, 갈등을 지니고 있어, 가족 구성원이 가정 안에서 행동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호작용한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294p. ..한편 에단과 나는 매주 에단의 사무실에서 내 다양한 부분들에 대해 치료를 계속했다. 이건 일종의 부분들의 파티라고 할 수 있었다. 부분들이 많을수록 더 많은 걸 발견할 것 같지만, 내적 가족체계 치료 모형에서 설명된 것처럼 이 부분들은 정서적으로 황폐하고 억압된 망명자 부류, 유익하지만 통제적이고 방어적인 관리자 부류, 과격하고 충동적인 소방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올리비아의 모임에서 처음 연습을 시작할 때, 나는 계속 여섯 살 아이의 모습에 접근해갔다. 이 망명자 부분은 수치심을 느끼고 숨으려 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지만, 이 아이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사랑을 받겠노라는 간절한 소망 때문에 감정과 욕구가 엄청나게 강했다. 아이는 성욕과 애정 어린 돌봄과 배려를 혼동했다. 아이는 테일러와 섹스를 하려는 순간 그만 흠칫 놀랐다. 테일러가 아버지를 대신하는 인물이 됐기 때문이다. 아이는 단단한 기반을 경험한 적이 없으며, 여전히 다른나라에서 사용하는 언어만을 이해했다....
308p. ..나는 이 말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다른 별에서 태어난 사람 같았다. 엄마는 모든 고통을 상자 안에 넣어놓고 나 몰라라 하고 떠나버렸다. 반면에 나는 고통을 끌어당기는 자석 같았다. 분노, 상처, 두려움, 불안, 증오 같은 무수한 금속 가루들이 사방에서 나에게 달려들어 내 살갗을 뚫고 들어와 곧장 혈류를 타고 흘렀다. 내가 아는 유일한 해결책은 고통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나 자신을 지우는 것이었고, 엄마의 해결책은 상황 자체를 지우는 것이었다.
323p. ...소속감은 누구에게나 있는 근본적인 욕구다. 하지만 경계성 인격장애가 있는 사람의 경우 그 도를 넘어선다. 아무리 신맛이 나는 음료라도 누군가가 마시라고 주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꿀꺽꿀꺽 받아 마시고, 그러고 나면 일시적으로나마 자아감(sense of self)이 만들어지니 말이다....
330p. ..그 순간 그는 부처, 즉 ‘깨달은 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처는 신이나 신성한 존재가 아니며, 모든 이를 고통과 혼란에 빠뜨리는 왜곡된 인식, 극도의 부정적 감정과 행동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이해한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라는 한 남자에게 붙이는 칭호이다. 여기에서 모든 이란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만이 아닌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말한다. 이 같은 깊은 통찰력의 순간에 부처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불교‘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이 ‘깨달음‘이라는 용어 역시 많은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지만, 본질적으로 ‘눈을 뜸‘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엇에 눈을 뜨는 걸까? 일부 전승에서는 이를 참 존재(true state of being)에 대한 자각이라고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모든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자각하는 사람, 깨어 있는 사람의 특성에는 박식함, 사심 없음, 순수한 이타심—그야말로 연민과 지혜로 똘똘 뭉친 완벽한 화신—이 포함된다는 걸 알게 됐다.
337p. ..."무상(無常). 우리가 가야 할 견해는 태어난 모든 것은 죽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라집니다. 그 무엇도 이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뭇잎, 인간, 우주, 조건적인 모든 만물은 언젠가 소멸됩니다." 그는 이 말이 가슴속에 깊이 가라앉도록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것은 불교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이것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만물이 무상하다는 사실은 자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얼마나 무상한지 알 때, 그 소중함을 이해하게 됩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인생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생명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한다면 숨을 쉴 때마다 이번 숨이 마지막 숨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다시 숨을 들이마실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언젠가 다시는 숨을 쉬지 못할 순간이 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음에 또 숨을 들이마시는 걸 당연하게 여깁니다. 호흡을 관찰하면 호흡 역시 항상 들어오고 나간다는 걸 알게 됩니다. 호흡을 잡아둘 수 없습니다. 해보시면 아실 겁니다!"....
338p. ..그때 어떤 생각 하나가 번쩍 하고 뇌리를 스쳤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감수하는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지만, 경계성 인격장애의 뇌는 이러한 기본적인 현실을 더욱 견디기 힘들어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경계성 인격장애가 있는 우리들은 언제나 이 무상성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손 안에 움켜쥐려는 우리의 욕망은 강렬하고 완고하며, 우리의 집착은 굽힐 줄 모른다. 무상성은 인생의 필연적인 사실이지만 우리에게는 악몽이다. 마샤 리네한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법칙을 강조했다(1993b). 현실이 항상 변하고 있다면 우리는 현실에 매달리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39p. ...지금까지 나는 의식하기와 마음관찰하기를 기분이 나아지기 위한 자기수양 기법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수행 방법들이 현실을 바라보는 다른 방식보다 정확하고 분별있는 방식을 향해 문을 열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뜻밖의 일은 이것이 대단히 훌륭하고 참신한 발상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건 변화뿐이다‘라거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같은 말들을 누구나 흔히 듣고 있으니 말이다. 리네한 박사는 변증법적 행동치료에 관한 그녀의 저서들에서 지속적인 변화는 변증법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했다(1993a, 1993b). 지금까지 이런 내용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이해하는 것과 깨닫는 건 엄연히 달랐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 같았다.
