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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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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월 17일의 기억


밤이 지나면 낮이 되듯 불의는 반드시 사라져.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압제가 멸하고 기적과도 같은 날이 훤히 밝아 오는 것을 분명 보게 될 거야. 

-우리 동네 아이들 2권, 358쪽


마지막 장을 읽은 날은 4월 17일이었다. "나도 이거 주면 안 돼?"라고 말하는 직장 동료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었던 노란리본 뱃지가 마침 다 떨어져 버린 날이었다. 좀 더 사야겠다는 생각으로 노란리본 뱃지를 만들어주시는 분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찾았다. 영상 하나가 업데이트되어 있었다(http://on.fb.me/1JhCG5G). 

클릭한 영상 속에서는, 노란 옷을 입으신 여자분이, 마이크를 잡고 말씀하셨다.

저희 가족들이 항의의 뜻으로 지금 광화문, 바로 정문 앞, 그러니까 경복궁 입구 쪽에서 벌써 2박 3일째 노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경찰 병력이 대거 출동하여 저희들을 무 뽑듯이 끌어내고 있습니다. 지금 일부 가족들은 버스 위로 올라가서 시위를 하고 있고, 부모들, 그리고 부모들은 저처럼, 지금 사방으로, 여러 명이서 감싸서 끌어내고 있습니다. 거의 전쟁터와 같은 상황입니다. 여러분이 가셔서 야유라도 보내주시고,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여러분이 얘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가셔서 이야기 좀 해주십쇼. 가족들이 혼자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많은 경찰 병력이 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셔서,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라도, 한 번 외쳐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몇 분 후 또다른 사진 세 장이 올라왔다(http://on.fb.me/1FWq8xx). 사진 속에서는 무표정한 얼굴의 경찰 다섯 명이 파란 패딩 점퍼를 입고 빡빡머리를 한 남성 한 명을 붙잡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에 삭발하신 유가족 중 한 분이리라는 걸, 아무 설명 없이도 알아챌 수 있었다.

문득 우리 동네 아이들 1권에서 본 문장이 생각나 책을 뒤적였다.

"우리 구역 사람들은 끼드라의 실종과 함단이 관련되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함무다가 말했다.
"천치 같은 놈들아, 알아듣겠어! 사람들이 끼드라를 죽인 놈이 함단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살해했을지도 생각해 봐야 해."
"만일 살인자가 알아투프 사람이라면요?"
"살인자가 카프르 알자가리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다른 놈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데 관심 있지, 범인을 처벌하는 것에는 관심 없다."
"훌륭하십니다!" 아부 사리으가 탄성을 질렀다.
라이시는 화로를 비우고 담뱃대를 바라카트에게 건네며 말했다.
"불쌍한 함단 놈!" 
-우리 동네 아이들 1권, 209쪽


깊은 한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저절로.




2. 세상은 점점 나빠져만 가고 있는 게 아닐까?


때때로 생각한다. 세상은 점점 나빠져만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수십 번은 완전히 무너졌어야만 맞는 것 같은 이 사회가 오늘도 짐짓 차분하고 뻔뻔한 얼굴로 꾸역꾸역 수명을 연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세상이 전혀 좋아지지 않고 있다는 증좌는 아닌가? 그래도 예전보다는, 그래도 그때보다는, 이라는 생각은 너무 나이브한 것이지 않나? 김연수소설가가 눈먼 자들의 국가에 쓴 이 문장에 백퍼센트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과연 있나?


인간은 저절로 나아지며,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역사는 진보한다고 우리가 착각하는 한, 점점 나빠지는 이 세계를 만든 범인은 우리 자신일 수밖에 없다. 오이디푸스의 망각과 무지와 착각은 또한 우리의 것이기도 한다. 


우리 동네 아이들을 읽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질문 역시 저것이었다. 이 이야기 속의 '우리 동네' 역시 과연 좋아지고 있는 건가? 후맘이 친형 까드리의 손에 살해당한 이후부터 인간은 이를 끝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천형을 지게 된 건 아닐까? 정의와 질서가 세워진 동네란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지도자가 존재하는 순간에만 가능할 뿐이다. 자발, 리아파, 까심이 대체 누구지? 이야기가 아닌 카페 밖 어디에 대체 그들의 흔적이 있다는 건가? 라는 반문에는 조소가 가득 섞여 있다. "현세에서 우리가 파리라면 내세에서 우리는 흙먼지야"라는 말에는 이번 생에 대한 기대가 먼지만큼도 없는 동네 사람들의 비탄과 절망이 묻어나온다.


