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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의 여왕
백영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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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빨강머리 앤』을 만난다. 앤을 만나면서 소녀는 소설의 세계로 빠져든다. 하루에 몇 권씩 소설을 읽어 치우던 소녀는 곧 책방 아주머니를 두손 들게 한다. 소녀는 읽을 이야기가 더는 남아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결심한다. ‘소설가’가 되기로.

이제는 결혼 8년 차 주부가 된 그 소녀를 만나고 왔다. 바로 드라마 ‘스타일’의 원작자 백영옥 작가다. 그때 그 소녀가 지금 이 언니가 맞을까. 질문을 던졌다. “『스타일』을 쓴 이유가 무엇이죠?” “제가 읽고 싶었기 때문이죠” 읽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쓰여 있는 이야기가 없다면 어찌하랴.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수밖에. 백영옥 작가다운 답변이다. 백 작가는 이 『스타일』로 1억원 고료의 제4회 세계문학상을 받으며 일약 인기작가로 발돋움했다.

“좋은 질문을 담고 있어야 좋은 소설 아닐까요?”

소설가 백영옥에게 소설이란 일종의 물음표다. 패션잡지 에디터의 삶을 다룬 『스타일』은 ‘프라다를 사고 싶은 욕망과 기아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싶은 욕망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문이다. “만약 제가 샤넬 백 하나 덜 사서 아프리카 아이 몇 명을 살릴 수 있는지 생각하면 당연히 찔리죠. 하지만 사람이 기부만 하며 살 수는 없잖아요?”

‘아름다운 물건을 취하고자 하는 당장의 욕망이 미래를 어떻게 붕괴시킬 거란 말인가.’(『스타일』)

‘된장녀’ 운운하며 매도해온 이기적 욕망을 전면적으로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두가 조지 소로우처럼 아무것도 소비하지 않고 숲에서 흙만 파먹고 살 순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세상엔 이기적 욕망만 추구하는 완전한 악인도, 이타적 욕망만 추구하는 완전한 성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전 화두를 던지고 싶었어요. 두 욕망의 ‘황금비율’이 무엇인지”

지난 7월에 나온 『다이어트의 여왕』이 던지는 질문은 좀 더 직설적이다. 다이어트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한 ‘연두’는 몸무게의 반을 덜어내고 다이어트 여왕에 등극하지만 동시에 미각을 잃어버린다. 백영옥 작가는 ‘연두’를 통해 우리에게 물어온다. “다이어트로 살을 빼면 행복해질까요?”

온 국민이 다이어트 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다이어트는 이제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다. 그는 다이어트를 ‘이 시대 여자들의 가장 심각한 현대병’으로 진단한다. “지금 다이어트는 뚱뚱한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 하는 다이어트가 아니에요. 마른 사람이 더 마르기 위해 하는 다이어트죠. 이건 굉장히 사회병리학적인 문제예요. 패션업계와 뷰티업계에서 만들어낸 판타지를 현실로 느끼고, 45kg 나가는 사람이 40kg의 김민희와 비교해 자기 몸에 불만을 터뜨려요. 달리 말해 왜곡된 현실인식으로 자기 몸을 ‘타자화’하고 내 몸을 틀린 것으로 받아들이는 비극이 일어나고 있어요”

문제는 다이어트만이 아니다. 온갖 판타지를 주입하는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요구한다. 피부도 깨끗해야 하고, 몸매도 좋아야 하고, 유기농으로 웰빙도 해야 하고… 그가 던지는 두 물음표에는 현대병 환자를 위한 ‘위로’가 담겨 있다.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타일』을 쓰면서 성수대교 붕괴 피해자인 무악여고 학부모들의 인터뷰를 찾아봤어요. 여기서 한국인들의 독특한 특징을 발견했어요. ‘내가 우리 애를 8학군에 옮겨서 내 딸이 죽었다.’ ‘아픈 딸을 억지로 학교에 보낸 내 잘못이다.’ 딸이 죽은 건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라 건설사의 부실시공과 정부의 부실허가가 빚은 시스템의 문제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시스템을 앞장서 고쳐야 할 피해 당사자들이 오히려 시스템의 문제를 내면화․개인화하는 경향이 있어요. 다이어트도 마찬가지에요. 문제는 매체와 산업구조가 빚어낸 비현실적인 기준에 있는데 사람들은 그 문제를 개인화시키고 있어요. 내가 게으르고 자제력이 없어서 살이 찌는 거라고”

그리하여 우리 영혼은 끊임없이 상처받는다. 이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길은 험난하다. 『스타일』처럼 비현실적인 왕자님이 헌신적인 사랑으로 돌봐주지 않는 이상, 『다이어트의 여왕』처럼 미각을 잃었다 되찾을 정도의 지난한 과정이 뒤따른다. “내 안의 악한 면과 선한 면을 동시에 보고, 내가 가진 욕망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응시하는 건 엄청난 고통을 수반해요. 그래서 거짓 치유와 거짓 화해가 너무나 많아요. 『다이어트의 여왕』에서 연두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연애에 실패하고 같은 상처를 받잖아요. 그건 정말 바닥까지 가서 자기 내면을 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거든요. ‘이쯤이면 됐어’라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포기하는 순간 자기 치유는 거짓 화해로 끝날 수 있어요. 다 치유된 듯한 연두가 새로운 상처를 받는 마지막 반전은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어요”

백영옥 작가가 말하는 치유의 핵심은 소통이다. 나와 나 사이의 소통. 나를 온전히 달래줄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다.

