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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행위는 선행하는 모든 것에서 자연스럽게 비롯되어야 한다. 모든 예술의 속성이 그러하다. 만약 일을 정확히 계획하고 수행했다면, 바로 다음날 범죄자가 자수한다 해도 아무도 그를 믿지 않을 것이다. 예술이 지닌 힘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예술적 허구가 삶의 진실보다 더 사실적이다."(p.138~139)
실제의 삶보다 더 사실적인 허구를 만들어내려고 했던 게르만의 작품은 사소한 디테일 하나에 완전히 망가졌다! 고 게르만은 생각하겠지만 그의 작품은 근본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비롯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주도면밀했던 계획에 조악한 실수가 있었음을 발견한 후에야 실패를 인정했지만, 그가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실은 그의 분신 펠릭스가 그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소하고 단순한 디테일 하나가 전체적인 구상을 망칠 수 있을 정도로 예술은 철두철미해야 하는 것인데, 게르만은 자신의 예술이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허나 그가 자신의 미적 재능의 결핍에 절망할 때조차 그는 제대로 절망하지 못했다. 그가 창조하는 세계가 그의 의지대로, 그가 제시한 법칙때로 조화를 구현하지 못했을때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만드는 자'로서의 재능이 아니라, 세계의 디테일을 '인식하는 자'로서의 재능이다. 게르만이 얼마나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지에 관한 나보코프의 묘사는 신랄할 정도다.
"또 일본 사람은 모두 닮았다고 말하겠지요. 이보쇼, 신사 양반, 화가가 보는 건 바로 차이라는 것을 당신은 잊고 있소. 문외한 눈에는 다 닮아 보이지요. 바로 리다가 영화관에서 이렇게 소리를 질러대는 경우 아니겠소? '봐, 어쩜 저렇게 우리 가정부 카탸를 닮았다지?!'"
"아르달리온칙, 성질 돋우지마." 리다가 말했다.
"하지만 때로는 바로 닮음이 중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하셔야지." 내가 말을 계속했다.
"촛대 살 때나 그렇지요." 아르달리온이 말했다.
다른것을 닮았다고 착각하는 자는 촛대의 닮음 정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서 자신의 분신을 보고야 만다. 분신은 어떤 존재인가. 게르만에게 분신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날 기회" 였다. "그는 분신 살해를 통해 자신의 닳아빠진 속물적 외양, 저속한 부분을 말살"하고, 보다 의미 있고 충만한, 자유로운 새 삶을 꿈꿨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내 존재의 독재자가 되지 못한다면, 그 어떤 논리도, 그 어떤 황홀경도 어처구니없이 어리석은 내 처지에 대한 생각을 거두게 하지 못한다. 신의 노예라는 처지 말이다. 이건 심지어 노예의 처지도 아니고, 호기심 많은 아이가 쓸데없이 그었다 끄는 성냥개비의 처지다. 아이의 장난감이 느끼는 공포."(p.116)
새로운 삶은 분신을 통해서만 꿈꿀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유는 창조적 예술의 세계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게르만을 조롱하는 아르달리온처럼 쉽게 자신할 수 없는 까닭은, 게르만의 절망이 애초에 어디서 비롯되었던 것일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