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p.
..글쓰기에 관해 가장 감명 깊게 들은 말은 대학 시절 은사가 들려준, 이른바 모파상의 ‘벽돌론‘이다.
.."한 편의 훌륭한 글은 잘 지은 벽돌집과도 같습니다. 잘 지은 벽돌집은 벽돌 하나를 빼면 집 전체가 와르르 무너집니다. 글 역시 단어 하나만 빼도 글 전체가 와르르 무너지듯이 써야 합니다."

45p.
..한 단락 안에 있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유기성이 있고, 그 유기성을 좀 더 밀착시키거나, 적당히 떨어뜨리기 위해 쉼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장에서 한 단어를 빼면 그 문장이 무너지고, 그 문장이 무너지면 그 단락이 무너지고, 그 단락이 무너지면 한 장(章, Chapter)이 무너지고, 그 장이 무너지면 책 전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결국 책 한 권과 한 단어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매우 긴밀한 유기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62p.
..물론 이렇게 정해놓고 나니 할 일은 상당히 줄어버리게 되었다. 세상에는 나름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고, 그 원칙과 룰을 따르지 않으면 자연히 할 일은 줄게 된다. 하지만 나도 나름의 작은 세계이고, 두 개의 다른 세계가 만날 때는 각자의 원칙과 룰이 합의될 때만 함께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덕분에 나는 잡스러운 일들로부터 해방(이자 단절)되었고, (좀 더 궁색해지고) 좀 더 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97~98p.
..사실, 취향을 나눈다는 것은 굉장히 내밀하고 은밀한 고백이다. 그 안에 한 사람의 세계관과 철학, 혹은 삶의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적이건, 공적이건, 직접 얼굴을 마주한 자리에서는 가급적이면 취향을 고백하는 우는 범하지 않으려 한다. 간혹 취향의 충돌이 가치관과 세계관의 충돌로 번지기도 한다는 것을 경험칙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혼자 만끽하기에 아까운 것은 소설 속 주인공이라는 분신을 빌려 어떤 장소, 음식, 책, 노래 따위를 권한다. 어차피 소설이라는 것은 허구의 산물이기에 이에 대해서 심각해질 필요가 없고, 나로서도, 독자로서도 부담이 없다. 따라서 작가의 입장에서도 담백하게 권해볼 수 있다.

124p.
..그러다 문득 깨달은 사실이 있는데, 없는 것과 가진 것이 일치하는 항목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고독이다. 고독은 관계의 결핍에서 오는 산물이며, 동시에 자아와 마주하는 시간의 산물이다. 고로 고독은 없는 것이자, 있는 것이다. 낙엽이 떨어지지 않아도, 겨울의 찬바람이 불지 않아도, 장마철의 빗방울이 가난한 처마 밑에 주르륵 떨어지지 않아도, 나와 고독은 피부처럼 맞닿아 있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인간이란 모두 ‘인생이란 섬에 유배를 온 존재‘들이며, 소설가 박경리에 의하면 ‘작가란 태생적으로 고독한 존재‘이다. 이에 최인호 선생도 비슷한 말로 거들었는데, 아마 ‘작가란 스스로의 고독과 자유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유의 말이었던 것 같다....

163~164p.
.."타인에게, 혹은 세상에 거짓말을 할지언정, 적어도 나 자신에게 거짓말하지는 않겠다."
..소설가로서 세상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조건이다. 하지만 그 거짓말을 ‘진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견주어보고, 대입해보고, 적용해볼 수도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혹은 ‘에이. 이 최민석이란 작자의 이야기는 너무 허황돼서 말이야. 그저 그런 이야깃거리로 끝나버리고 말아!‘라고 불평해도 좋다.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어찌됐든 30대에 들어서면서 세상에 거짓말을 할지언정, 내 자신을 속이지는 말자고 결심했다. 그것이소설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비단 소설가만의 결심은 아니라고 본다.

181p.
..뭐, 굳이 말하자면 <심야식당>의 만화가 아베 야로가 "쓸모없는 만화가 좋은 만화다" 라고 말한 것처럼, 나 역시 ‘쓸모없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적당히 쓸모없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그렇다면 ‘적당히 쓸모없다‘는 건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일단, 소설은 생활에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소설이 한 인물의 삶을 모델로 제시하고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면, 왠지 시어머니 잔소리를 듣는 것 같아서 던져버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 둘째로 소설은 일단, ‘아니, 이딴 걸 소재로 삼았다니!‘라는 비웃음으로 시작될지라도, 읽다 보면 ‘오호. 이런 게 소재가 되는군‘ 하는 과정을 거쳐, 어느 순간 ‘역시 일상 속에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것들이 잔뜩 숨어 있단 말이야!‘ 라는 공감까지 이끌어낸다면 그 목적을 훌륭히 달성한 거라 생각한다. 즉, 일견 쓸데없는 소재를 택해, 젠체하지 않는 어투로, 쓸모없는 이야기를 나름대로 성실하게 풀어놓는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의 요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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