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평점 :
역사는 구조된 자들의 증언이다.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 라거의 역사는 거의 전적으로 나처럼 바닥까지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거나, 자신의 관찰 능력이 고통과 몰이해로 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p.17)
가라앉은 자들과 구조된 자들을 가르는 역사의 법칙은 없다.
"오늘날 그 누구도 자신의 영혼이 굴복하거나 부서지기 전까지 어떤 시련에, 또 얼마나 오랫동안 견뎌낼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비축해둔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자신은 모른다. 클지도 모르고 작을지도 모른다. 또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오로지 극단적 시련만이 그것을 가늠케 하는 것이다."(p.68)
그러나 견딜 수 없었던 극단적인 시련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가라앉은 자들은 어떤 고통과 몰이해 속에서 익사하였는지 증언할 수 없다.
"반복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무슬림들", 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p.98)"
진짜 증인들은 가라앉았다. 구조된 자들은 증언하지만 그들의 말은 '이해'라는 장벽에 또 한번 부딪힌다. 그런데 여기서 구조된 자들이 가라앉은 자들을 증언할 수 없다고, 증언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들의 증언만으로는 진실을 건져낼 수 없으며, 증언을 실어나르는 말이 사태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고 지레 단념하고 포기하는 자들은 증언하는 자인가, 그것을 듣는 자인가.
"부족하거나 결핍된 의사소통에 대하여 모두가 같은 정도로 괴로워한 것은 아니었다. 괴로워하지 않는 것, 말의 소멸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결정적 무관심의 도래를 알리는 불길한 징후였다."(p.121)
단연코 듣는자들의 고통의 부담이 덜할 것이다. 증언의 수고로움보다 듣기의 수고로움이 단연코 덜할 진대, 그 수고로움조차도 괴로워하길 마다하는 가운데, 구조된 자들도 다시 가라앉는다.
"인간에 대한 폭력이 행해지는 곳에서는 언어에 대한 폭력도 행해진다는 고찰은 분명해 보인다."(p.116)
"언어에 대한 폭력"이라는 것이 어른들이 틈나면 호들갑스럽게 한탄하는 십대들의 약어 따위가 아니다.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어른들이 어떠한 반성적 사고 없이 되내이는 '아름다운 말'들이 훨씬 심각한 폭력의 징후이자 정신적 나태함의 증거일 수 있다.
"오늘날 정상적인 세상, 곧 우리가 때때로 '문명화 된' 또는 '자유로운'이라는 수식어로 관례적이고 대조적으로 표현하는 세상에서는 총체적인 언어장벽과 충돌하는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목숨을 걸고 반드시 소통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경우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 내가 보기에 이러한 (소통불가능성 이라는) 한탄은 정신적 나태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나태함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p.104)
우리는 각자 "아름다운 말"들을 쏟아내느라, 서로의 증언은 듣지 못한채 외로이 침몰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불관용과 권력에 대한 욕망, 경제적 이유,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광신, 인종적 마찰 등이 발생시키는 폭력이 난무하는 조류속에서 미래에 면역성이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는 나라는 소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벼리고 있어야 하며 예언자들과 마법사들, 또한 타당한 이유들의 밑받침이 없는 "아름다운 말들"을 말하고 쓰는 사람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p.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