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홉스의 Leviathan을 꾸역꾸역 영어로 읽었다. 18세기인가 옛된 영어라서 읽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 학기에 읽지 않는다는 걸 알고 절반 정도까지만 읽고 접어버리긴 했는데, 재미없어 꾸덕꾸덕 읽어도 가끔 많은 부분에서 홉스의 현대 서양에 대한 영향력을 읽어낼 때마다 매우매우 인상적이었다.

은근 집요하게 사소한 것부터, 인간과 감각부터 정치론까지 파고 들어가는 그의 이론을 죽 읽다보면, 사실 그의 생각 자체가 흥미로운 점이 아주 많지는 않아도, 기본적으로 홉스란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이해가 된다는 최장점이 있다. 

홉스가 인간의 능력에 대해 딱히 긍정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고, 인간이 많은 한계를 가졌기 떄문에, 인간 본성에 대해 두려움이 많았다는 점이 나는 근본적으로 그를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이성, 국가, 종교가 그에게 왜 필요한 존재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특히 국가라는 지점에서, 왜 commonwealth가 필요하고, 인간 개별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존재를 필요로 하는지까지 나아간달까? 즉, 그에게 인간은 너무나 불안정하고 너무나 주관적인 존재라서 객관타당한 존재를 상정하여 공동체 운영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인간에 대한 불신은, 결국 인간 개별이 자신의 권리를 자연스럽게 포기하여 그것을 국가에게 양도하는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낳게 한다. 이것만이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홉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치를 떨고, 인간은 미개하고 가망성이 없어서 힘으로만 다스려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사람들. 

사람들의 이중성이 너무나 재밌는 이유는, 사람들은 개돼지라는 말을 들으면 발끈하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인간 계급을 나누며 개돼지와 다를 바 없는 자신들의 행태를 곧 인정하는 경우도 꽤나 많다는 것이다. 즉, 상황에 따라 이중적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열받지 않거나 자신이 이득을 보는 상황이면 개돼지라는 말을 쉽게 한다. 


이 자학적이고, 겁많은 인간 본성에 대한 두려움은 홉스에게 있어 우리가 우리 개인의 자유를 일정 정도 양도하고, 사리분별을 파악할 객관성의 권위를 제3의 기관에게 넘겨버리게 하는 근거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나는, 저번에 내가 읽었던 Purcell (2016) 논문에 동의하면서, 홉스 식의 사회계약론이 우리로 하여금 자율성을 상실하게 하고 엘리트 통치의 정당성과 국가 권력의 강대함을 승인하는 기능으로 전락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데 홉스가 기반으로 하는 이 근거가 사실 얼마나 빈약하고 비객관적인가? 

우선 홉스 말을 따르면, 인간 지식과 애초에 그 지식을 습득하는 인간 신체기관과 인식기관이 그렇게나 오류에 취약한데, 그 기관들로 축적된 인간 지식, 즉 과학으로 하여금 객관성을 습득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또한 가상적 사회, 모두가 모두의 적이 되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가정은 사실 그의 어림짐작 뿐 아닌가? 공포에 가득찬 두려움 뿐 아닌가? 그의 두려움이 기정사실이라 쳐도, 우리에게 국가라는 제3 기구에게 우리의 권리를 양도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이 옳을까? 그저 국가권력의 정당화 뿐 아닐까?


아무튼, leviathan에 대한 질문은 많이 생성시켰는데, 내가 오늘 글에서 마키아벨리 군주론과 연결 시킬 지점은 바로 그의 논의, 즉 공과 사의 개념이 분리되어 도출된다는 주장이다.

27번 글에서 그는 앞에서 말한 일련의 과정, 즉 불안전한 개인의 한계로 인해 개인들이 권리를 몰빵해서 발생하는 공의 개념이 생겨 공적 범죄와 사적 범죄가 생긴다고 표현하다. Public crime / Private crime 

내가 이 논의를 받아들이면 결국 공과 사의 개념은 우리 인간이 인간 개별의 상호작용 과정과는 별도로 운영되는 정치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었다. 별로 이 책에 대해서 딱히 많은 할 말이 있지는 않다. 단지 내가 앞에서 말한 공과 사의 구분 개념과 관련하여, 흥미로웠던 지점은, 이 책은 우리가 소위 도덕을 정치 영역에서 분리시켜야 한다고 설파했다는 점이다. 그는 좋은 정치인이란, 보통 그 시대 인간들이 생각했던 악덕에 가까운 행동들은 만약 원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이득을 주는 효과적인 것들이라면 고려해야 할 뿐 아니라 시행하는 것도 주저해선 안 된다고 본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그래서 어떻게 보이냐에 치중한다. 그에게는 자신이 점령하는 성/도시국가에서의 주민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에게서의 사랑은 한편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어렵다. 그리고 사랑받는 것에 실패하면 적어도 두려움의 대상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주장이다. 


