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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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응당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태어났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라는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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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은 같은 기차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시작되었다.
혹은 어린 시절 운동회날 달리기에서 둘 다 꼴등으로 들어왔다는 이유로, 첫눈을 함께 봤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학대받은 기억이 똑같이 있다는 이유로 혹은 친구들에게 따돌림 당했다는 이유로, 같은 밴드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상대의 낡은 점퍼나 코트를 유심히 보게됐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추워 보였다는 혹은 더워 보였다는 이유로, 식당에서 땀 흘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먹었다는 이유로, 돌아서서 지하철역까지 느릿느릿 걸었다는 이유로

사랑이 시작하는 과정은 우연하고 유형의 한계가 없고 불가해했는데, 사라지는 과정에서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알리바이가 가려 지는 것이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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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듯 너를 본다 J.H Classic 2
나태주 지음 / 지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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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슬퍼할 일을 마땅히 슬퍼하고
괴로워할 일을 마땅히 괴로워하는 사람

남의 앞에 섰을 때 교만하지 않고
남의 뒤에 섰을 때 비굴하지 않은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미워할 것을 마땅히 미워하고
사랑할 것을 마땅히 사랑하는
그저 보통의 사람

오늘의 약속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발을멈췄다든지
매미 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 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나간 밤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 잘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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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당신 - 출간 25주년 기념, 특별한정판
도종환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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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딱 네 상황이라며 보여줬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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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소리

삼백예순 날을 착하게 살고 싶었어요
손 닿는 곳 풀뿌리마다 살을 나누어주며
거울처럼 맑은 하늘빛 안고
나도 강물로 흐르고 싶었어요
그러나 지금 내 몸은 천둥소리
어두운 구름 위를 가로지르며 홀로 깊어가는 천둥소리

다시는 죄 없이만 살아갈 수 있다면
고요히 저무는 이 세상 그림자를 안고
나도 푸른 나무로 살아가고 싶었어요
그러나 지금 내 몸은 천둥소리
다독일 수 없는 울울한 마음으로
온 하늘 두드리며 가는 소리

내 몸은 왜 일찍이
이 땅의 작고 든든한 들풀 위에 내리는
이슬일 수 없었을까요

기어코 이 세상 썩고 더러운 것들의 목덜미 움켜잡고
세차게 세차게 여울로 궁글러 가야 할
장대처럼 쏟아져버려야 할
빗줄기가 되어야 할까요

내 몸은 지금 천둥소리
검푸른 하늘빛으로 땅에 내리는 노여움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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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비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75
이민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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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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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옆집 아이의 태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 애 아빠의 정치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
왜 그들은 내게 입막음을 안 하나

하루아침에 미용실 여자가 미인이 된 까닭을
편의점 남자가 시인이 된 까닭을
그들이 손잡고 구청에 간 까닭을
석 달 후 남자 혼자 구청에 간 까닭을 나는 알고있는데

여자의 머리색이 남자의 정치색과 어울려
신발 속에 감춰진 짝짝이 양말처럼 아무도 모르게
호들갑을 피우는 오후

선박처럼 무거운 귀를 잠시 멈추고 잠이 오는 의자에 앉아
문맹인 나는 머리색을 바꾸고
색맹인 애인은 이별의 편지를 바꾸고

내 귀를 타고 밀입국한 사람들은
어떻게 빠져나온 것일까 반대편 귀를 향하여
얼굴을 뒤집고

지하철 남자의 의족이 지상의 물결 위로 떠오를 때
인어공주가 되는 이야기
아름다운 두 다리의 침묵에 대하여

진위 논란으로 시끄러운 세상에 대하여
칼의 입맞춤 대신 물거품이 되어 바다에 녹아버린
성전환자의 슬픈 동화 속에서
목소리를 가로챈 마녀의 기술처럼

목사의 안수기도에 섞이는 어떤 성분들
이를테면, 앞 못 보는 어둠의 눈을 번쩍 후려치는
어떤 선언들

늙은 소녀들은 아직 사랑이 넘치고
구걸하는 남자들은 눈물이 넘쳐서
기울지도 침몰하지도 않는
어떤 세계에서

흩어진 나의 비밀들은 어느 귀를 타고 흘러가는가
내가 같은 남자와 백번째 헤어진 날에 대해

당신은 지금 내 비밀 하나를 보관 중이다
혀처럼 얇게 저며진 물결 하나가 귓속으로 들어 갔다
의도하지 않아도

언젠가 귀를 기울이는 쪽에서
당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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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우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8
샤를 보들레르 지음, 윤영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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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과 산문, 두 가지로 나뉘었던 19세기에 보들레르는 이 대립구도를 무너뜨린다. 이후 시인들은 산문시의 고유성을 주장하지만, 기존 산문시가 가졌던 성질 때문에 많은 논쟁이 있었다.
보들레르는 서문에서 산문시의 특질에 관하여 ˝율동과 압운이 없지만 음악적이며 영혼의 서정적 억양과 환상의 파도와 의식의 도약에 적합한 유연성과 융통성을 겸비한 시적 산문의 기적˝이라고 진술하였다.
산문시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서 비평적 담론의 장을 확대했고, 근대 시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파리의 우울을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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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라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쨌든 취하라.

그리고 때때로 궁궐의 계단 위에서, 도랑가의 초록색 풀 위에서, 혹은 당신 방의 음울한 고독 가운데서 당신이 깨어나게 되고, 취기가 감소되거나 사라져버리거든, 물어보아라.
바람이든, 물결이든, 별이든, 새든, 시계든, 지나가는 모든 것, 슬퍼하는 모든 것, 달려가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게 지금 몇 시인가를.
그러면 바람도, 별도, 새도, 시계도 당신에게 대답할 것이다.

"이제 취할 시간이다!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취하라!
술이든, 시이든, 덕이든 무엇이든, 당신 마음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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