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 창비시선 415
박신규 지음 / 창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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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봄이다

네가 와서 꽃은 피고
네가 와서 꽃들이 피는지 몰랐다
너는 꽃이다
네가 당겨버린 순간 핏줄에 박히는 탄피들
개나리 터진다 라일락 뿌려진다
몸속 거리마다 총알꽃들
관통한 뒤늦게 벌어지는 통증
아프기 전부터 이미 너는 피어났다

불현듯 꽃은 지겠다 했다
죽을 만큼 아팠다는 것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
찔레 향에 찔린 바람이 첨예하다
봄은 아주 가겠다 했다
죽도록이라는 다짐은 끝끝내
미수에 그치겠다는 자백
거친 가시를 뽑아내듯 돌이키면
네가 아름다워서 더없이 내가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때늦은 동백 울려퍼진 자리
때 이른 오동꽃 깨진다 처형처럼
모가지째 내버려진 그늘
젖어드는 조종(弔鐘) 소리

네가 와서 봄은 오고
네가 와서 봄이 온 줄 모르고
네가 가서 이 봄이 왔다
이 봄에 와서야 꽃들이 지는 것 본다
저리 저리로 물끄러미
너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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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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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마주치고 보니 찬바람도 견딜만했다.
언제나 생각이 훨씬 더 두려운 법이다.
마주치면 오히려 담담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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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아직 그 달이다 창비시선 398
이상국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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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내가 아는 유월은 오월과 칠월 사이에 숨어 지내는데 사람들은 잘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
유월에는 보라색 칡꽃이 손톱만 하게 피고 은어들도 강물에 집을 짓는다.
허공은 하늘로 가득해서 더 올라가 구름은 치자꽃보다 희다.
물소리가 종일 심심해서 제 이름을 부르며 산을 내려오고 세상이 새 둥지인 양 오목하고 조용하니까 나는 또 빈집처럼 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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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시선 374
안현미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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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

가을엔 시시한 게 좋아 시시한 하루 시시한 모임 시시한영화 다시 새로 시시한 하늘까지

가을엔 다시 시시한 게 좋아 알고도 모르게 영 모르지는않게 조금씩 조금씩 슬프달 것도 없이 시시각각 바뀌어가는 거의 아름다운 시시한 생각 생각들 가을엔 아무래도 시시할수록 좋아 그녀가 사랑했던 월요일들과 손톱만큼 지혜로워지는 이마들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아지는 추분과 환타 빛깔로 빛나는 숲 그 숲속에 가마솥 뚜껑처럼 누워 있는 조상들의 무덤과 성묘를 마치고 방금 막 집으로 돌아가버린 여자애처럼 세로쓰기를 좋아하고 안드로메다 페가수스 카시오페이아 같은 가을 별들을 사랑했으나 자꾸 희미해지는 당신,

가을엔 아무래도 시시해지는 게 좋아 알고도 모르게 영모르지는 않게 자꾸자꾸 슬퍼지려는 마음이 다시 시시해져버리게 빨리 늙어버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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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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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일에 아랑곳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정의로운 사람들은 매사에 걱정이 많아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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