나는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주장이 가능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공과 사가 구분되었다는 그 개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중인격이 가능한 이유는 자신의 한쪽 얼굴을 다른 한쪽 면에서 가릴 수 있기 때문에 가식과 위선이 통하는 것이는 것이다. 가식과 위선이라는 말이 너무 가치중립적이지 못해 불편하다면 타고난 정치적 감각을 발휘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바꾸어보자.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그게 왜 가능하느냐. 상황이 확확 바뀌는 공적 상황과 사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전제가 있다는 것이다.


3.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나는 이 논의가 과연 현대 정치에 부합한가? 고민을 해보았다. 별로 아닌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최근 미투운동에서부터 심지어는 트럼프까지, 모든 종류의 정치와 공동체 이슈를 보자.

아니면 한국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에 핏발 서는 모습을 관찰해보자.

예를 들어 군대를 안 간 연예인 (공)은 엄청나게 비난 받고 심지어는 연예계 활동(사)에도 지장을 받는다.

왜 그런 걸까?

나는 사람들이 멍청해서라고 보지 않는다.

그게 아니다.

공과 사가 대체 얼마나 갈라지는 것인가? 

이 질문을 생각해보면 사실은 그것만큼 애매모호한 게 없기 때문이다. 

이것만큼 인위적인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나 홉스 시절, 왕정 시절에는 사실 이게 어느 정도 가능했다. 아니 심지어는 내 보기에 90년대까지 한국에서도 이게 가능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이슈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도껏 해봤자 카더라 통신 어디 뉴스 정도였고, 소위 인터넷의 파급력이라는 게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그러한 시대가 도래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냐, 우리가 "일군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 만큼" 격변하는 상황 속에서 당신이 취할 모든 얼굴들이 다 까발려지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저 위쪽에서 행한 일이 아래쪽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제는 오른쪽에서 한 일을 왼쪽 사람들이 알게 된 세상이 온 것이다.

기술이 하도 발달해서, 모든 것을 연결시키고 다 빠르게 접목시켜놓으니, 우리에 관한 정보들과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융통되고 알려지고 심지어는 가공까지 되는 시기로 온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현대 정치의 신도덕론은, 다름 아닌 푸코가 말했던 자기윤리/자기배려의 시대로의 귀환이다.

나의 현재 생각은, 우리가 고대그리스 시절로 귀환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것도 매우 역설적인 도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연결되고 있고, 그만큼 자율적일 수 있으나, 그만큼 자율을 포기하는 구조 속에 살고 있기도 하다. 

취해야 하는 가면이 많아지고,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하면 엄격할수록 자율성은 저 멀리로 날아간다. 

정치구조는 그 구조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 구분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기득권을 누리던 엘리트들의 입지는 사라지니까.

인터넷 어딘가의 누군가가 저 상아탑의 전문가보다 더한 전문가일 수 있게 된 이 시대가 온 것이고, 이제 소위 정치인/고위층들은 우아한 고급 귀족으로서 항상 근엄하고 인자한 얼굴을 취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뒤에서 갖은 욕과 갑질을 하는 모습들이 우리들 카메라로 찍혀 세상에 나뒹굴 테니까.


이런 시대에 취해야 하는 소위 "정치인"의 모습, 혹은 정치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취해야 할 참된 정치의 신도덕론적 방향은, 말한 것처럼 자기윤리, 자기배려, 우정의 자기자율의 힘으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살피고, 그 맥락에 따라 움직이며, 파레지아(용감한 말하기)를 실천하는 언행일치하는 자의 얼굴이다. 이때의 그 얼굴은 모든 면에서 분리된 "현대인"의 얼굴이 아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자유로운 "나"의 얼굴인 것이다.


4.


언급된 참고문헌


Mark Purcell  (2016) "For Democracy: Planning and Publics without the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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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 R. Tolkien 지음 / HarperCollins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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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반지의 제왕"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반지의 제왕" 이야기를 하면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마 오늘의 이 글만으로도 끝나지 않으리라.


1. 이게 어떻게 꿈일 수가 있죠?


2001년 겨울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를 본 10살짜리 꼬맹이는, 영화가 3부작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프로도와 샘의 뒷모습부터 모르도르의 어두컴컴한 배경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충격을 받았다.


