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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빛과 그늘 - 불멸을 꿈꾼 진시황의 광활한 능원 건설 프로젝트
장점민 지음, 김영수 옮김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1. 진시황릉 발굴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고학적 발굴과정이 매우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2. 진시황릉의 규모에서 진나라의 위용을 볼 수 있으며, 고대 중국을 볼 수 있으며, 중국의 상고사의 진입에 있는 진시황, 분서갱유로 상고사의 모든 문서를 제거한 황제의 릉을 볼 때 상고사에 대한 무한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3. 중국의 발굴의 모습에서 우리나라의 유적들이 일제강점기에서 무작위로 해쳐져 훼손된 것이 생각났습니다. 발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존이라는 것,,,,
1) 진시황릉을 발굴하고자 했던(건릉발굴계획) 1960년대 초 곽말약(郭沫若, 중국사회과학원 원장)의 건의에 최종 결제자인 주은래 총리는 친필로 “우리는 이 일을 제대로 해낼 능력이 없으므로 후손이 완성할 수 있게 남겨두는 것을 좋을 것 같습니다.”라는 견해로 거부했다. 다시 1970년대의 시도에서도 국가문물국 팀장 황경략 선생은 “건릉발굴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중국의 국가문물국은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발굴하는 것보다 보존하는 것이 더 적합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시황릉은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시황릉에 대한 잘못된 견해: (1)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다. 일본의 지원에 대해서 주은래 총리가 거부했다는 설. (2) 수은 독가스 때문이다. (3) 진시황은 향락만 일삼은 군주는 아니다. 독서를 무게로 달아서 읽었고 분량을 채우지 못하면 쉬지 않았다. (4) 항우는 지하 궁실을 불태우지 않았다. [사기]에 없고, 후대의 저작인 [한서]에는 있기 때문이다.
2) 진시황릉의 규모. [사기], ‘이백의 시’에 의하면 참가 인원인 70만 명 이상으로 총 38년이 걸렸지만, 전체 공정을 완료하지 못했다. 피라미드는 10만 명의 인원에, 석재는 100리 떨어진 곳에서 운반했지만, 능원은 호북성, 사천성 등지에서 벌채에서 목재를 운반해야 했고, 정교한 부장품은 엄청나다.
능원의 높이는 사기에 115m(50여장, 장=23Cm)로 되었지만 현재는 50m이다. 2,000년 동안 60m 정도가 낮아진 것이다(155-156).
능원공정의 재료: 흙을 판 장소(어지)가 저수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 석재(가공지 유지를 1970년대 발굴)와 목재를 운반하였다. 흙으로 벽돌을 구웠는데, 벽돌을 굽는 가마는 상당한 기술력(굴뚝이 3개)을 갖고 있어 완벽한 가마로 벽돌을 생산했다.
능원공정의 주관자는 이사와 여불위였다. 직위는 승상으로 황제 버금이었다.
능원공정에 동원된 사람, 1978년까지 70만명은 죄수로 여겨졌지만, 조배호촌의 인골에서 자유인으로 판명되었다. 또한 사기의 “은궁도형자”에 대한 재해석으로 도형이 죄수가 아니라, 은관인 장애인으로서 자유인으로 밝혀졌다. 저자는 진부한 개념을 바꿀 것을 촉구했다.
능원의 배치 능원의 핵심은 거대한 봉분이다. 10Km의 토성의 벽은 훼손되었고 서쪽 일부가 남아 있다. 항우에 의해서 지상 건축이 훼손되었지만 완전 파괴는 되지 않았다. 진시황 능원은 배치에 다른 능원과 다른 독특함이 있다. 봉분의 위치도 중앙이 아닌 내성의 남반부에 있다. 봉분에 풀과 나무를 심어 산처럼 설계했다(계단식 구조).
진시황 능원의 내부구조는 알 수 없지만, [사기]의 근거로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었고, 별자리가 배치하여 우주처럼 설계했다(우주를 모방한 지하궁 설계). 능원에는 아직까지 제사를 관장하는 장소가 발견되지 않았다. 발굴된 능침, 사관은 고조 유방이 그대로 답습할 정도로 탁월한 것이었다.
능원 설계 사상: 봉분은 ‘나무와 풀이 산과 같다’는 설계 사상에 따라 조성하고, 지하궁은 우주를 모방해 설계했다. 능원의 배치는 함양의 모형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산사람처럼 섬기는 매장 관념의 체현을 목표했다. 진시황릉은 능원의 형태와 장례 의식에서 한 나라는 물론 후대 중국 왕조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한고조는 능원을 관리하는 사관을 설립하였다.
3) 발굴된 진시황릉
1. 배장갱(陪葬坑). 다른 릉과 달리 진시황릉에 특별한 금수의 조형물인 배장갱은 황릉이 아닌 1960년대에 최초로 발견된 병마용갱의 일부이다. 1978년에 배장갱이 발굴되면서 고대 문명과 문화에 대해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동마차의 발굴은 고대 수레에 대한 획기적인 자료가 되었다. 그리고 동물갱에서는 생매장된 것으로 보이는 말의 뼈와 금수를 담당하는 기좌용이 발굴되었다. 1998년 개갑갱에서 갑옷이 출토되었다. 갑옷의 복원을 통해서 당대에 상당한 기술력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999년에 백희용갱(百戱俑坑)에서 발굴된 백희용(백가지 재주를 부리는 광대)을 복원하였다. 각기 다른 모습에 근육까지 표현된 섬세한 조형물이었다. 동학갱은 2000년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발굴된 무덤에서 능원의 지하궁에 묻힌 부장품에 대해 더 큰 기대감을 갖게 한다.
제왕의 무덤에는 봉토를 가진 배장묘가 있다. 당태종의 무덤에도 100개 넘는 배장묘가 있다. 배장묘는 갑(甲)의 형태로 공자 고의 무덤이 있다. 진시황 능원에서는 배장묘에는 봉문이 없었다. 그것은 진나라에서는 국왕 외에는 봉분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尊君卑臣). 능원에서 발굴된 유물은 당대의 공예품의 섬세함과 의류, 두발의 모습, 과학 기술의 수준까지 모두 볼 수 있어 고대문물을 연구하기에 귀중한 유물이었다.
4) 진시황릉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