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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파괴자
로빈 스턴 지음, 신준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5월
평점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어디선가 본 영화 제목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이 단어가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조작과 통제를 뜻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더 놀라웠던 건—그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저 역시 어릴 적부터,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가족 안에서 크고 작은 가스라이팅을 겪은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땐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아요. “너는 왜 항상 문제야?”, “그건 다 네가 예민해서 그래” 같은 말들. 그 말들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내가 잘못한 걸까?’ 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됩니다. 『친밀한 파괴자』를 읽으면서 그 시절의 감정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이 책은 예일대학교 심리치료사 로빈 스턴 박사가 30년 넘게 상담을 해오며 정리한 ‘가스라이팅’의 원인과 양상,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흥미로운 건, 저자가 바로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을 처음 학문적으로 정립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덕분에 이 책은 그 어떤 자료보다 깊이 있고 체계적입니다.

가스라이팅은 흔히 연인 관계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저자는 가족, 친구, 직장 등 우리가 맺는 거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더 자주, 더 깊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나를 가장 잘 안다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상처를 입을 때, 그 혼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잖아요.
책은 가스라이팅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점점 피해자의 자존감과 현실 감각을 무너뜨리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설명을 읽다 보면 ‘이건 내 이야기 같은데?’ 싶은 순간이 반복됩니다. 가해자의 유형도 단순히 폭력적인 사람만이 아닌, 선량해 보이거나 친절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상대를 조종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저에겐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감정적인 희생을 정당화하지 말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좋은 사람’, ‘착한 가족 구성원’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눌러왔던 기억이 있는데요, 결국 그런 태도가 나를 더 취약하게 만들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단순히 이론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가스라이팅의 3단계’, ‘그에 맞서기 위한 6단계 실천법’, ‘관계를 정리할지 판단하는 기준’ 등을 차근차근 안내합니다. 읽다 보면 어느새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건강한 관계 속에 있는가?”, “이 관계가 나를 지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친밀한 파괴자』는 내 안의 혼란을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책입니다. 저처럼 과거의 상처가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분들이나, 지금 현재 관계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분들께 꼭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통해 나 자신을 더 지키고, 관계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