2002년 2편이 영화 상영되기까지 그 1년 간, 내 기억에 따르면, 나는 "반지의 제왕" 책들을 전부 다 읽었다. 그 책의 출판사가 황금가지였나, 1권부터 6권까지 출판된 책을 사서 다 읽었다. "호빗"도 읽었다. "실마릴리온"도 읽었다. 그렇게 중간계의 역사를 다 꿴 꼬맹이는 2편 영화를 10번? 20번? 영화관에서 보았다.


3편이 나오기 전까지는 1편과 2편의 확장판까지 구입해서 메이킹필름까지 확인했다. 


개인적으로 영화 3부작 중 최고는 2편, 두 개의 탑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순간 있지 않은가. 사과 첫 맛은 너무 신데 맨 마지막 맛은 너무 물려서 먹기 가장 좋은 건 중간쯤인 것. 순전히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십대 때 나는 많이 연약했다. 처음 만나는 세상의 추위와 나 자신의 다름을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할지 모르는, 전형적인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달까? 그럴 때 나는 판타지 세계로 깊이 침잠했다. 일본만화 나루토, 소설 반지의 제왕을 읽으며 그들의 세계관과 역사 속에 빠져들었고, 상상 속에서는 그러한 역사 속의 영웅이었다.


한 번은 너무 심하게 이 현실을 탈피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고, "반지의 제왕"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심하게 해서, 꽤나 우울해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초연함, 강함 그리고 자연 속에서의 영성을 부러워 했던 것 같다.


2.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다시 접하면서 새롭게 "반지의 제왕"을 마주하기 시작하다


물론 어렸을 때도 "반지의 제왕"을 영어로 읽으려 한 적이 있었다. 호빗을 아주 재미나게 읽진 않았기 때문에, 가장 좋아하는 반지의 제왕을 읽으면서 영어공부를 해야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너무 어려웠다. 사실 그 나이 때는 반지의 제왕을 한국어로 읽는 것도 마냥 쉽지는 않았다 (맙소사, 지금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4학년에서 6학년 때 일이다!) . 


다만 읽으면서 이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구나.. 감탄을 할 뿐이었다. 매우 고풍스럽고 우아했다. 비교하는 건 적절하지 않겠지만, 동시대에 유명했던 환상소설인 해리 포터가 현대물과 같은 느낌이라면, 반지의 제왕은 정말 아름답지만 섬세하고, 신화 같을 때도 있지만 동시에 인물들이 우리와 같이 느껴질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한국어로 읽을 때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최근, 나는 갑자기 "반지의 제왕"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시간 여유가 있는 연말/연초에는 3부작 영화를 한 번에 몰아보는 것이 백미지! 그리고 선택된 것이 고전 중의 고전이었던 것이다. 수첩을 보니 4일 날 그렇게 몰아본 이후부터, 여운이 가시지 않아 소설 반지의 제왕을 집게 되었다. 물론 이번에는, 영어로 말이다.


그런데 영어로 읽으니, 왜인걸, 아주 많은 생각이 머릿 속에 엉키게 되었다.


3. 본질, 선과 악, 그리고 나는 간달프의 말을 드디어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우선, 다시 읽기 시작하는데, 한국어를 읽는 것만큼 속도가 빠르진 않지만, 소리내어서 읽다보니, 이 글이 얼마나 수려하고 아름답고 운문체인지 절감하고, 또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는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간달프의 말을 드디어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I wish it need not have happened in my time,’ said Frodo. ‘So do I,’ said Gandalf, ‘and so do all who live to see such times. But that is not for them to decide. All we have to decide is what to do with the time that is given us.

; The Lord of the Rings: The Fellowship of the Ring, The Two Towers, The Return of the King (p. 51). HarperCollins Publishers. Kindle Edition.

 [번역(내 맘대로 엄청 의역)]

프로도가 말했다. "우리 시대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필요가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나도 그렇다네." 간달프가 말했다. 

"이러한 시대를 겪어야 하는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러나 선택권은 없네. 주어진 시간 안에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의 문제만 빼고." 


‘No, and I don’t want to,’ said Frodo. ‘I can’t understand you. Do you mean to say that you, and the Elves, have let him live on after all those horrible deeds? Now at any rate he is as bad as an Orc, and just an enemy. He deserves death.’ ‘Deserves it! I daresay he does. Many that live deserve death. And some that die deserve life. Can you give it to them? Then do not be too eager to deal out death in judgement. For even the very wise cannot see all ends.

; The Lord of the Rings: The Fellowship of the Ring, The Two Towers, The Return of the King (p. 59). HarperCollins Publishers. Kindle Edition. 

