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수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개의 존재자이기 위해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것이다. 실재의 한가운데에 있어 분단되고, 찢어져 있음. 좀더 단적으로 말하자면 의식을 갖는 것, 자유라는 것이다."(레비나스)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가 에로스론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이 어쩌면 이 한 마디에 이미 다 나와 있을거라 했지만, 이 한 마디에 다 나와있는 에로스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저자가 레비나스에 느꼈던 '시급히 어떻게 하고 싶어지는' 종류의 난해함을 이 책에 대해서도 느낄 수밖에 없었기에, 시급히 리뷰를 적기 시작한다.

 

찢어져 있음으로서의 인간.  마치 슬래셔 무비를 연상케 하는 이 표현을 이 책에 등장하는 다른 표현에 의지하여 이해한 바는 이렇다.

 

"인간주의는 그것이 충분히 인간적이지 않다는 이유 말고 다른 이유에 의해서는 고발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레비나스)

 

인간이 충분히 인간적인지를 물을 때, 레비나스가 인간을 보는 방식은 (실은 모든 대상과 사상을 보는 방식은) 이렇다. "'A'라는 것 안에는 '실현된 현세적 A'와 '실현되어야 할 잠세적 A'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p.64) 인간의 이러한 존재방식 때문에 인간은 언제나 더욱 인간적일 수 있는 계기를 품고 있다. 우치다 타츠루가 다른 맥락에서 꺼낸 말이지만, 인간은 찢어져 있음으로 하여 '성숙'할 수 있다.

 

"'성숙'이라는 것은 지성적인 것이든, 감성적인 것이든, 자신이 지금 수중에 지닌 '잣대'로는 잴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자신의 '미숙함'과 함께 기동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운동성입니다."(우치다 타츠루, p.292)

 

자신의 지금 잣대로 잴 수 없는 대상과의 만남이라는 사건 속에서, '애무'로서의 '책읽기'와 '사랑'은 벌어진다. 성숙은 그 결과를 판단하는 잣대가 아니며, 그런 지향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어떤 양태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레비나스적으로 다시 말하면 인간이 '성숙'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이라는 운동이 일어날 때에야 인간은 인간으로 자리매김 한다.

 

"텍스트를 읽어들이는 자가, 그 사람 이외의 누구에 의해서도 행해지지 않았던 그런 독특한 읽기를 통해 책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듯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 이전에는 행해진 일이 없고, 앞으로도 되풀이될 수 없는 오직 한번의 '사랑하는'행위를 통해, 완전히 원천적이고 독특한 '사랑받는 사람'의 면모를 접하고, 일회적 '사랑'의 순간을 살게 된다. 그 지향적 관계를 유지시키는 것은 ……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사랑'을 그래도 여전히 '만류=간청'하는 일일 것이다."(우치다 타츠루,p.239)

 

"애무의 본질은 아무것도 파악하지 않는 데 있다. 끊임없이 지금의 형태로부터 어떤 미래를 향해-결코 도달하지 않을 미래를 향해-떠나가는 것, 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은 듯이 달아나버리는 것을 만류하고자하는 데 있다. 애무는 희구한다. 애무는 더듬는다. 그것은 폭력의 지향성이 아니라, 탐구, 즉 볼 수 없는 것을 지향하는 발걸음인 것이다."(레비나스)

 

그러므로 '사랑받는 대상'은 '사랑하는 감정'이라는 지향적 정서 안에만 존립하는 것이며, 책의 본질은 '그것이 포섭하는 이상으로 포섭한다고 하는 특권'안에 있다. 마지막으로 "'타자'는 '타자성'인 속성을 미리 구비한 자존자로서 이미 거기 있는 것이 아니고, '타인 자'로서의 '향유'되는 것에 대한 절대적 저항을 만나, 내가 '향유'를 망설인 끝에 '타인 자'는 '타자'가 되는 것이다."   

