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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아니면 언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17년 4월
평점 :
<주기율표>에 이어 두 번째 읽은 레비. <주기율표>에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부속 화학공장에 만난 독일인과 유대인 화학자의 인연을 그린 바 있다. 프리모 레비 자신이 이태리 토리노 대학 화학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재원이라 주기율표에 나온 원소 기호를 따 재미있게 한 인생을 그린 매력적인 소설로 기억한다.
그러나 레비는 소설가. 비록 이이가 45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존해 나와 먹고 살기 위해 1977년까지 니스 공장에서 일을 했다하지만, 소설가인 만큼 비슷한 주제로 여러 작품을 우려먹는 건 바람직하지 않을 터. <주기율표>와 아주 다르게, 유대인이 2차 세계대전이란 격랑에서 생존하며, 심지어 항독 전쟁에 참여하는 모습을 그렸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1945년 여름에, 밀라노 난민 지원사무소에서 자원봉사를 한 친구로부터 들은 유격부대원들의 경험한 처참한 고통과, 그럼에도 존엄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당당한 모습을 소설작품으로 만들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소설을 탈고한 것이 1982년. 레비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만다. 그의 마지막 소설에서 유일하게 실존했던 인물은 오직 한 명. 작중 중간 부분에 등장하는 엑스트라 역할의 유대인 여자 비행기 조종사 ‘폴리나.’
2차 세계대전 당시와 종전 직후 유대인에 대한 대량학살은 두 개의 정부 아래에서 일어난다. 전쟁 직전과 전쟁 중에는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에서. 전쟁직후에는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 연방에서. 모든 계급과 차별을 철폐시킨 공산주의 정권인 소비에트 연방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것은 나도 사실 근래에 알게 됐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원수들, 사랑 이야기>를 통해. 레비의 <지금이 아니면 언제?>를 보면, 20세기에 들어와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증오심이 비등점으로 치닫기 시작해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마자 동부 유럽에서는 나치의 손에 의하여, 나치의 지시에 의하여, 그리고 상당부분 유럽인들의 마음에 딱 맞는 정복 나치군의 방침에 스스로 동조하여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일군 점령지에 소련군 패잔병 속에도 유대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 터. 이들은 동부유럽 각지에서 모인 패잔병들과 함께 파르티잔 활동을 하거나, 유대인들로만 구성된 유격부대로 활동을 한다. 간혹 비유대인으로 구성된 유격부대원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스탈린에 의해 유대인 수용소에 강제 입소, 굶주림과 학살의 위협 속에 절망적인 삶을 이어가게 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유격부대는 러시아 사람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유대인들로 구성한 파르티잔으로, 러시아 사람 한 명을 포함한 모두가 시오니즘에 입각해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국가를 세워 나무를 심고 농사를 짓는 농부의 꿈을 지니고 있다고 설정되어 있다. 러시아, 폴란드, 독일 등에 살고 있던 유대인을 아쉬케나지라고 일컬으며 이디시어를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었는데(아이작 바셰비스 싱어는 작품을 심지어 작품을 이디시어로 쓰기까지 했다), 작품의 주인공들, ‘게달레’를 대장으로 하는 유격대원, 이른바 게달리스트 거의 모두가 이 아쉬케나지들이다. 이들 가운데 늙고 몸이 좋지 않아 전투에 참가할 수 없는 노인 한 명만 고향인 동쪽 시베리아로 귀향을 선택하고, (도중에 전사하는 몇 명을 제외하고)나머지 전부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1943년 7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 유대인에게 가장 이물감을 느끼지 않는 나라라고 하는 이태리의 밀라노에 도달한다. 그러니까 이 긴 여정과 그 동안 벌어진 사건들을 중심으로 520쪽이 넘는 픽션을 만들었다.
문학을 비롯한 거의 모든 예술에서 ‘아이’의 탄생은 밝은 미래를 은유한다. 이 책도 한 유대 어린 아이가 탄생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면서, 비단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국한하지 않고 전 유대인의 열린 미래를 의미하며 대단원을 맞는다. 레비는 이 작품을 통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유대인의 학살, 그것을 당하는 많고 많은 사람들의 무저항적 수동성을 반박하려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 30여 년 전 난민 지원센터에서 자원 봉사한 경험이 있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비록 소련군 패잔병의 신분이지만 유대인에 의한 항독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았을까.
내게 첫 레비였던 <주기율표>는 발상의 신선함과, 독일인과 유대인 화학자, 두 수재를 등장시켜 독특한 재미를 주었었다. 그러나 이번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읽는 내내 조금 언짢은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수백만이 학살당한 유대인의 슬픈 과거는 충분히 위로받아야 하며, 학살의 가해자는 쉼 없이 반성해야 한다는데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유대인에 의하여 저질러진 팔레스타인에서의 원주민 핍박에는 조금도 동의할 수 없어서인가? 유대인이 과거에 그리 학살당하고, 레비의 주장대로 조직을 이루어 독일군대에 저항해 전투를 벌였으며,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해 시오니즘 국가 건설에 참여했으면, 자신들의 아픔을 반면교사로 현지인들과 더 나은 관계를, 적어도 무력에 의한 다툼으로 귀결하지는 않는 협상을 할 수는 없었을까? 20세기 중반부터 유대인, 이스라엘 국민들은 홀로코스트의 불행한 역사를, 자신들이 주변 민족을 학살할 수 있는 면허증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난 이런 생각을 하느라고 책을 읽는 이틀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화학자 출신의 소설가. 이이가 독자들이 생각하는 만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살아생전 이스라엘에 의하여 저질러진 팔레스타인에서의 원주민 탄압에 대한 작품, 아니면 적어도 반대 입장의 표명 같은 것도 하나 이상 있어야 할 텐데, 과연 있을까? 너무 야박한 발언일 수 있으나 한 마디 하자면, 아우슈비츠 생환이 어쩌면 이이한테 눈부신 훈장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