 [번역(내 맘대로 엄청 의역)]

"아니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프로도가 말했다. "간달프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골룸이 그런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는데도 엘프들과 간달프 당신이 골룸을 살려줬다는 거에요? 하여간 지금 골룸은 오크만큼이나 사악한, 그저 적에 불과할 뿐이에요. 죽어도 싸다고요."

"죽어도 싸다고!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 살아있는 많은 이들이 죽어 마땅하고, 죽은 자들이 살아 마땅한 경우가 있으니. 자네가 그들에게 삶과 죽음을 나눠줄 수 있기라도 한가?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성급히 누가 죽어야 할지 정해 놓지 말게. 매우 현명한 자들도 끝을 이야기할 수 없는 법이니까."


옛날부터도 생각한 거지만, 간달프는 우리 마음의 희망을 대변하는 존재다. 그리고 희망은 간달프가 가진 지혜, 더 큰 것을 조망할 줄 아는 제3의 눈으로부터 온다. 

왜냐하면 희망을 없애는 것은 두려움과 좌절인데, 두려움과 좌절은 이성을 상실하고 눈이 멀어 한치 앞을 보지 못할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 


위의 대화 중 첫번째에서 보여지듯이, 진정한 현자는 한탄하며 현실을 피하지 않는 법이다. 현실을 돌파할 뿐이다.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인간과 세상은 잡탕이다. 선과 악이 회색지대로 섞여 있어 그것들을 구분해 내는 방법이란 애초에 없다. 선이 얼굴을 돌리면 악이 나오고, 악이 얼굴을 돌리면 선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밖에 없다. 바로 "나의 선택에 따른 행동" 뿐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는 아는 것이 많지 않다. 소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방치하면 언제나 우리는 자기도 잘 알지 못하는 선택을 하고, 옳지 못한 선택에서 자신으로 말미암은 행동의 결과도 책임질 준비가 되지 못하여, 결국 추락하고 타락한다. 


그래서 진정한 현자는 항상 몸을 낮춘다. 언제나 잘못되고 그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니까. 그리고 진정한 선인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항상 수련하고, 공부하고, 연마할 것을 주문한다. 학식에 갇혀서 몸이 묶여 지식의 죄수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읽는 한 글자를 몸에 체득하여 그것을 언제든 "증명"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달프가 말했듯이, 그 시험의 순간이 언제인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 다만 그 때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위해 매사 살아나갈 수 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면 시험의 순간은 언제나 항상, 매분매초이다. 


또한 두번째 대화에서 간달프는 끝을 성급하게 재지 말라고 주문한다. 이는 간달프가 왜 호빗들에게 절대반지를 맡겼는지, 왜 자신은 절대반지를 맡지 않으려고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실마릴리온 역사를 살펴보면, 그리고 고금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원래 자기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쉽게 타락한다. 가장 높이 나는 자들이 가장 높은 데서 추락하는 이치다. 그리하여 동양에서도 어려서 출세한 경우, 부모가 영향력 있는 경우, 재능이 뛰어난 경우를 경계한다. 왜냐하면 너무 빨리 자기 그릇에 충분치 못한 것을 받아들일 때 균형을 쉽게 잃기 때문이다. 


아라고른의 경우를 생각해도 그렇다. 그는 두네다인 족장이고 고귀한 혈통이지만 방랑자로서의 온갖 위험한 역경을 거쳤고, 익명에 숨어 오롯한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수많은 과정을 거쳤다. 그가 그렇기에 인간 중에 최고의 인간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온갖 영웅들에게 시련이 필요한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성숙할 많은 기회들 속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장 좋은 배움은 자기 자신이 뛰어나다고 혹은 열등하다고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좋은 배움은 이 세상이 얼마나 넓고 얼마나 아름답고 배울 것이 많은지, 그리하여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작고 작은 존재인지, 그러나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만의 무엇인가로 자라나서 다시 그 넓고 아름다운 세계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그러한 성질의 배움이다.


힘이 크고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절대반지를 맡지 않는 것이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균형점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현명한 만큼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평화 속에서 소박한 것들만 바라는 것이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관습이 된 호빗들이야말로 절대반지의 악에서 강하게 버텨낼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물론 골룸이라는 개별차가 있긴 하니 일반화 시킬 수는 없지만, 소박하고 아름다운 백엔드의 삶을 사랑한 프로도와, 정원사로서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것을 소망한 샘을 생각하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가끔은 이러한 소시민이 왜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진짜로 강한지, 약한지, 어리석은지, 현명한지는 매사 그 순간마다 결정되며, 그 끝은 결국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타락은 대단한 것이 아니며, 당장 내일 아침 오른쪽 길로 갈지 왼쪽 길로 갈지 정도의 문제다. 