 

모르는 것에 대한 능동적 앎이 아닌,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수동적으로 내맡겨질수밖에 없는 사건. '지혜에 대한 사랑'이 아닌 '사랑에 대한 지혜'. 수수께끼는 더 어려워지고 난해함은 더욱 깊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속적 가치에서 얼마나 뭘 이뤄냈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인생에 시대가 얼마나 들어와 있는가도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시대를 정직하게 호흡하고, 시대의 아픔에 함께 하는 삶,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 가치있는 삶이 아닐까" (신영복)

 

허은실 작가님의 트위터에서 발견한 문장은 마침 책장을 덮었던 페스트의 이야기에 오버랩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면 페스트를 읽었기 때문에 저 문장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까. "희망은 타인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싹튼다"(p.374)는 역자 해설은 다시금 고 신영복 선생님의 책들에서 읽었던 말씀들을 떠올리게 했다.

 

개인들이 '우리'로 변모하는 과정에 희망이 있는 것이라면, 그 때 '우리'는 단순히 개인들이 함께 모여 있는 집합이나 그러한 순간을 의미함은 아닐 것이다. 개인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 단지 모여있을 뿐인 개인들이 '동시대인'으로 거듭나는 순간은 어떤 의지를 보일 때다. 어떤 의지인가. 세상에 만연해 있는 페스트, 그리고 이미 자기안에 자리잡고 있는 페스트를 보지 못하는 개인의 '맹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다. 의지를 갖는 건 피곤하다. 하지만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며, "혼자서만 행복한 것"은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다.

 

"병균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 외의 것들,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건강, 청렴결백함, 순결함 등은 의지의 소산이에요.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될 의지 말이에요. 정직한 사람, 거의 아무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가능한 한 방심하지 않는 사람을 뜻해요. 절대 방심하지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한 법이죠! 그래요, 리외. 페스트 한자가 되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은 더욱 피곤한 일이에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피곤해 보이는 거예요. 오늘날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거든요."(p.295)

 

인간을 "이미 주어져 있는 자질의 총제가 아니라 '맹목'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의 산물"(p.373)로 보는 카뮈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초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려는 맹목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있다. 타인의 고통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자신이 감염되어 있는 페스트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자신을 극복하려는 어떤 의지는 보기 드문 선의일지라도 악이다.

 

" 어떤 행동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다보면 결국은 간접적으로나마 악에 강력한 찬사를 바치게 된다고 서술자는 믿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훌륭한 행동들이 그토록 대단한 이유는 단지 보기 드물기 때문이며, 악의와 무관심이 인간 행동의 더 흔한 동인이라는 것을 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서술자가 공감할 수 없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의 악은 거의 다 무지에서 나오며, 양식이 없다면 선의도 악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인간은 악하지 않고 오히려 선한 존재지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많이 알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데, 그것을 미덕이나 악덕이라고 부른다.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스스로 허용하는 무지의 악덕이다."(p.158)

 

무지와 맹목은 기본값이다. 우리는 시시포스처럼 끊임없이 이 무지와 맹목을 거부해야 한다. 무엇이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우리가 탐해서는 안될 인간 이상의 것인지를 알 때까지 말이다.

 

"인간을 초월해 자기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지향했던 사람들은 결국 아무 대답도 얻지 못했다. 타루는 자신이 말하던 그 어려운 평화에 도달한 듯했지만, 죽음 속에서,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순간에 가서야 겨우 평화를 발견했다. 반면 리외의 눈에 띈 다른 사람들, 즉 집의 문턱에서 기울어가는 햇빛을 받으며 온 힘을 다해 서로를 껴안은 채 황홀하게 마주보고 있는 사람들이 바라던 것을 얻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속한 것만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랑과 코타르가 사는 거리로 접어들면서 리외는 적어도 가끔은 인간만으로, 보잘것없지만 엄청난 인간의 사랑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기쁨의 보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p.3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는 구조된 자들의 증언이다.

 

"여러 해가 지난 오늘날, 라거의 역사는 거의 전적으로 나처럼 바닥까지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거나, 자신의 관찰 능력이 고통과 몰이해로 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p.17)

 

가라앉은 자들과 구조된 자들을 가르는 역사의 법칙은 없다.

