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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평점 :
"세속적 가치에서 얼마나 뭘 이뤄냈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인생에 시대가 얼마나 들어와 있는가도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시대를 정직하게 호흡하고, 시대의 아픔에 함께 하는 삶,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 가치있는 삶이 아닐까" (신영복)
허은실 작가님의 트위터에서 발견한 문장은 마침 책장을 덮었던 페스트의 이야기에 오버랩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면 페스트를 읽었기 때문에 저 문장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까. "희망은 타인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싹튼다"(p.374)는 역자 해설은 다시금 고 신영복 선생님의 책들에서 읽었던 말씀들을 떠올리게 했다.
개인들이 '우리'로 변모하는 과정에 희망이 있는 것이라면, 그 때 '우리'는 단순히 개인들이 함께 모여 있는 집합이나 그러한 순간을 의미함은 아닐 것이다. 개인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 단지 모여있을 뿐인 개인들이 '동시대인'으로 거듭나는 순간은 어떤 의지를 보일 때다. 어떤 의지인가. 세상에 만연해 있는 페스트, 그리고 이미 자기안에 자리잡고 있는 페스트를 보지 못하는 개인의 '맹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다. 의지를 갖는 건 피곤하다. 하지만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며, "혼자서만 행복한 것"은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다.
"병균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 외의 것들,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건강, 청렴결백함, 순결함 등은 의지의 소산이에요.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될 의지 말이에요. 정직한 사람, 거의 아무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가능한 한 방심하지 않는 사람을 뜻해요. 절대 방심하지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한 법이죠! 그래요, 리외. 페스트 한자가 되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은 더욱 피곤한 일이에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피곤해 보이는 거예요. 오늘날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거든요."(p.295)
인간을 "이미 주어져 있는 자질의 총제가 아니라 '맹목'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의 산물"(p.373)로 보는 카뮈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초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려는 맹목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있다. 타인의 고통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자신이 감염되어 있는 페스트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자신을 극복하려는 어떤 의지는 보기 드문 선의일지라도 악이다.
" 어떤 행동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다보면 결국은 간접적으로나마 악에 강력한 찬사를 바치게 된다고 서술자는 믿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훌륭한 행동들이 그토록 대단한 이유는 단지 보기 드물기 때문이며, 악의와 무관심이 인간 행동의 더 흔한 동인이라는 것을 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서술자가 공감할 수 없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의 악은 거의 다 무지에서 나오며, 양식이 없다면 선의도 악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인간은 악하지 않고 오히려 선한 존재지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많이 알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데, 그것을 미덕이나 악덕이라고 부른다.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스스로 허용하는 무지의 악덕이다."(p.158)
무지와 맹목은 기본값이다. 우리는 시시포스처럼 끊임없이 이 무지와 맹목을 거부해야 한다. 무엇이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우리가 탐해서는 안될 인간 이상의 것인지를 알 때까지 말이다.
"인간을 초월해 자기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지향했던 사람들은 결국 아무 대답도 얻지 못했다. 타루는 자신이 말하던 그 어려운 평화에 도달한 듯했지만, 죽음 속에서,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순간에 가서야 겨우 평화를 발견했다. 반면 리외의 눈에 띈 다른 사람들, 즉 집의 문턱에서 기울어가는 햇빛을 받으며 온 힘을 다해 서로를 껴안은 채 황홀하게 마주보고 있는 사람들이 바라던 것을 얻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속한 것만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랑과 코타르가 사는 거리로 접어들면서 리외는 적어도 가끔은 인간만으로, 보잘것없지만 엄청난 인간의 사랑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기쁨의 보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p.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