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무선)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ㅣ 창비청소년문학 78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나의 사춘기는 열다섯 살에 왔다. 그때의 나는 삶의 이유, 관계 맺는 방식, 친구와 가족의 의미, 사랑이나 우정같은 추상적인 관념에 매달렸고 그런 것들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고민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호의를 가지고 있을 것이며 선하게 행동하려고 할 것이라는 믿음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 것도 그때였다. 그 균열의 시작점이 된 친구의 말은 바로 이것이다 : 나는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아냐, 판단하는 거지. 그리고 그 판단이 맞다면, 상대방은 그걸 이해라고 느끼겠지.

나의 혼란스러웠던 시절을 퉁 쳐서 청소년기라고 부른다면, 《아몬드》의 윤재와 곤이, 그리고 도라도 그즈음을 통과하고 있는 것일 테다. 아마 각자의 방식은 다 다를 것이다. 윤재는 묵묵히 걸어갈 것이고, 곤이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나아갈 것이고, 도라는 바람같이 달려서 빠져나가고 있는 중일 지도 모른다. 나는 《아몬드》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나름대로 그들의 걸음걸이를 상상했고 또 그 뒷모습을 그려보았다. 윤재는 그들과 함께 걸어가는 중이었고 그들과 비슷한 길이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다. 내 생각 속의 윤재는 딱 그 정도이다. ‘딱 그 정도’라는 것은, 윤재를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윤재는 자신의 걸음으로, 자신의 속도로, 그들과 비슷한 시기를 조금 이르거나 조금 늦거나 조금 돌아서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사범대생이고, 사범대생은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교직 과목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특수교육학개론’이다. 나는 지난 여름학기에 이 수업을 수강했고 수업을 통해 국가가 분류한 장애의 종류에 대해서 처음 알았으며 ‘특수학교’와 ‘일반학교’의 차이, ‘일반학교의 통합학급’의 운영 형태와 장단점 등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과제로 장애의 종류 중에서 ‘자폐성 장애’에 대해 더 깊이 조사했다. 그러면서 ‘아스퍼거 증후군’이 좀 더 경증의, 기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자폐성 장애라는 것, 자폐성 장애는 대부분 아이가 어릴 때 발견된다는 것, 언론에 많이 노출된 것처럼 천재적인 경향을 보이는 아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도 많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나열된 지식도 내 근방의 세계에만 갇혀 있던 나에게 큰 충격으로 와닿았지만, 더 절실하게 와닿았던 것은 아이가 자폐 진단을 받은 후 아이의 부모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였다.

아이가 자폐성 장애 판정을 받으면, 대부분의 부모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희망’이란 아이가 ‘정상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다. 부모는 언어 치료, 발달 치료, 행동 치료 등 온갖 치료에 돈을 투자하면서 아이가 ‘정상’이 될 수 있기를, 남들과 다르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이는 점점 커가면서 확연히 남들과는 다른 행동을 보이고, 엄마는 거기서 좌절한다. ‘엄마 커뮤니티’에서는 경험 있는 엄마가 막 자폐성 장애를 진단받은 아이의 엄마에게 ‘미리 진 빼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이건 장기 싸움이야. 너는 절대로 지치면 안 돼. 터무니없는 희망을 가지는 것도 안 되지만 희망을 잃어서도 안 돼.

똑같은 희망인데 전자와 후자는 어떻게 다른 걸까. 전자는 정상-비정상의 프레임에서 나온 희망이다. 남들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정상’일 수 있다는 희망. 이것은 장애아를 ‘고쳐놓겠다는’ 희망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자폐성 장애는 그런 식으로 간단히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 희망은 아이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부정하고 왜곡하며 자신의 이상을 아이에게 투영하고 강요하는 ‘폭력적 희망’이 된다. 한편, 후자의 희망은 ‘네가 세상과 소통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희망이다. 너를 단절된 채로 고립시키지 않겠다, 네가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어렵다면, 끊임없이 네가 소통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이해하고 그래서 너와 세상을 잇는 다리가 되어주겠다는 희망이다.

책 속에서 윤재는 ‘알렉시티미아’를 진단받으며, ‘증상이 너무 깊은 데다 나이가 너무 어려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볼 수 없’고 ‘다른 발달 사항들에 문제가 없어 자폐 소견도 없’(p.29-30)다고 소개된다. 나는 읽는 내내 이 책을 ‘자폐성 장애’를 가진 친구들, 혹은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이를 둔 부모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책의 결론부에서 윤재는 감정을 조금씩 느끼게 되고, 일탈한 곤이는 돌아오며, 의식불명이었던 엄마는 깨어난다. 그리고 책은 그것을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무언가를 해냈’(p.255)다고 서술한다. 이것은 감동적인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종류의 것인가?

자폐성 장애는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삶의 한 양태고 살아가는 방식이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기적처럼 타인의 감정을 알 수 있게 되거나, 불가능했던 무언가가 가능해지는 방식이라면 곤란하다. 그러한 ‘희망’은 앞서 말했던 첫 번째 희망이다. 폭력적인 희망, 장애인에게 정상의 잣대를 들이대는 희망. 우리는 윤재의 엄마처럼,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첫 번째 희망과 두 번째 희망을 너무 쉽게 섞어버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책은 끊임없이 ‘정상’의 기준에 대해 질문한다. 소위 ‘정상’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죽어가는 아이들이 방영되는 TV 프로그램을 보며 어떻게 태연하게 웃을 수 있는지, 왜 정상인이라면서 아무도 눈앞에서 살해되는 사람을 보고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지. 이렇게 정상성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하는 이 소설은 결국 윤재가 감정을 느끼게 됨으로써 다시 정상성으로 통합된다. 나는 윤재가 ‘고쳐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고쳐질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쳐질 필요’가 없는 이들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그들됨에 대한 포기하지 않음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의 방식대로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의 방식대로 소통하는 방식이 정형화된 사회가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그들과 우리가 공존하는 사회의 윤리이다.

이 책에 대한 소개로 빠짐없이 등장하는 문구는 ‘뇌 편도체 이상으로 감정불능 상태에 놓인 소년의 성장기를 통해 공감불능의 현대사회에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고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작품이다.’라는 것이다. 만약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성장이라면, 이것은 소설 자체가 직접적으로 비유하듯,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멀쩡하게 깨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장은 기적이 아니다. 어떠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공감불능의 현대사회’를 논한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소설은 그렇게 쉽게, 가벼운 희망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소설이 말해야 하는 것은 ‘쉬운 희망’이 아니라, ‘희망 없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다시 돌아와서, 나의 친구가 열다섯 살의 내게 한 말을 복기해보자. 친구는 이해란 불가능한 것이며, 사람이 결국 하는 것이란 판단에 불과하다고 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혹은 무엇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늘 누군가를, 무언가를 근사치로 판단하고 추정할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이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수렴하지 못하더라도 끝없이 가야 하는, 곡선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윤리적인, 윤리를 지향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소설을 덮고 나서, 윤재에게 건네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너에게 중요한 것은 아몬드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크느냐 작느냐가 아니야. 이 아몬드는, 닮았다는 아몬드를 먹여서라도 없다면 생기게 해야 할 것이고 작다면 커지게 해야 할 무엇도 아니야. 나도 네가 불편해, 네가 무섭고, 네가 두려워. 하지만 너에게 손을 뻗고 싶어. 너에게 닿지 못하더라도 끝없이 너에게로 걸어가고, 때론 스쳐 지나가고, 다시 되돌아오고 싶어.

너에게는 아몬드가 있고, 그것은 작아. 그리고 그뿐이야.

나는 지금 곡선 위를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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