 

"오늘날 그 누구도 자신의 영혼이 굴복하거나 부서지기 전까지 어떤 시련에, 또 얼마나 오랫동안 견뎌낼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비축해둔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자신은 모른다. 클지도 모르고 작을지도 모른다. 또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오로지 극단적 시련만이 그것을 가늠케 하는 것이다."(p.68)

 

그러나 견딜 수 없었던 극단적인 시련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가라앉은 자들은 어떤 고통과 몰이해 속에서 익사하였는지 증언할 수 없다.

 

"반복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무슬림들", 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p.98)"


 

진짜 증인들은 가라앉았다. 구조된 자들은 증언하지만 그들의 말은 '이해'라는 장벽에 또 한번 부딪힌다. 그런데 여기서 구조된 자들이 가라앉은 자들을 증언할 수 없다고, 증언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들의 증언만으로는 진실을 건져낼 수 없으며, 증언을 실어나르는 말이 사태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고 지레 단념하고 포기하는 자들은 증언하는 자인가, 그것을 듣는 자인가.

 

"부족하거나 결핍된 의사소통에 대하여 모두가 같은 정도로 괴로워한 것은 아니었다. 괴로워하지 않는 것, 말의 소멸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결정적 무관심의 도래를 알리는 불길한 징후였다."(p.121)

 

단연코 듣는자들의 고통의 부담이 덜할 것이다. 증언의 수고로움보다 듣기의 수고로움이 단연코 덜할 진대, 그 수고로움조차도 괴로워하길 마다하는 가운데, 구조된 자들도 다시 가라앉는다.

 

"인간에 대한 폭력이 행해지는 곳에서는 언어에 대한 폭력도 행해진다는 고찰은 분명해 보인다."(p.116)

 

"언어에 대한 폭력"이라는 것이 어른들이 틈나면 호들갑스럽게 한탄하는 십대들의 약어 따위가 아니다.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 어른들이 어떠한 반성적 사고 없이 되내이는 '아름다운 말'들이 훨씬 심각한 폭력의 징후이자 정신적 나태함의 증거일 수 있다.

 

"오늘날 정상적인 세상, 곧 우리가 때때로 '문명화 된' 또는 '자유로운'이라는 수식어로 관례적이고 대조적으로 표현하는 세상에서는 총체적인 언어장벽과 충돌하는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목숨을 걸고 반드시 소통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경우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 내가 보기에 이러한 (소통불가능성 이라는) 한탄은 정신적 나태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나태함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p.104)

 

우리는 각자 "아름다운 말"들을 쏟아내느라, 서로의 증언은 듣지 못한채 외로이 침몰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불관용과 권력에 대한 욕망, 경제적 이유,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광신, 인종적 마찰 등이 발생시키는 폭력이 난무하는 조류속에서 미래에 면역성이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는 나라는 소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벼리고 있어야 하며 예언자들과 마법사들, 또한 타당한 이유들의 밑받침이 없는 "아름다운 말들"을 말하고 쓰는 사람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p.2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행위는 선행하는 모든 것에서 자연스럽게 비롯되어야 한다. 모든 예술의 속성이 그러하다. 만약 일을 정확히 계획하고 수행했다면, 바로 다음날 범죄자가 자수한다 해도 아무도 그를 믿지 않을 것이다. 예술이 지닌 힘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예술적 허구가 삶의 진실보다 더 사실적이다."(p.138~139)

 

실제의 삶보다 더 사실적인 허구를 만들어내려고 했던 게르만의 작품은 사소한 디테일 하나에 완전히 망가졌다! 고 게르만은 생각하겠지만 그의 작품은 근본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비롯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주도면밀했던 계획에 조악한 실수가 있었음을 발견한 후에야 실패를 인정했지만, 그가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실은 그의 분신 펠릭스가 그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소하고 단순한 디테일 하나가 전체적인 구상을 망칠 수 있을 정도로 예술은 철두철미해야 하는 것인데, 게르만은 자신의 예술이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허나 그가 자신의 미적 재능의 결핍에 절망할 때조차 그는 제대로 절망하지 못했다. 그가 창조하는 세계가 그의 의지대로, 그가 제시한 법칙때로 조화를 구현하지 못했을때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만드는 자'로서의 재능이 아니라, 세계의 디테일을 '인식하는 자'로서의 재능이다. 게르만이 얼마나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지에 관한 나보코프의 묘사는 신랄할 정도다.

