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박물관은 보기 드물게 사랑에만 집중하는 소설이다. 당시 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가 드러나긴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의 배경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실질적인 사랑이나 연애에서는 잡다한 이해 관계와 고민들이 끼어들게 마련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오로지 그녀와 나만 존재한다. 이러한 비현실성을 현실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소설에서 나온 주인공의 부유함과 더이상 섬세할 수 없는 작가의 묘사가 모든 것들을 눈 앞에 있는 듯한 현실로 만들어 주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진짜 꽃이 적절한 상처와 부패를 품고 있듯이 이 작품에서의 사랑도 주인공의 인간적인 이기심과 판단의 착오 그것으로 인한 잠시(?)이거나 영원한 이별을 세련되게 언급하여 독자들이 그 사랑의 현실성을 인정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없어 보인다.
처음에 사랑을 만났을 때의 이기적인 마음, 모든 것은 잃고 나서 그 존재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진실, 그리고 그것을 잃은 뒤에는 다시 찾기 위한 과정이 지난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찾은 뒤에도 그 전의 사랑과 같을 수 없다는 점, 바로 그 초기의 배신에 대한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로 주인공의 사랑은 스스로 파멸을 맞게 되기도 한다.
나는 주인공의 진짜 사랑은 처음 둘이 만나 40여일간 열정적으로 섹스를 한 대목이 아니라 이후 그녀를 잃은 뒤에 차근차근 다시 그녀를 되찾는 그 느린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녀 집에서 이루어지는 하루하루의 별다를 것 없는 풍경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광경으로 변하고 있는지 그 사랑의 환타지를 작가는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얻은 사랑과 의심이라는 인간적인 연약함을 이기지 못한 여주인공의 파멸까지 아름다운 장미의 완벽함은 그 상처받음과 시듦까지를 포함한다는 역설적 진리를 처절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헤어짐 이후부터 시작된 진짜 사랑은 그녀의 죽음으로 더욱 견고해 졌고 자신의 죽음으로 완성되었을 것이다. 부유한 집 아들이었던 주인공의 초라한 마지막 그 순간에 자신의 삶은 누구의 삶보다 완벽하였고 아름다웠다는 그의 말에 나는 가슴 깊이 동조하였다. 주체적인 인생은 어떻게 보여지는 가가 아니라 내 스스로 어떻게 채웠는가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작가는 순수 박물관을 실제 만들었다고 한다. 마치 꿈속같은 이 소설의 사랑이 실제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작품 속에서 아름답게 묘사되었던 고향 터키의 삶을 자랑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소설이란 개연성 있는 허구라는 가장 평범한 정의를 증명하고 싶었을까? 어찌되었든 이 소설은 낯선 터키라는 나라를 무척 친근하게 만들었고, 나를 스쳐간 사랑들, 내 곁의 사랑에 대해 무수한 생각들이 돋아나게 했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