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세상이 가둔 천재 페렐만' 이지만 정작 이 글을 다 읽고 나서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가둔 천재 페렐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훌륭한 수학자의 길을 갈 뻔 했던 수학소녀였던 어머니를 둔 페렐만은 그렇게 유전자 상에 새겨진 수학적 재능과 더불어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할 어머니를 두었다. 그 어머니는 아이를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스승을 찾도록 인도하고 그 스승은 페렐만이 스스로 수학 무림의 고수가 될 때까지 안내하고 격려한다.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필즈상을 거부한 페렐만의 정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페렐만이 처한 그리고 자란 러시아 수학계와 그의 스승과 동료, 직장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푸엥카레 추측을 풀기위한 그 과정과 푼 이후에 보이는 페렐만의 기이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가 비중있게 등장한다.

그리하여 이 책을 다 읽을 즈음 우리는 페렐만이라는 한 수학자의 일생을 제법 속속들이 알게 된 듯한 느낌이 든다. 페렐만과 관련된 사람이라면 어디라도 쫒아가서 한 마디라도 듣고자 했던 작가의 노력 덕분이 우리는 유대계 러시아인인 페렐만의 형상을 나름대로의 상상으로 그리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작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 페렐만이 필즈상을 거부하고(그 상이 모든 수학자들의 꿈의 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거의 악몽에 가까운 행동이다.) 밀레니엄상과 그 상금까지 거부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작가가 내세운 것이 바로 페렐만과 아스퍼거 증후군의 관련성을 언급하는 것이다. 수학자와 아스퍼거 증후군의 관련성은 몇몇 책에서도 본 바가 있는데 '수학의 음악'으로 유명한 작가 마르크스 듀 소토이의 '대칭'이라는 책에서도 기이한 수학자들의 성격을 재미삼아 언급한 바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 증후군의 특징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그것과 페렐만의 관련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스퍼거 증후군은 대상과의 관계성에 매우 취약하고 사건을 정리하기는 하지만 중요하고 부수적인 것을 요약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등의 언급은 페렐만의 성격을 이해한 데 큰 도움이 되는 설명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매우 이중적인데 매우 특이하지만 탁월한 천재 페렐만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이면서 페렐만이 그토록 혐오하고 도망치고 싶었던 스토커같은 타인의 시선의 종합체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 책을 읽고 나는 페렐만을 매우 인간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페렐만에게 우호적이었던 지난 동료의 이야기. '흔히 그가 이상하게 행동한다고들 하는데, 그건 그가 관행을 벗어나 정직하게 행동하기 때문이에요. 그런 행동은 모범으로 여겨져야 마땅한데 이 사회에서는 인기가 없어요'라는 말은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 사회가 사회성이라는 미명으로 얼마나 많은 원칙과 도덕을 저버리고 탐욕과 이기심에 무릅을 꿇는가를 생각하면 페렐만의 순수성은 그 자체로도 매우 가치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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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 박물관은 보기 드물게 사랑에만 집중하는 소설이다. 당시 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가 드러나긴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의 배경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실질적인 사랑이나 연애에서는 잡다한 이해 관계와 고민들이 끼어들게 마련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오로지 그녀와 나만 존재한다. 이러한 비현실성을 현실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소설에서 나온 주인공의 부유함과 더이상 섬세할 수 없는 작가의 묘사가 모든 것들을 눈 앞에 있는 듯한 현실로 만들어 주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진짜 꽃이 적절한 상처와 부패를 품고 있듯이 이 작품에서의 사랑도 주인공의 인간적인 이기심과 판단의 착오 그것으로 인한 잠시(?)이거나 영원한 이별을 세련되게 언급하여 독자들이 그 사랑의 현실성을 인정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없어 보인다.

  처음에 사랑을 만났을 때의 이기적인 마음, 모든 것은 잃고 나서 그 존재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진실, 그리고 그것을 잃은 뒤에는 다시 찾기 위한 과정이 지난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찾은 뒤에도 그 전의 사랑과 같을 수 없다는 점, 바로 그 초기의 배신에 대한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로 주인공의 사랑은 스스로 파멸을 맞게 되기도 한다.

  나는 주인공의 진짜 사랑은 처음 둘이 만나 40여일간 열정적으로 섹스를 한 대목이 아니라 이후 그녀를 잃은 뒤에 차근차근 다시 그녀를 되찾는 그 느린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녀 집에서  이루어지는 하루하루의 별다를 것 없는 풍경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광경으로 변하고 있는지 그 사랑의 환타지를 작가는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얻은 사랑과 의심이라는 인간적인 연약함을 이기지 못한 여주인공의 파멸까지 아름다운 장미의 완벽함은 그 상처받음과 시듦까지를 포함한다는  역설적 진리를 처절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헤어짐 이후부터 시작된 진짜 사랑은 그녀의 죽음으로 더욱 견고해 졌고 자신의 죽음으로 완성되었을 것이다. 부유한 집 아들이었던 주인공의 초라한 마지막 그 순간에 자신의 삶은 누구의 삶보다 완벽하였고 아름다웠다는 그의 말에 나는 가슴 깊이 동조하였다. 주체적인 인생은 어떻게 보여지는 가가 아니라  내 스스로 어떻게 채웠는가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작가는 순수 박물관을 실제 만들었다고 한다. 마치 꿈속같은 이 소설의 사랑이 실제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작품 속에서 아름답게 묘사되었던 고향 터키의 삶을 자랑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소설이란 개연성 있는 허구라는 가장 평범한 정의를 증명하고 싶었을까? 어찌되었든 이 소설은  낯선 터키라는 나라를 무척 친근하게 만들었고, 나를 스쳐간 사랑들, 내 곁의 사랑에 대해 무수한 생각들이 돋아나게 했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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