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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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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을 덮고, 사전에서 nemesis의 뜻을 찾아본 후,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멍해지고 말았다. 응당 받아야 할 벌, 피할 수 없는 천벌이라.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일을 최대한 열심히 해도, 여기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이전과 다른 삶을 살려고 해도,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닐 천형(天刑). 목숨이 끊어지기 이전에는 버릴 수도 놓을 수도 없는 운명. 문득 청산별곡의 '돌'이 떠올랐다. 더불어 어디다 던지는지 누가 맞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돌을 계속 맞으며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울고 있는 '나'도.

캔터가 바로 '나' 같은 인간이었을까. 응당 받아야 할 벌을 어깨에 짊어진 채 끊어지지 않는 목숨을 근근이 이어가는 인간. 자신의 운명을 피하려고도 바꾸려고도 하지 않고, 비참함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끌어안은 존재.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세상에서 망가진 착한 소년. 왠지 서글퍼졌다.


캔터 선생님, 아널드 메스니코프예요. 챈슬러 놀이터에서 놀던. (245쪽)
책의 40쪽 정도가 남았을 때, 그러니까 형편없는 시력 때문에 2차 대전에 참전하지 못하고 미국에 남아 있던 버키 캔터가 놀이터 감독으로 일하다가 자신이 지도하던 아이들이 폴리오로 하나둘씩 목숨을 잃자 애인인 마샤가 일하고 있는 인디언힐로 떠나 자신만 안전한 피난처로 도망쳐 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중 캠프에 폴리오가 퍼져나가자 자신이 건강한 감염 보균자인지 검사를 받으러 떠나던 때까지, 내 머릿속을 맴돌던 궁금증은 '정말 캔터가 폴리오를 퍼뜨린 걸까?'가 아니었다. 왜 이 소설의 서술자는 캔터를 '캔터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을까 하는 게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마샤는 마샤고, 도널드는 도널드고, 호러스는 호러스고, 할머니는 할머니인데, 왜 캔터는 캔터가 아닌 '캔터 선생님'이지? 이 호명이 의미하는 건 도대체 뭐지? 자꾸 거슬렸다.

그래서 마지막 장을 읽자마자 무릎을 쳤다. 이 소설이 작품 밖 전지적 서술자의 시점으로 쓰인 게 아니었음을-이것이 필립 로스의 서술에 나타나는 대표적 특징임을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바로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마치 작가인 듯 시치미를 떼고 캔터의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뒤엎어 놓았던 그 여름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던 서술자는, 마지막 장에 이르러 챈슬러 애비뉴 놀이터에서 놀던 소년들 중 한 명이었던 아널드로서 전면에 등장한다. 자기 역시 1944년 폴리오에 걸려 오랜 시간 고생했으며, 세월이 한참 흐른 1971년에야 캔터를 다시 만났다며.

캔터는 아널드와 일주일에 한 번씩 함께 점심을 먹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빠뜨리는 것 없이, 자기반성적인 태도로, 가슴에 묻어두었던 그 모든 것을, 전반적으로 뿌리 깊은 좌절의 분위기로.

그는 미국에서 폴리오 피해자의 가장 위대한 모범인 FDR와는 정반대로 병에 걸리면서 승리가 아니라 패배에 이르렀다. 마비와 그뒤에 온 모든 것으로 인해 그는 사나이라는 자신감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삶의 그쪽 면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중략) 그는 마비된 뒤로는 결혼은커녕 누구와 데이트를 한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고 대꾸했다. 그는 시든 팔과 시든 다리를 의사, 그리고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할머니 외에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가 없었다. (246-267쪽)



벌어진 일은 벌어진 거야. 내가 한 짓은 한 짓이야. (249쪽)
캔터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도둑인 아버지, 출산 중에 죽은 어머니, 폴리오로 인해 잃어버린 건강과 자신감, 놓아버린 연인, 아무런 죄도 잘못도 없이 폴리오로 죽은 아이들…왜 신은 이런 운명을 캔터에게 주었을까? 숨이 붙어있는 동안 내내 자신의 불행을 강화하고 확대하면서 삶의 순간 순간을 끝없이 망치는 삶을, 왜, 인간이, 살아야만 하는 걸까? 캔터의 말처럼 모든 일은 그의 죄에서 비롯해 벌어진 것이고, 벌어진 일은 이미 벌어진 일이라 고칠 수도 바꿀 수도 없으니, 아주 작은 구원도 위안도 그에게는 불가능한 걸까? 그게 당연한 걸까?