그러니 우리도 타인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비난은 쉽지만, 그 사람의 입장에 선다면, 당신도 똑같이 행동할 확률이 높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부단히 노력하고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결국 우리는 타인을 쉽게 비난할 근거를 상실할 것이다. 노력과 증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그 안에 자리한 선과 악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함을 직면할 터이니. 


4. 그가 노래한 순간, 세상이 만들어졌노라- 환상과 현실의 경계 속에서


"반지의 제왕"을 소설로도 읽고, 영화로도 읽으며 생각한 것은, 이야기의 창작이 바로 나의 논문/연구와도 그렇게 분리되어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피터 잭슨은 어떻게 이렇게 원작을 토대로 영화화를 잘 할 수 있었을까? 물론 잭슨과 그 제작진의 부단한 노력, 성실함, 재능이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톨킨에게 집중하고 싶다.


단도직입적으로, 잭슨이 영화화를 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톨킨의 상세하고 방대하고 성실한 작업물이었다고 본다. 그에게 이 작업은 정말 일루바타르가 자기 자신이라고 이야기할만큼 대단한 것인데, 보통 사람들이 꿈결에서나 혹은 지나가는 상상으로 그칠 것을 그가 글로 하나하나씩 기록해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를 대단한 능력이라 이름 붙일지 모르나, 나는 이 능력은 다름이 아니라 성실함과 꾸준함이라고 밖에 보지 않는다. 그는 중간계의 언어들을 만들어냈고, 호빗과 엘프와 난쟁이들을 상세하게 "관찰"했다. 그리고 그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공부했던 옛 신화와 전승들에서 발견한 것들을 조합하고, 편집해냈다. 


요즘과 같은 시대에 글을 쓰는 것을 하나의 특기로 두고자 하는 나로서, 그의 이러한 서술과 이야기 창작 능력이 영상매체와 같은 현대기술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고민을 해봤다. 나는 그가 정말 순수한 "창조자"로서 백지들에 수많은 이미지들을 촘촘히 던져놓았다고 말하고 싶다. 언어로 그는 수많은 정보들과 지침들을 제공했고, 그러한 기록된 섬세함을 바탕으로 잭슨과 같은 많은 할리우드 기술자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바탕으로 이미지를 구체화 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로 이러한 톨킨의 성취가 바로 나의 성취가 되어야 함을 나는 직감한 것이다. 나는 다만 정치를 예술로 구현하고 싶을 뿐이다. 혹자는 정치와 환상문학이 무슨 관계냐고 묻겠지만,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우리의 현실은 누군가가 이미 누군가가 꿈꿔놓은 상(이미지image)였다고 말이다. 소설가들과 철학자, 모든 말을 업으로 삼은 자들이 얼기설기 그려놓고 계획한 것들을, 기술자들이 살을 덮어놓아 숨쉬게 만들었다. 


나는 그리하여 내가 배우고, 내가 보았던 상들을 조합하여 현실의 정치현실에서 기술적으로 구현하고, 작동 가능한 이야기와 담론들을 생성해야 한다. 


어쩌면 직접민주주의와 아나키즘은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 대체 어느 시대에 그런 게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한테 그런 일이 가능하긴 한 거죠?


그렇다면 내가 노래하리라. 나한테 주어진 시간들 속에서 말을 계속 내뱉고 주문을 외우고 편집하고 조건들을 설치하고 일궈내고 영향을 주며 그려진 청사진이 언젠가 뚜렷해지면, 그 때 아주 소수의 사람만 꾸었던 환상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 보는 현실이 되며, 경계선이 사라지리라. 


5. 다시 묻기를, 이게 어떻게 현실일 수가 있죠?


그리하여 나는 요새 행복하다. 내 마음 속에는 감사함이 샘솟고, 즐거움이 자리한다. 물론 어떤 때에는 이 세상의 악함과 내 마음의 악함이 간혹 무섭고 두렵다. 내가 저지른 악업과 잘못들 속에서 언제 내가 무너지고 타락할까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주문을 외운다. 내 언젠가 이 시험에서 통과할지 안 통과할지 모르겠으나 통과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부단히 노력하며 살겠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니 항상 몸을 낮추고 살며,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하고, 모든 욕심과 근심을 버리며,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내 두 발로 서며, 조건이 달라져 모든 것이 쇠한다 하여도 최선을 다해 마주하고 동시에 끝나는 것을 슬퍼해 눈물을 흘릴 지언정 순리에 거스르는 일을 하여 나 스스로를 윤회의 억압에 빠지게 하지 않으리!