‘우리 마음속엔 누구에게나 돌봐주지 않은 어린아이 하나 웅크리고 울고 있다고, 우리는 때때로 상처받은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고, 어깨를 안아주며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고 말해주어야 한다.’(『다이어트의 여왕』)

그러나 혼자서 자신의 모든 상처를 어루만질 수는 없다. 우리는 서로 등을 밀어줄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선 내가 볼 수 없는 뒷모습을 바라봐 줄 타인의 시선이 간절하다.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선 타인의 시선 역시 필요하다는 것, 거울 없이는 자신의 앞모습은 물론이고 뒷모습까지도 우리는 결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깨닫는 중이다.’(『다이어트의 여왕』)

우리는 소통해야 한다. 과거와, 진정한 자기 자신과, 또 세상에 존재하는 각기 다른 다양한 스타일과의 화해를 위해서. 백영옥 작가의 소통에 대한 열정은 우리의 귀감이다. 백 작가는 한 인터넷 서점에 『다이어트의 여왕』을 연재하며 모든 댓글에 일일이 댓글을 달았다. 본문보다 더 긴 댓글을 달면서 시도한 소통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7개월을 긴장 속에서 연재하다 보면 도저히 이 작품을 끝낼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오기도 해요. 그런 고비를 넘기게 해준 건 독자와의 소통이었어요” 이어 그는 말한다. “소통할 수만 있다면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어요. 그것이 소설이든, 시나리오든, 혹은 요리라도”

새로운 방식의 소통을 꿈꾸는 백영옥 작가의 향후 계획은 무엇일까. “다음에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진 모르겠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소설이 될 것 같아요. 아마 장르물이 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스티븐 킹의 열렬한 독자인 백영옥 작가의 본격 미스터리 스릴러물을 기대해도 될까? 지나친 기대는 금물. 어느 날 ‘백 감독’이나 ‘백 쉐프’로 돌아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지도 모르니.  

(대학신문, 2009년 9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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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아담 잭 런던 걸작선 1
잭 런던 지음, 이성은 옮김 / 궁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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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별개의 영역처럼 보이는 ‘문학’과 ‘과학’이라는 정신활동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과학철학자였던 바슐라르는 과학사를 연구하는 동안 상상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문학비평에 천착했다. 지난 6일(금) 번역, 출간된『비포 아담』은 과학적 상상력이 소설로 거듭난 대표적 작품 중 하나다. 저자인 잭 런던은 원시 인류의 생활을 상상하면서 인간성을 통찰하고 인간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유전물질이 생식세포를 통해 전달된다는 이론에서 영감을 얻은 런던은 “자신의 모든 기억을 자손의 대뇌조직에 새겨놓아 그 기억이 여러 세대를 흐를 수 있다”는 상상력을 펼친다. 소설 속 꼬마 미국인은 매일 밤 꿈속에서 ‘나무부족’의 일원인 ‘큰 이빨’이 된다. 대학에서 진화론을 배우면서 꿈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발견한 주인공은 그간의 꿈을 복기해 원시 인류의 삶을 들려준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 부족 중 가장 원시적인 부족의 일원인 ‘큰 이빨’은 의붓아버지 ‘수다쟁이’에게 쫓겨난 뒤 ‘동굴부족’의 서식처에 도착한다. 아내를 죽이는 극악무도한 우두머리인 ‘붉은 눈’에 반기를 들었다가 ‘늘어진 귀’와 함께 탈출한 그는 ‘재빠른 것’을 만나 사랑에 눈을 뜬다. 붉은 눈이 재빠른 것을 뺏으려는 소동이 마무리될 때쯤 활을 쏘고 불을 능숙하게 다루는 ‘불부족’이 서식처를 습격한다. 학살 속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큰 이빨과 재빠른 것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다.

런던은 약육강식의 세계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그의 작품에 담아냈다. 『비포 아담』에서 고등 문명이 상대적으로 약한 문명의 구성원들을 학살하는 모습은 사회진화론을 앞세워 식민지를 확장해나가던 제국주의의 모습과 닮았다. 러일전쟁 종군기자로 1904년에 조선을 방문하기도 한 저자는 불부족에게 당한 고통을 나무부족에게 되갚아주는 동굴부족의 모습을, 당시 일본의 모습에서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40세라는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19편의 장편소설 등 수백 편의 작품을 쏟아낸 런던의 상상력은 그의 다양한 경험에서 비롯됐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일찍 학교를 그만둔 그는 통조림 공장과 원양 어선을 전전했고 돈을 벌기 위해 알래스카로 떠나 골드러쉬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런던은 최하층 노동자에서 미국 문학 역사상 가장 대중적인 작가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역동적인 삶을 살았다.

『비포 아담』이 출간된 지 105년이 지났지만 그의 풍자는 여전히 유효하다. 선집의 기획자인 곽영미씨는 “약육강식의 현실이 단지 고도 자본주의라는 이름 하에 좀 더 세련된 모습만 보일 뿐 더 잔인하고 혹독해졌다”고 말한다. 강대국은 여전히 약소국을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있고 신형 무기를 앞세운 전쟁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런던이 보여주는 인류의 어두운 자화상은 한 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인류는 아직도 ‘전-아담’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대학신문, 2009년 3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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