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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정치학 -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답하다
존 H. 레데콥 지음, 배덕만 옮김 / 대장간 / 2011년 3월
평점 :
기독교정치학/존 레더콥/배덕만/대장간/고경태 편집위원
2017년은 대한민국은 탄핵된 대통령을 대신할 대통령을 선출하는 중요한 시점이다. 2016년 탄핵정국에서 대한민국은 국가, 헌법, 민주주의 등을 광화문과 전국 광장에서 경험했다. 민주주의란 무엇일까에 대한 꾸준한 질문에 대한 답이 나왔다. 민주주의는 ‘대안’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 목표는 ‘국민 개인의 가치’를 보호하고 신장하는 것이었다(헌법 가치). 3년이 지난 후에야 인양된 ‘세월호’, 미수습된 9명의 유해에 대해서 대한민국 전체가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대한민국 기독교는 사회 격변기에 어떤 모습을 갖고 있었을까? 어떤 모습을 가져야할까? 서양의 꿈은 ‘유토피아’이고, 동양의 꿈은 ‘대동’이다. 플라톤의 ‘아틀란티스’도 부정적인 개념이지만, 동양은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환상적인 모습을 단어의 뜻에서 상상할 수 있다.
레더콥의 <기독교정치학>을 서평하면서 서양과 동양을 비교하는 것은, 레더콥이 캐나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정치와 대한민국의 역사, 사회, 정치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역사와 사회는 시간 흐름이기 때문에 공통점이 없고, 정치는 원리적인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서평자로서 래터콥의 <기독교정치학>을 읽을 때, 이 갭(Gap)을 잘 인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래더콥은 아나뱁티스트(재침례파)이다. 래더콥은 아나뱁티스를 16세기 ‘초기(고전적) 아나뱁티스트(국가와 교리를 분리)’와 ‘아나뱁스트 현실주의(개혁적, 정치에 적극적 참여)’로 구분하며, 자신을 후자로 제시했다. 이러한 원인을 칼빈 사상에 근거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고전적 칼빈주의’는 제네바 시정치에 깊이 관여했는데, ‘오늘날 칼빈주의’는 정치와 분리하려는 것을 지적했다. 그래서 래더콥에게 교회와 정치의 관계에서 결정된 방법은 아닌 유동적인 견해라고 볼 수 있다.
래더콥은 사회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는 것을 추구하는 개혁적 아나뱁티스트로 정치에 대한 제안을 반복해서 제시한다. 레더콥은 정치에서 ‘하나님이 우선한다’, ‘하나님이 모든 세상을 통치한다’ 등의 명제를 제시하면서 ‘기독교 정치’라는 것을 규정하려고 한다. 독자는 래더콥의 주장이 ‘아나뱁티스트’의 주장이라는 것을 잘 인지해야 한다. 또한 아나뱁티스트가 ‘평화주의’를 기초로 한다. 정치참여를 반대와 찬성의 동일한 근원이 ‘평화주의’이다. 평화로운 사회를 반대할 사회구성원이 누가 있겠는가?
래더콥의 <기독교정치학>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인과 정치’에 대한 관계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서야할지를 깊이 생각하는 아나뱁티스트의 한 방편을 볼 수 있다. 아나뱁티스트는 종교개혁 당시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 종교개혁 시대에 배척받고 또 고난 받았고,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다. 분명하게 세상 정치도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방향으로 정치 정략을 펼쳐야 할 것이다. 래더콥은 고전적 아나뱁스트의 정치 이해에서 개혁해서 적극적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성경과 종교개혁파의 주장을 통해서 변화를 주었다. 그리고 종교개혁파는 16세기와 반대로 '정교분리'를 주장하고 있음을 제시했다.
책의 표지에 “악에 저항하고 선을 후원하라”는 명제가 있는데, 성경 명제는 “악에게 지지 말고(원수를 사랑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이다. 기독교 원리와 정치 원리는 부합되지 않는다. 두 가치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는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2017년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고, 지방정부선거, 국회의원 선거 등에 참여해야 한다. 반드시 선거(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기 견해를 언론, SNS에 발표해야 한다. 그 한 방편은 레더콥에게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기독교 문화가 아니며, 대한민국 교회가 아나뱁티스트가 아니기 때문에 독자의 분별이 필요하다.
래더콥은 기독교가 사회 체계로 된 유럽, 그리고 캐나다를 표준으로 정치를 제안한 것이다. 그것을 대한민국에 적용하려면 많은 여과 단계가 필요하다. 래더콥의 전개에서 가장 부합되지 않는 면이 ‘세속 정부’를 ‘기독교적’으로 보려는 자세이다. 고려, 조선의 왕은 한 번도 ‘기독교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고, 대한민국 대통령은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서약하지 않는다.
래더콥의 <기독교정치학>은 ‘아나뱁티스트의 정치 행동 강령’을 이해하는데 매우 긴요한 책이다. 그리고 전개도 매우 간략하게 정리해서 독자가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했다.
<기독교정치학>의 표지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답하다”라고 제시했지만,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아나뱁티스의 제안”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合理)적일 것이다. 래더콥의 제안은 ‘이상(理想)’으로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완전하지 않고 최종 목표지도 아니다. 정치는 치열하고 야비하고 승자에게만 관대하지만, 이 땅에 살면 절대 피할 수 없는 인간행동양식이다.
‘16세기 고전적 아나뱁스트’ 그리고 ‘19세기 현대 칼빈주의’가 ‘정교분리’를 추구한 이유를 살피는 것도 즐거운 탐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