여러 상황 속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장 귀여운 생명체와 함께 셋이서 가족을 오순도순 만들어 사는 데 감사하고, 몸 건강히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여건에서, 배우는 즐거움을 누리는 데서 감사한다.


이 감사함을 바탕으로 비양심의 순간에 언제나 가장 정직하게 나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불의를 선택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흑백이 구분되지 않는 순간에 내 안의 기준으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성실할 것이며, 내가 받은 온갖 좋은 것들과 온갖 나쁜 것들을 잊지 않고 좋은 것은 그 이상으로 나누고 더 좋게 만들 수 있도록 발벗고 나설 것이며, 나쁜 것들은 나쁜 것들로 이어지지 않도록 좋은 승화의 방법을 찾아 악영향을 중화시켜 순환의 고리가 끊겨지도록 마찬가지로 발벗고 나설 것이다.


그러니 다시 묻기를, 이게 어떻게 현실일 수가 있는가?


이 거대한 하나의 세계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환상이지만, 우리는 이 환상과 단 한 번도 분리되어 있던 적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랑하고, 아파하고, 죽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믿는다. 이천만번을 다시 태어나 이 세계의 모든 우리가 언젠가 억압의 고리를 끊고 진정 아름다운 선택만을 할 그 날이 도래하리라는 것을. 바로 극락의 때를-

그리하여 나는 믿는다. 내가 죽어도 결국 내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나"는 "인간"이 죽지 않는 이상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I wish it need not have happened in my time,’ said Frodo. ‘So do I,’ said Gandalf, ‘and so do all who live to see such times. But that is not for them to decide. All we have to decide is what to do with the time that is given us.

; The Lord of the Rings: The Fellowship of the Ring, The Two Towers, The Return of the King (p. 51). HarperCollins Publishers. Kindle Edition.


‘No, and I don’t want to,’ said Frodo. ‘I can’t understand you. Do you mean to say that you, and the Elves, have let him live on after all those horrible deeds? Now at any rate he is as bad as an Orc, and just an enemy. He deserves death.’ ‘Deserves it! I daresay he does. Many that live deserve death. And some that die deserve life. Can you give it to them? Then do not be too eager to deal out death in judgement. For even the very wise cannot see all ends.
(p.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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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Write a Thesis (Paperback)
Eco, Umberto / MIT Press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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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나는 세상 유행에 관심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더욱 기사를 잘 보지 않게 되었다.

너무나 많은 소식이 있고, 그 소식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으니, 잘 알지도 못한다.

그러면서 어느새 마음에서 성급하게 시시비비를 가린다.

내가 기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기사에 내가 소비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일을 무조건 낱낱이 겉핡기 식으로 알아야만 하는 것일까? 의심이 들었다.

정치학을 공부한다고 해도, 정치현상 모두를 알아야만 한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나에게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일장일단이 있을 터인데, 아무튼, 내 공부만 하며 사는 나에게도, 이 김영민 교수 글이 화제라는 소식이 닿았다.

궁금해서 칼럼 글을 10개 정도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왜인지 내가 요즘에 읽고 있는 Umberto Eco의 How to Write a Thesis의 내용이 글을 쓰고 공부를 하는 연구자의 자세와 태도, 다른 말로 하면 소임에 관해서 상이할지라도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두 학자의 글에서 읽을 수 있는 학문하는 자의 소임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김영민 교수의 글들 몇 가지는 정말 말 그대로 사람을 자지러지게 웃게 한다. "유학생 선언"에서의 사자탈 에피소드가 그렇다. 

읽으면서 생각했다. 만약 소위 지식인의 업무 중에 좋은 글솜씨로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포함된다면, 이 사람의 글은 확실히 지식인의 그것이다.  

한국에서 지식인들은 근엄과 엄숙함으로 지나치게 방패막을 두르니 그의 글이 더 귀하게 여겨지는 것도 같다. 


그렇지만 그의 글은 읽으며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전반적으로 모든 글들이 웃기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이 저릿해진다. 

마냥 읽으며 웃기만 할 수 없게 사람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소위 요새 말로 "빙썅" 있지 않은가. 

좋은 글에 어울리지 않는 저렴한 말일 수도 있는데, 빙그레 웃으며 욕하는 사람을 뜻한다. 


물론 이 교수가 말 그대로 욕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그가 냉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뜻이다. 

가끔 너무 웃겨서 그게 잘 안 보일 뿐이지.

그런데 읽다 보면 나는 그가 누구를 비판하는지 알 것도 같다.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해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며 나의 양심도 찔리는 걸 보니 말이다. 