340p. .."그렇지만 제 질병은 어떻게 고칠 수 있지요?"" .."당신 역시 다른 사람들과 같습니다. 고통을 주는 감정들—분노, 욕망, 무지 때문에 고통을 받는 거지요. 당신은 영원이란 없는데도 영원을 믿고 있고, 단단한 자아란 없는데도 그런 자아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당신은 카르마(Karma, 업)의 무오류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신은 자신의 본질, 타고난 내면의 지능, 즉 부처의 본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님 말씀은 모든 사람의 본질은 선하다는 의미인가요?" .."선과 악의 측면에서 생각하지 마세요." 린포체가 말했다. 당신의 존재는 근본적으로 순수하며 절대적으로 완벽합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하늘과 같아요. 일시적으로 구름에 덮여 있을 수는 있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는 걸 누구나 분명히 알고 있지요. 결코 빛을 거두지 않는 태양과도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어요?" .."이해는 하지만… 솔직히 믿지는 못하겠어요. 느낌도 안 오고요." .."당연합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깨달음을 통해 알아야 하는 거니까요. 당신은 가난한 집에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쓰레기 위에 지어진 판잣집에 살고 있지만, 쓰레기 아래에는 가장 고귀한 다이아몬드가 있습니다. 소망을 이루어주는 보석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보석을 발견해야 하고 손에 쥐어야 합니다."
356~357p. ..그래서 이번에 침대에 들어가 누울 땐 내가 느끼는 고통이 내 전부가 아닌 내 안에서 움직이는 마음속 부분이라고 여기고 고통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나는 이 작고 어두운 부분이 머리를 산발한 채 좁은 공간에 웅크리고 앉아 앞뒤로 몸을 흔드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터이므로,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내가 잘 돌봐주겠다고 말했다. 잘 돌봐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약속했다. 그녀는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잠시 밖으로 나와 원하는 걸 말해주지 않겠느냐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녀가 필요한 걸 채워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처음엔 그녀가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잠시 후 내 안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고(이럴 때면 나는 늘 기겁을 하고 놀란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주스." .."주스?" 내가 물었다. 내 안의 어둠 속에서 가녀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녀가 목이 마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갈증을 느끼는 게 나일까, 아니면 마음속의 이 부분일까? 틀림없이 이게 다가 아닐 것이다. 그녀가 울지 않은 이유가 단지 수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니, 그럴 리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걸 내가 정말로 줄지 어떨지 이런 식으로 시험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냉장고를 열어 사과주스를 한 잔 따랐다. 사과주스에서 차가운 별들과 따뜻한 스카프가 함께했던 가을 밤 엄마 집 뒤편 풀밭 같은 맛이 났다. 아주 평범한 사과주스 한 잔, 해마다 과수원과 해질녘을 담뿍 담고 돌아오던 어린 시절의 달콤한 음료 한 잔. 주스를 다 마실 즈음 눈물도 사라졌다. 그리고 내 안에 이런 부분들이 살아 있고, 그들이 실제로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또다시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385p.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에단. 사실 전 섹스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줄 아는 어른 부분과의 접촉이 완전히 끊어졌어요. 언제부턴가 어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아이가 돼버려서 한계와 권리의 개념조차 갖지 못하게 됐어요."
402p. ..이런 소망은 상당히 고상하게 들리지만, 나는 몇 가지 의문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게 자아를(물론 징그럽게 불안정한 상태일수록 미친 듯이 쌓아올리려 애썼던) 다 없애버리고 나면, 도대체 어디에 의지한단 말인가? 자신을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혹은 자신의 다른 면모와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으로 나를 표현한단 말인가? 불교에서는 실체가 있는 유형의 물질은 모두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공허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영구적일까? 나는 영구적인 것은 불성(佛性)뿐이라는 샬파 린포체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불성은 애초에 태어난 적도 없기 때문에 파괴시킬 수도 없다. 불성은 우리의 존재 자체, 다시 말해 원시적인 순수함, 타고난 지성, 깨달음에 이른 마음—진흙 속의 다이아몬드—이다. 이런 내용들을 배우면서 나는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고, 최소한 아래층으로 내려가 수행을 시작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412~413p. ..린포체가 우리에게 숨을 들이마실 때 어둠이 들어오고 숨을 내쉴 때 빛이 뿜어져 나오는 상상을 하도록 수행 방법을 가르치는 동안, 나는 내 내면의 원천이 빈곤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로부터—기왕이면 페니스가 있는 누군가로부터—최대한 많은 사랑과 빛을 흡수하려 애쓰고 있었다. 온툴 린포체가 우리에게 세상의 고통이라는 검은 망상들을 들이마시고 행복의 하얀빛을 내쉬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라고 지도할 때에야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통렌, 보디치타, 마음의 변형. 이 모든 것은 나에게 한 가지 결정적인 요인으로 귀결되었다. 즉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쓸 자비조차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비를 내어줄 수 없었다....
419~420p. ...불교의 수행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것이지, 단순히 상징이나 예법, 책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 경계성 인격장애는 정신이상이 아니다. 경계성 인격장애는 그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겪는 경험을 명명한 것에 불과하며, 이 경험에서 우리는 고통의 연속체 맨 끝에 살고 있을 뿐이다. 끝없는 탐욕, 지나친 편협함, 우리의 행동이 어떻게 이 끝없는 순환 속에 우리를 가두어놓는지에 대한 완전한 무지 등, 경계성 인격장애의 징후들은 불교에서 둑카(dukkha, 고苦)라고 묘사하는 내용의 핵심 요소들이다.
427p. ..불성을 발견하는 길은 고통을 피함으로써가 아니라 고통 안에서 고통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리하여 경계성 인격장애는 내 스승이 되었다. 나는 이제 이 질병을 부인하거나 나와 이 질병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나 자신을 경계성 인격장애와 동일시하고 싶지도 않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내 안의 밝은 씨앗이 그 외피를 뚫고 나와 무럭무럭 자라게 해, 이제는 수치심을 느끼지도 구석에 숨어 있지도 않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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