내가 얼마나 억울해해야 하는 걸까? (264쪽)

어쩌면 캔터의 말이 맞다. 이 일은 억울한 일이다.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밝히려 들어 봤자 끝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알 수 없는데 결과는 엄청난 파멸이니까. 그렇기에 캔터는 의미 없고, 우연이고, 터무니없고, 비극적이라는 말로는 자신의 삶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좆같은 새끼와 사악한 천재가 합쳐진 하느님이 자신을 악한 존재로 형상화했다고 믿으며, 반추동물처럼 되새김질한다; 나는 절대 과거의 내가 될 수 없을 거다. 대신 평생 이런 존재로 살 거다. 나는 다시는 기쁨을 알지 못할 거다…라고.

문득 이승열의 노래 한 구절이 생각난다. WHY WE FAIL WE DON'T KNOW…그리고 현명한 마샤의 말이.

너는 늘 네 책임이 아닌 것까지 책임을 지려고 해. 끔찍한 하느님이 책임을 지거나 끔찍한 버키 캔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는데 사실 책임은 둘 중 누구에게도 있지 않아. (261쪽)




어쩌면 그가 실제로 보이지 않는 화살이었을지도 모른다...그렇다 해도, (275-276쪽)

캔터가 모든 악의 근원일지도 모르고 모든 파괴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해도, 캔터 때문에 그의 어머니와 아이들이 죽어나갔으므로 캔터와 함께 있었다면 마샤 역시 불행 속에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해도…


한때, 캔터가 아이들에게 무적의 존재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를 통해 소년들은 남성을 배웠고, 그와 같은 남성이 되고자 꿈꾸었다. 비록 그 찬란한 시간이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해도, 빛이 사라진 후 남은 건 그보다 훨씬 길고 지독한 암흑 뿐이었다 해도, 스물 세 살의 캔터는 분명 느긋하고, 친절하고, 공정하고, 사려 깊고, 안정적이고, 상냥하고, 정력적이고, 늠름하고, 확신에 찬 젊은 남자이자 동지이자 지도자였다-1944년 이전까지.


그 찬란한 순간이 있었으므로 캔터의 삶은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건 너무 무책임하다. 찬란한 영광을 경험한 이후의 절망은 더더욱 파괴적이다. 그렇다고 그 찬란한 순간을 떠올리며 캔터가 남은 삶을 극복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무책임하다. 캔터의 고통은 캔터에게 절대적인 것인데, 내가 뭐라고 캔터에게 의지를 요구한단 말인가. 의지를 가장 필요로 했던 건, 당연히 캔터였을 텐데.


그래서 결국, 나는, 모르겠다. 왜 캔터가 이런 삶을 살아야 했는지, 캔터가 구원받지 못한 게 당연한 건지, 평생토록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떠올리고 또 떠올리는 게 폴리오 이후의 여생이어야만 했던 이유가 뭔지…나는 모르겠다. 누구도 모를 것이다. 이 소설을 쓴 필립 로스마저도, 모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해도 나는 마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삶을 누리려 했던, 순간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려 했던, 마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다. 그녀는 해결할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꾸짖던 캔터와 달리 사랑하는 이를 열심히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루해진 자신이 부끄러워 스스로를 버리라고 무자비하게 자신을 밀쳐내던 캔터를 향해 진짜 기형이 된 건 캔터의 몸이 아닌 마음이라고 외쳤다. 그 용기가, 노력이, 삶에 대한 애정이, 아름답고 부러워서, 마샤와 함께 했다면 캔터의 삶이 조금은 달라졌을 거라고 믿어보고 싶다. 가족이 있었기에 제 운명을 비난하는 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던 아널드처럼, 캔터 역시 그럴 수 있었더라면 책을 덮는 내 마음이 조금은 가벼울 수 있지 않았을까.



대학 마지막 해에 아내를 만난 겁니다. 그러자 서서히 폴리오가 유일한 드라마가 아니게 되고 젖을 떼듯 제 운명을 비난하는 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저는 1944년 그곳 위퀘이크에서 한 여름에 걸쳐 벌어진 사회적 비극을 겪었지만 그것이 평생에 걸친 개인적 비극이 될 필요는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269쪽)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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