그는 이렇게 쓴 바 있다.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 하지 못하고, 제자의 논문조차 읽지 않고 논문 심사를 하는 스승들을 보며,


앞에 놓인 탁자를 당수로 쪼개며, “선생님들, 논문을 읽지도 않고 심사한다고 여기 앉아 계실 수 있는 겁니까!”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목젖을 뽑아 줄넘기를 한 다음에, 창문을 온몸으로 받아 깨면서 밖으로 뛰쳐나와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고는 학교 운동장에서, 벌거벗고, 흙을 주워 먹으며, 트랙을 뱅글뱅글 돌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래, 맞아, 그래야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그런 순간들, 그래야 했을지도 모르는 순간들이 꽤나 많았다. 

정말 위의 글처럼 유리창을 온몸으로 박살내면서 나가야 하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부족했던 것이다.

내 몸이 너무 귀하고, 내 커리어가 참으로 중요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국사회에서 이미 결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 글이 나온 칼럼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도교수에게 불합리한 행정을 따진 대학원생은 얼마 후 대학원을 나가 고아원에서 일한다고 전해진다.

사실이라면, 그 대학원생은 그 사건만 보면 정말 대단한 인재이자 인물이기 때문에 더 귀한 일을 하시려고 고아원에 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학문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여전히 "대학원"이란 학문을 공부할 수 있는 자들에게 사회적으로 가장 좋은 환경이니까. 우리가 전업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 완전히 양해되고 설명되지 않는가. 그리고 학자에게는 이렇다 저렇다 결국 스승이 필요한 점이다. (언젠가 이 점에 관해 대해 글을 쓸 날이 오리라)


그렇지만 대한민국의 대학원이 충분히 그러한 환경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을까?


나부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서 거침없이 석사를 해외로 나가버린 사람이라 무엇을 어떻게 코멘트할 바 없다. 사실 미국에서도 교수가 박사생 노예취급하는 경우가 왕왕 생기니까 꼭 대한민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현재까지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어쩌면 석사를 국내에서 갔더라면 "학벌"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좋은 박사 유학이 더 쉬웠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싫었다. 내게 너무 많은 것이 뻔하게 보였다. 미국에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이 여기서는 "안 그러기가 매우 힘들어지는" 상황이 싫었다. 

한국에서 열등감과 괴로움에 시달리고, 여러 불합리한 행정 속에 고달파하는 교수들의 짜증과 불합리한 카르텔들에 대해, 그들의 인격이 나빠서라고 설명하고 싶진 않다. 

그저 구조와 체계가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그 무기력의 최종점에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권력과 교수라는 이름값의 권위 밖에 없으니, 무엇을 더 가르칠 것이 있을까? 

물론 그들에게 배울 것은 많다. 그렇지만 거기서도 어차피 영어 텍스트를 읽을 거라면 영어 하는 나라에 와서 읽는 게 더 나아 보였다.


그리고 적어도 나는 여러 부분에서 석사 유학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일단 가장 좋은 건, 여기에 좋은 교수들이 있다. 내가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 많다. 이게 정말 크다. 그리고 그 중 하나 나의 멘토격은 인격이 완성되어 있다 (적어도 평판이 그렇다). (그리고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도) 바로 내가 배울 만한 학자로서의 표본이라는 것이다. 언행일치. 연구준수. (물론 더 지켜보아야 하지만) 


또 하나, 지금의 나는 영어책 읽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다. 물론 말하고 듣기가 마음만큼 되지 않는 것이 흠이지만. 또, 홉스 리바이어던의 옛날 영어체를 읽으면서 욕이 저절로 나오긴 하지만, 이 세상에 많은 자료와 정보들에 한층 더 오리지널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학문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즐겁고도 즐거운 일이다. 

금전적 문제도 언젠가 상환할 수 있다는 나름의 자신감과 믿음으로 버티고 있다. 


아무튼, 김영민 교수도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유학을 떠났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글들을 보며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접근이 상당히 감성적 (학문공부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며, 그 과정은 비극적이고 로맨틱하다는 결론) 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게 학문공부는 결국 얻을 수 없는 최종진리에 대한 탐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언제나 우리 주변에 널려져 있는, 모든 것들이기에 내게는 언제나 즐거운 과정이다. 



2.


학문공부의 즐거움을 나는 에코 책에서 느끼고 있다. 


Eco의 책은 기본적으로 제목부터 짐작하다시피 석박사생(박사생)이 어떻게 하면 졸업논문을 잘 쓸 수 있는지에 대한 요령을 매우 세세하게 전수하고 있는, 대가의 친절하고도 실용적인 책이다. 


