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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황제
셀마 라겔뢰프 지음, 안종현 옮김 / 다반 / 2025년 10월
평점 :
*본 리뷰는 도서 제공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얀은 딸의 탄생을 원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품삯일에 시달리는 그에게, 유일한 위안은 밤의 휴식이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그마저 빼앗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산파가 갓난 아기를 그의 품에 안겨주는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왜 심장이 이렇게도 강하게 고동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날, 가난한 일꾼 얀은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너무 깊었기에, 딸이 떠나자 그는 견딜 수 없었다. 열여덟 살 클라라가 도시로 떠나던 날, 얀의 세상도 함께 무너졌다. 현실을 견딜 수 없을 때, 인간은 어디로 도망칠까. 얀은 망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신을 포르투갈 황제라 믿고, 딸을 여황이라 부르며, 그녀의 귀환을 기다렸다.
"상상 속에서는 원한다면 축제처럼 즐거운 날로 가득 채울 수 있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현실보다는 훨씬 달콤한 법이니까."
이 문장이 가슴을 찌르는 이유는, 얀의 망상이 단순한 광기가 아니라 사랑의 또 다른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는 '딸을 떠나보낸 아버지'가 아니라, '딸이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고 믿는 아버지'로 살아가기로 선택했다. 그것이 그가 찾은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세월이 흘러 클라라는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가 본 아버지는 더 이상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 사이 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가 황제의 노래를 부르며 끝까지 지켜내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클라라가 마주한 건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었다. 아버지가 매 순간 자신을 향해 보냈던 사랑의 무게를, 그녀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 셀마 라겔뢰프의 이 작품은, 딸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어떻게 그의 전부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부모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진짜 황제는 왕관을 쓴 자가 아니라, 누군가를 끝까지 사랑한 자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