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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부터 헬로라이프 ㅣ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1. 무라카미 류, 라는 이름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둘 있다. 하나는 친구와 328번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교코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에 대해 흥분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고(친구와 내가 교코에게 꽂혔던 부분은 달랐지만, 어쨌든 둘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여자라니, 현실에 있을 수 없다'는 잠정적 결론에 도달하긴 했었다) 또 하나는 중앙도서관의 커튼 뒤에서 류 책을 쌓아놓고 읽다가 잠들던 기억. 둘 다 스무 살 때의 일. 눈을 그믐달 모양으로 만들며 웃던 친구의 상기된 얼굴과 들뜬 목소리, 도서관의 묵은 책 냄새와 나른하던 공기가 왜 이리도 오래 남아 있을까.
그런 이유 때문인지, 무라카미 류를 '젊은 글을 쓰는 소설가'로 인식하고 있던 내게, 이 책은 제목부터 충격이었다. 55세라고? 교코와 식스티나인의 무라카미 류가? 류는 핏속에서 팔딱팔딱 끓는 청춘의 기운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때에 읽을 법한 글을 쓰는 사람 아니었나? 그런 그가, 55세의 사람들 이야기를 썼다고? 뭐지, 야마다 에이미나 다나베 세이코 같은 느낌이려나…하고 추측하다가 깨달았다. 내가 무라카미 류의 글을 얼마나 오랫동안 읽지 않았는지.
오랫동안 한 소설가의 책을 꾸준히 읽는다는 건 참 어렵지만, 그래도 꽤 즐거운 일임에 틀림 없다. 어, 이건 예전의 거기에서 본 거랑 비슷한데, 이 사람은 그 때 그 소설에서 봤던 그 사람과 비슷하고…하며 기억을 더듬으면서 예전 책을 오랜만에 들춰볼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소설가와 소설이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는 동시에, 그를 따라 읽는 나 역시 계속 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예전에 꽂혔던 문장이 꽂히지 않기도 하고, 예전엔 의미 없이 넘겼던 페이지에서 멈춰버리기도 하고, 예전에도 좋다고 생각했던 문장 앞에서 '역시로구나!'하고 무릎을 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신간보다 예전 책을 더 오래 붙잡고 있게도 된다.
그러나 나는 무라카미 류의 글을 꾸준히 찾아 읽지 못했기에, 무의식적으로 지금의 무라카미 류가 쓰는 글 대신 20년 전, 30년 전의 무라카미 류가 쓴 글을 '무라카미 류'와 동일시하고 있었던 거다. 교코와 식스티나인이 무라카미 류 글의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왔고, 실제의 그가 교코와 식스티나인의 무라카미 류와는 꽤 많이 변해왔을 거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던 거다. 어리석게도.
2. 줄줄 넘쳐 흐르던 에너지로 가득찬 청춘들의 이야기 대신, 그의 말마따나 체력도 약해지고, 경제적으로도 만전을 기하지 못하고, 이따금씩 노쇠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든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후기 중)에 대해 써내려간 이 소설은-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류가 후기에서 '신뢰'라는 말과 개념을 이토록 깊이 의식하며 소설을 쓴 것도 처음이라고 쓴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삶이 잔뜩 주름져 있다는 걸 알아채고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버렸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연히, 자신을 세상에 붙여둘 수 있는 '신뢰'였을 테니까.
다섯 편의 소설을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었는데, 하늘을 나는 꿈 다시 한 번과 펫로스가 꽤 슬픈 얘기였다면 결혼 상담소와 캠핑카, 여행 도우미가 긴장을 이완시켜 주어 소설의 배치가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이상 남편이 필요 없어진 여자 이야기(결혼 상담소)는 정말이지 유쾌해서 계속 낄낄대며 읽었고, 삶이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나게 된 남자 이야기(하늘을 나는 꿈 다시 한 번)의 마지막 장에서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축 처진 어깨를 늘어뜨린 사람들에게 보내는, 무라카미 류의 응원 같았달까.