그는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전략적이고 효율적으로 논문 쓸 것을 주문한다. 이 논문이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고, 전반적인 "글"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소설을 쓰든 무엇을 하든 사실 잘 쓴 글은 매우 고도로 전략적이고 지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에세이들은 부끄러운 수준일 것이다. 거의 즉흥적으로 쓰고 웬만해서는 더 고치지 않기 때문이다. (탈고를 하는 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수많은 자료, 자료, 자료이고, 그 자료를 잘 정리하는 것이다. 에코는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도 매우 세세하게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니,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공부와 연구라는 것은 잘난 개인의 성취가 절대 아니라 그저 남들이 미리 쌓아올린 돌탑에 돌 하나 얻어내는 것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또 웃긴 건 그 디딤돌 아무렇게나 올려놓으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돌값 인정 받으려면 기존에 쌓아져있던 돌탑과 어떠한 식으로도 맞아 떨어져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그 돌탑 와르르 무너질 만큼 강력한 굴러들어온 돌이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식은, 결국 타인들에게 값어치를 인정받지 않으면, 사회의 규칙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아예 불가해하거나 자폐적이면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 숙명이라는 것이다. 자폐와 독창은 한 끗 차이고, 그 돌이 쓸모 없냐 있냐도 한끗 차이다. 


그래서 Eco 글에 나오는 수도원장 Vallet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아름다운 예시다. 대충 이야기를 요약하면 열심히 연구하지만 적절하게 잘 맞는 실마리를 못 차던 Eco는 정말 어쩌다 우연히 한 책을 발견하는데, 평소 같으면 그냥 덮어버리겠지만 책값이 아까워서 읽은 저질 책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정말 아름답게 맞아 떨어진다. 어쩌면 이 즐거움 때문에 학자들이 공부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 모든 관계 없는 것들이 사실 관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적합한 예시랄까?


에코의 울림은 참으로 크다. 우리는 매순간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 배운다. 모든 곳에 가르침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값어치와 배울 것이 있다. 나와 다른 모든 것들이 나와 다른 모든 세상을 설명해주는 열쇠가 된다. 단지 다른 사람들이 시간이 없어서, 열의가 없어서, 재미를 느끼지 못해 못하는 것들을 우리가 전문적으로 하고 있을 뿐.


그러니 내 생각에 공부하는 사람이란, 이 세상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발굴해내는 탐험가이고, 존재하는 것들의 의미를 재평가하는 비평가이고, 아무 의미도 없던 것들을 이어내어 새로 재창조하는 창조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이 사회에 환원이 되는 날, 우리는 이 사회에서 밥값을 하는 지식인이 되기도 한다. 


3.


그래, 이렇게 보면 학자는 어쩌면 정말 김영민 교수의 말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일 수도 있고, 내가 Eco 글 보며 느낀 것처럼 비록 개미처럼 사소하지만 그저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가듯 공부하는 평범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나는 의미있을 것이라 본다. 사랑이야기는 비극이 재미진 법이고, 소시민의 삶은 안정적인 법이니까.

다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하든 자유지만, 내 생각에, 다른 사람을 글로 웃기게 하면서 양심 찌르지도 못하는 글 수준이라든지, 아니면 소박하게나마 사회에 밥값하려고 열심히 지식창조를 하지도 못하는 학자가 된다면 그건 그냥 폐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폐기물도 밥값은 한다. 반면교사가 된다는 점에서. 

아무튼 그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성취하려면 일상에서의 수련이 필요하다. 모든 지나가는 순간들을 돌아보고, 모든 지나갈 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진짜 그래야 그 두 가지 중 뭐라도 하지 않을까?

결국 공부 많이 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고, 딱 그 정도일 뿐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그래도 공부를 하면 행복할 것이다.

김영민 교수 말처럼 내일 아침 월요일이란 무엇인가! 고래고래 창문 열며 소리지를 수도 있고,

Eco처럼 파리에 어느 가판대에서 우연히 발견한, 아무도 읽지 않을 책에서 크나큰 기쁨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은, 

공부하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소한 일상의 행복이니까.



https://news.v.daum.net/v/2017072315040044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727204901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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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몸과 소통하라 - 30년 젊게 사는 비법
최창수 지음 / 바른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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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관이다. 남자는 20대 얼굴이 기초설계고 60대 얼굴이 완성인데 여자는 20대 얼굴이 완성이고 60대는 폐허라고 했나? 몸과의 소통도 전부 쓸모없고 당연한 이야기였다. 나는 저자에게 시대와 소통하라는 충고를 하고 싶다. 돈을 안 썼으면 이런 말의 업도 남기지 않을 텐데 돈을 썼으니 차마 아까워 말을 안 남길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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