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p.
..전혀 모르는 세계에 희희낙락 뛰어드는 쾌활함은 내게 없다. 먼저 공포가 있다. 그 세계에 친숙해질 수 있을까, 살아갈 수 있을까. 공포는 잠시 내 몸을 정지시킨다. 그리고 그 정지를 간신히 풀고, 등을 밀어주는 것은 체념이다. 내게는 이 세계밖에 없다. 여기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는 체념은 태어난 순간의 ‘이미 태어나버렸다‘는 사실과 느슨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19p.
..아무튼 누나는 어디에서든 가장 마이너리티라는 것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것은 아마도 누나의 ‘보살펴달라‘는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태어난 순간부터 어머니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는 과거에 다다르는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람의 성격이나 언동을 모두 과거의 사건과 연결하는 카운슬링 같은 사고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누나는 애지중지 태어났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56p.
..대체로 늘 이런 식이었다. 내가 화내기 전에 누나가 격노하고 내가 울기 전에 누나가 오열한다. 그러면 나는 왠지 모르게 주저하게 되고 침묵하게 될 뿐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성격의 영향은 남았다. 나는 누군가가 내 ‘감정‘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되면 침착할 수 없었다.

71p.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식사로 얻는 영양분만이 아니다. 어머니나 어머니 비슷한 사람, 역시 어른의 애정이 중요하다. 애정이 부족하다고 해서 물리적으로 죽지는 않지만 아이는 거의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고독을 맛본다. 나는 누나와는 다른 사람이어야 했고, ‘고분고분하고 착한 아이‘인 한 죽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229p.
..어머니의 방식은 절대적으로 잘못되었지만, 잘못된 만큼 진실이었다. 자신을 더럽히는 행위를 함으로써 어머니는 그들과 같은 지평에 서 있었다.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인간으로서 비열하다‘ 하는 규탄받을 방식으로 어머니는 외쳤다.
..반면 나는 안전한 장소에서, 누구도 돌을 던지지 못할 장소에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압도적으로 그들을 멸시하고 있었다. 어머니보다 깊은 곳에서.

317p.
..결국 나는 기내 화장실에서 울었다.
..내 고막의(있다고 한다면) 주름 하나하나에 제이납의 울음소리가 들러붙어 있었다. 그 소리가 카이로의 추억을 모조리 끌어내고 있었다. 시내에 울리는 아잔, 가스 판매자의 목소리, 정육점에 매달린 머리 없는 소, 대량의 염소 똥, 소파에서 우는 어머니, 야곱의 모든 것, 그리고 나일 강에 나타난 하얗고 커다란 동물.
..나는 제이납의 울음소리에 바싹 달라붙듯이 울었다. 비행기의 좁은 화장실은 눈부신 이집트의 추억으로 가득 차 마치 관 같았다.

327p.
..단언컨대 누나의 새로운 반 친구들이 나쁜 게 아니었다. 누나 같은 이질적인, 게다가 스스로 그 이질성의 가치를 높이려는 사람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취할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그들은 거의 태어난 동네를 벗어난 본 적이 없었고, 올해는 입시를 앞두고 있었다.
..싹트기 시작하고 나서 순식간에 괴물처럼 성장한 자의식을 떠안고 그들은 열심히 살고 있었다. 열심히 한 것으로 말하면 누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누나의 방식은 다른 모두와 너무나도 달랐다. 그리고 이질적인 것은 배제될 운명에 처해졌다.

351p.
..이모가 고른 것은 맥락이 없었지만, 맥락이 없었기에 진지함이 있었다. 이모는 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해 그것들을 흡수했던게 아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기 위해 예술을 이용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이모는 자신을 위해, 어쩌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만 그것들을 원했다. 이모는 아마 엘라 피츠제럴드에게서도, 비요크에게서도, 다자이 오사무에게서도, 소마이 신지에게서도 평등하게 힘을 얻고 그것을 양식으로 삼았다. 때로는 본 조비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긴이로 나쓰오의 시를 읊조리며 스파이크 리의 영화 대사를 흉내 냈다.
..누나는 그런 이모를 사랑했다. 이모가 좋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았지만 이모의 진실성만은 무엇보다 믿을 수 있는 것이었다.

442p.
.."소설만이 아니야. 음악도, 영화도 그래."
..스구는 문고본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세계 이외에도 세계가 있다고 생각되거든."
..스구의 이 말은 나중에 내게 영향을 끼쳤다. 무척 커다란.
..하지만 그때의 나는 스구가 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만 직접 들었을 뿐이었다.
..스구에게 영화나 음악, 소설은 지식이 아니었다. 자신을 장식하기 위한 지식은 더욱 아니었다. 스구에게 그것들은 의지할 것이었다. 한층 더 절실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자랑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것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스구는 구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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