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 순간 우리가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인생은 신비롭다 그런 탓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몇 번이나 다른 삶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무한한 삶.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一生, 즉 하나다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간다고 해도 결국 나는 나였다. 그게 바로 내가 가진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남자가 여자의 목소리를 좋아한다고, 연필 같아서 그렇다고 했을 때 여자는 강아지풀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여자의 목소리가 깊은 밤 종이 위에서 사각거리는 연필소리 같다는 말을 남자는 하지 않았다 남자의 유일한 염려는, 여자의 목소리가 그보다 먼저 지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2017년 만큼은 이 시와 절친이었던
장마가 지났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여름 내내 가방에 넣고 다니던 작은 우산을 집에 두고 나왔다. 시내 우체국에 갔다가 다시 집 근처에서 몇 개의 일을 더 보고 돌아오는 길, 보기 좋게 비를 만났다. 이런 사소한 불운쯤은 이제 내 생활의 일부라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을 타기에는 애매한 거리라 그냥 걷기로 했다. 빗줄기는 생각보다 드세졌다. 아니 세상이 끝날 것처럼 내렸다. 처음에는 비를 조금이라도 덜 맞아볼까 비닐 소재의 가방을 머리에 이어보기도 하고 길가를 두리번거리 며 어디 쓸 것이 없나 찾아보았다. 하지만 금세 내 몸은 더 젖을 것도 없이 흠뻑 젖었고 나는 비를 피할 생각을 그만두고 그냥 걷기로 했다. 고민할 필요가 없을 만큼 비를 맞은 것이 차라리 후련했다. 그즈음 나에게는 온통 마음을 쓰며 고민해도 잘 풀리지않던 일이 하나 있었다. 일이 변모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면과 가장 아쉬운 장면 사이에서 한없이 어지러웠다. 그러다 나는 가장 좋은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가장 아쉬울 장면만을 떠올리기로 했다. 한참을 그러다보니 그것이 꼭 아쉬운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빗길을 걸으며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도 잘 접어두었다. 어차피 우산으로 막을 수 있는 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는 더 쏟아지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