나 역시 불안으로 가득 차 있고, 사는 게 고통스럽다. 하지만 적어도 가족이 있고 아직 살아 있지. 맛있는 물도 마실 수 있고. 그리고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다시 하늘을 나는 꿈을 꿀 수 있을 지도 모르지. (167쪽)
은퇴 후 세일즈맨으로서의 커리어와 자신감으로 기세등등하던 토미히로가 '도대체 내 인생은 무엇이었던가?'하는 고민 앞에서 주춤거리는 이야기(캠핑카)나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블로그를 하느라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있는 남편의 이야기(펫로스)를 읽으면서는 나의 아버지가 떠올라 마음이 짠했다. 한낮 내내 창문 밖 공원을 바라보며 한숨조차 못 쉬고 멍하니 있던 아버지의 옆모습, 독수리 타법으로 컴퓨터 앞에서 끙끙대며 단축키 하나로 금방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민하던 뒷모습. 그때 내 아버지도 블로그를 했었지.
일을 그만두고 일 외의 무엇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전긍긍하던 아버지의 심정을, 두 딸이 졸업하고 취직할 때까지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 고민하던 아버지의 고뇌를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그 철없음이 후회되고, 죄송하고, 슬프다. 하지만 나카고메 시즈코의 말처럼 인생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라기보다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에 더 가까울테니, 그때의 잘못을 되새김질하기 보다는 지금의 시간을 충실히 채우는 게 낫겠지. 내가 그때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
다른 삶의 방식을 발견했다고 해서 단순히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순간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중략) 돈이나 건강 등에 대한 불안감은 있다. 불안투성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건 후회하면서 사는 것이다. 고독은 아니다. (76쪽)
3. 사실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땐 '노년의 내 모습'을 계속 상상했더랬다. 애도 남편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고, 쭉 없을 계획인지라(!) 나카고메 시즈코의 맞선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나중에 저런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나마 시즈코는 딸이라도 있지, 나는 딸 따위도 없을 텐데 하는 생각에 심란함이 더해졌고. 어쩌면 시모후사 겐이치처럼 장래의 암울한 전망을 그려 보며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게 55세 이후의 내 모습이겠거니 싶어 울적하기도 했다. 류가 그리는 일본의 지금 모습이나, 한국의 지금 모습이나, 거의 다르지 않다 싶어서.
시모후사 겐이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일본은 30년 전이나 40년 전에 비하면 월등히 풍요로워졌는데도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돈이 돌아가지 않는다. 춘계 임금 인상 투쟁에서도 대기업 노조는 경영진에게 굴복했고, 요 근래 급료가 전혀 오르지 않았다. 아니, 오르기는 커녕 실적이 부진한 가전제품 회사에는 구조 조정 바람이 불고 있다. 대기업이 그런 상황이니 중소기업 사원이나 파견 직원, 아르바이트 직원들의 비참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중략) 인구는 계속 감소하는 추세인데, 대다수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허덕이며 단 20엔이든 10엔이든 저렴한 편의점 도시락을 사 먹고, 1엔이라도 싼 선술집을 찾고, 맛있는 식사도 맛있는 술도 애초에 포기하며 살아간다. (313쪽)
물론 개인적으로는, 차를 준비해놓고 작은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사는 삶도 크게 나쁘지 않다. 하지만 앞으로의 세상은 지금보다 더 쪼잔해지고 치사해지겠지. 인간의 가치를 돈보다 아래 두고 복지라는 말이 도둑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다스리는(!!) 이 나라에서, 늙어가는 내가 평안하게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지. 근데 나보다 이 세상을 오래 살아가야 하는, 더 젊고 어린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삶을 살아가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같이 잘 살기 위해서, 몇 개 없는 걸 두고 힘 없는 이들끼리 개싸움하지 않도록,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넉넉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잘' 살아가야겠지. 나 늙으면 어떡하지? 힘 없고 돈 없을 때 어떻게 살지? 하는 걱정으로 벌써부터 동동거리며 치사하게 내 것만 챙기면서 살지 말고. 그래야 다시 하늘을 나는 꿈이든 캠핑카를 타고 여행하는 꿈이든 근사한 여자/남자를 만나는 꿈이든, 그게 뭐든간에 '꿈'이란 걸 꿀 수 있을 테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을 땐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을 마시며.
뭔가 괴로운 일이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먼저 천천히 물을 마셔라. 그러면 일단 마음이 차분해지지. (85쪽)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