 

"또 일본 사람은 모두 닮았다고 말하겠지요. 이보쇼, 신사 양반, 화가가 보는 건 바로 차이라는 것을 당신은 잊고 있소. 문외한 눈에는 다 닮아 보이지요. 바로 리다가 영화관에서 이렇게 소리를 질러대는 경우 아니겠소? '봐, 어쩜 저렇게 우리 가정부 카탸를 닮았다지?!'"

"아르달리온칙, 성질 돋우지마." 리다가 말했다.

"하지만 때로는 바로 닮음이 중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하셔야지." 내가 말을 계속했다.

"촛대 살 때나 그렇지요." 아르달리온이 말했다.

 

다른것을 닮았다고 착각하는 자는 촛대의 닮음 정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서 자신의 분신을 보고야 만다. 분신은 어떤 존재인가. 게르만에게 분신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날 기회" 였다. "그는 분신 살해를 통해 자신의 닳아빠진 속물적 외양, 저속한 부분을 말살"하고, 보다 의미 있고 충만한, 자유로운 새 삶을 꿈꿨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내 존재의 독재자가 되지 못한다면, 그 어떤 논리도, 그 어떤 황홀경도 어처구니없이 어리석은 내 처지에 대한 생각을 거두게 하지 못한다. 신의 노예라는 처지 말이다. 이건 심지어 노예의 처지도 아니고, 호기심 많은 아이가 쓸데없이 그었다 끄는 성냥개비의 처지다. 아이의 장난감이 느끼는 공포."(p.116)

 

새로운 삶은 분신을 통해서만 꿈꿀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유는 창조적 예술의 세계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게르만을 조롱하는 아르달리온처럼 쉽게 자신할 수 없는 까닭은, 게르만의 절망이 애초에 어디서 비롯되었던 것일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까닭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84
조지 오웰 지음, 이기한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p.50)

 

당의 슬로건이다. 당이 현재를 지배함으로써 과거를 지배하고, 그리하여 미래까지도 지배할 수 있는 수단은 언어다.

 

"자네가 여전히 애매한 표현을 구사하고 쓸데없이 단어들 간의 미묘한 의미 차이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구어를 선호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p.70)

 

애매하고 미묘한 말에 불과할지라도 그 애매하고 미묘한 말조차 마음대로 내뱉을 수 없다면, 생각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때때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들이 당의 방침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더라도 불만 이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종합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해 사소한 불만거리에 연연하기 때문이다. 총체적인 병폐는 그들의 관심 밖이없다."(p.94)

 

"그들의 말과 행동은 무조건적인 사사로운 충의에 지배되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관계들이었다. 따라서 전적으로 부질없는 제스처, 포옹,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등이 자체적으로 가치를 부여받았다." (p.210)

 

총체적인 병폐를 인식하지 못한채 사사로운 충의에 지배받는 사람들은 당의 노예일 수밖에 없다. 사고의 수단인 언어를 되찾지 못한다면 정녕 지배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들고일어나지 않을 것이지만, 그들이 들고일어난 후에야 인식의 전환이 가능한 것이다."(p.93)

 

들고 일어나는 일이야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한 큰 일도 작은 저항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면, 저항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에서 터져 나올 것이다.

 

"당에 의해 자행된 것들 중 가장 끔찍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충동과 감정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믿도록 설득한 것이다."(p.209)

 

그러니 비록 사소한 불만거리처럼 보일지라도,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가능성을 부러 낮춰 볼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인간성을 간직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이러한 행동들이 어떤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것으로 이미 그들을 이긴 겁니다."(p.2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