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p.
..잔을 든 고가미의 손이 젖어 있었다. 잔에 묻은 물방울일 것이다. 그냥 물인데도 묘하게 생생해서 나는 눈을 돌렸다.
.."방이 지저분한 것은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하지만 그 애가, 전에 왔을 때보다 물건이 늘어난 거 아냐, 하고 물었어요. 그게 엄청 부끄러웠어요."
..어서 오세요, 하고 종업원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물건이 점점 늘어나고 그걸 버릴 수 없는 게 엄청 부끄러워요."

96p.
.."넌 언제나 분발하는 사람을 무시해."
..하지만 아키라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예상 밖의 말이었다.
.."뭐?"
.."자기는 늘 노력하지 않는데도 선택받는다고 생각하지? 언제나 수동적인 자세로, 그래서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뭔가를 얻으려는 사람을 무시하는 거 아냐?"

110p.
..어빙에 대해 스구는 이렇게 말했다.
.."어빙은 모든 사물을 같은 간격으로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사건에 우열을 두지 않고 같은 종이 위에 놓고 있지. 그거야말로 소설이 할 수 있는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197p.
..나는 자신의 말에서 ‘구세주‘ 이상의 것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줌마가 경험한 사건, 거기서 만난 말에 필적하는 것을 내 몸에서 짜내는 것이 가능할 리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역시 큰 타격을 받았다.
..나는 그만큼 절실하게 말을 원하는 게 불가능했다. 내가 쓰는 말이 이 세상에서 뭔가 의미 있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내 말은 평범한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239p.
..스미에도 다정했다. 그리고 미지근한 탕 같았다. 하지만 스미에와 있으면 자신이 아무래도 전락했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결코 아름답지 않은 연상의 스미에에게 의지해 살고 있는 서른세 살의 머리숱 적은 자신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스구와 고가미와 있으면 나는 간단히 자신의 황금시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스구와 있었을 때 얼마나 빛났었는지를, 내가 고가미와 있었을 때 여자애들이 얼마나 술렁거렸는지를, 나는 현재의 자신을 무시하고 돌이켜볼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천박한 행위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나는 현실의 자신에게 실컷 혼나고 있었다. 현실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빛나는 추억 안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용기가 있었던 것이다.

277p.
..나락의 밑바닥에도 단계는 있다.
..나는 몇 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높이의 단을 하나 올라가 어떻게든 스미에를 내려다보려고 했다. 내가 스미에에게 차갑게 대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최근에는 스미에와의 약속보다 스구나 고가미와 만나는 일을 우선시했고, 스미에의 문자를 무시해버린 일도 종종 있었다. 게다가 처음부터 나와 스미에의 관계는 스미에의 일방적인 애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스미에는 쓸쓸했던 것이다. 쓸쓸해서 자신이 없고, 그래서 잘못을 범한 것이다.

298p.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스구와 고가미를 만나러 갔다.
..두 사람은 아마 평소에 가던 패밀리 레스토랑에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연락하지 않고 가는 것에서 나는 의미를 찾고 있었다. 약속하지 않고 가도 두 사람이 평소의 장소에 있는 것이 내게는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308~309p.
.."물건이 늘어나는 게 부끄러워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고가미가 유일하게 부끄러워한 것. 물건이 늘어나는 것. 그것은 아마 ‘계속 살아갈 의사‘였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언니를 보고 고가미는 자신이 계속 살아가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바로 스구가 대지진 후에 생각했던 것처럼.

313p.
..시간은 남아돌 만큼 있었다. 나는 책을 읽었다. 텔레비전을 틀어 환하게 웃는 누군가를 보는 것이 두려웠고 음악을 틀어 우연한 소리에 환기되어 우는 것이 두려웠다. 아무튼 나는 무음 상태로 있고 싶었다. 누구의 목소리도 들어오지 않는, 나의 기척밖에 없는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책은 능동적으로 몰두할 생각이 드는 유일한 것이었다.
..제목을 보고 고통스러워질 것 같은 책은 읽지 않았다. 특히 《호텔 뉴햄프셔》는 책장 깊숙이 넣어 보이지 않게 했다. 스구가 떠올라 고통스러워졌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집 안에 있는 모든 책을 읽는 게 두려워졌다. 책장은 나의 역사였다. 과거와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410p.
..읽기 시작하자 나는 순식간에 나라는 윤곽을 잃고 베리가(家)의 가족에게 바싹 달라붙을 수 있었다. 함께 웃고, 함께 화내고, 함께 눈물을 흘리고, 함께 죽고, 그리고 또 계속 살았다. 소설의 훌륭함은 거기에 있었다. 뭔가에 사로잡혀 있던 자신의 윤곽을 한번 철저하게 해체하는 것, 파괴하는 것. 나는 그때 그저 읽는 사람이 되었고, 나는 내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다 읽었을 무렵 나는 나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다. 내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무엇에 눈물을 흘리며 무엇을 꺼리고 무엇을 귀중하다고 생각하는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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