같은 이유로, 우리 동네 아이들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쫓겨났던 아드함이 아버지의 부르심을 받고, 후맘을 죽인 후 도망갔던 까드리가 다시 돌아와 동네를 이루고, 자발과 리파아와 까심이 평화와 사랑과 평화와 형제애와 평등을 전파함으로써 동네를 변화시킬 때마저도 그랬다. 그 변화가 찰나에 불과하리라는 걸 너무 쉽게 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발과 리파아와 까심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넘쳐흐르던 기쁨과 희망은 금세 지나가고, 잠시 후의 어두움은 더 짙게 칠해졌으니까.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너무 힘이 들어서, 김수영의 시를 읽었다.


우리는 무슨 적이든 적을 갖고 있다

적에는 가벼운 적도 무거운 적도 없다

지금의 적이 제일 무거운 것 같고 무서울 것 같지만

이 적이 없으면 또 다른 적ㅡ내일

-적1 중에서




3.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문득 궁금해졌다. 왜 이 책의 제목은 우리 동네 아이들일까. 우리 동네 '이야기'가 더 적당한 것 같은데. 책을 덮고 표지를 바라보았다. 종이를 넘겨 보는 남자, 그 앞에 앉아 있는 어린 아이.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어지는 이야기. 과거 어른들의 것이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나와 미래를 살아가게 될 너의 것이기도 한 이야기. 갑자기 아득해졌다.



이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지고 있는 이야기일 테다. 이것을 끝없이 이어가게 될 이들은 탐욕으로 눈이 멀어 미래를 보지 않는 어른들이 아니라 아이들이니, 나 역시 아이들로서 존재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다. 자발이나 리파아나 까심 같은 사람은 되지 못할지언정 이드리스나 자끌루트나 하자즈 같은 사람이 되어선 안 되니까.


그러니 아랍의 어느 작은 동네에서 벌어졌다가 이미 종료되어버린 '옛날 이야기'가 아니란 거다. 자발라위라는 절대적인 존재가 가족을 이루고 그 가족들의 후손이 이어지면서 되풀이된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쓰이고 있는 역사인 게다.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시간의 모든 공간이 곧 자발라위의 동네일 테니, 나의 동네 역시 자발라위의 동네인 게다. 


나지브 마흐푸즈는, 인간이라면, 자신이 존재한 모든 장소의 모든 시간을 기록하고 기억함으로써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이 피묻은 이야기로써 전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발과 리파아, 까심에게 전해진 자발라위의 말을 구현해내자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힘으로 억압과 맞서 이기고 너희들의 권리를 찾아서 행복하게 살면 된다.

-우리 동네 이야기 1권, 261쪽


'사랑을 받고 싶으면 행동으로 옮기거라.'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이렇게 약한 제가 무슨 수로 저 수장들을 물리칠 수 있나요?' 그러자 그분은 '나약한 자는 잠재된 자신의 힘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이고 나는 어리석은 자들을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 동네 이야기 1권, 356-357쪽


그분은 당신에게 동네 사람들 모두가 그의 자녀고, 그의 재산은 그들 모두의 재산이고, 수장들은 반드시 사라져야 할 사악한 존재라고 말하실 겁니다. 거기다 동네는 틀림없이 그 저택이 증축된 형태가 될 것이라고 말하실 겁니다.

-우리 동네 이야기 2권, 70쪽




4. 그리고 나에게.


물론 쉬울 리 없다. 오늘 포털사이트의 초기화면에는 4월 16일에 맞춰 콜롬비아로 간 그녀가 "가슴을 가진 사람에게 망각은 없다"고 말했다는 뉴스가 버젓이 떠 있었다. 유가족을 광화문 앞에 가두고 찬 땅바닥 위에 누워 노숙하게 하더니 차벽으로 겹겹이 포위하고 무차별적으로 연행하던 경찰은 세월호 추모 집회가 폭력 집회로 변질됐다고 발표했단다. 2008년의 데자뷰 같은 느낌이다. 물론 그 전에도, 그 전에도, 그 전에도, 비슷한 광경이 있어 왔었지. 보네거트는 그랬다, 내 늙어가는 것이 끔찍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끔찍할 줄은 몰랐지, 라고.


그렇기에 나는 또다시 김연수소설가의 문장을 다시 찾아 읽는다. 그가 인용한 테이레시아스의 말을. "그대가 바로 그대가 찾고 있는 범인이란 말이오." 


이 끔찍함과 고통스러움을 배태한 세상이 나의 세상이라면, 나 역시-어느 정도는-그 끔찍함과 고통스러움의 창조자이자 동조자. 사람들이 아주 사소한 실수를 범해도 무자비하게 응징하고, 웃고 농담하고 쳐다보았다고 몽둥이찜질을 가하는 관재인과 그의 첩자들 앞에서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고개 숙였던 적이 정말 없었던가. 폭력 행위가 난무하고 증오와 공포가 팽배한 험악한 분위기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 있겠냐고, 나는 그와 상관 없고 싶다고 고개 돌린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견디고 버틴다는 게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걸,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실감한다. 그러니 수많은 이들이 잊고 보지 않고 뒤돌아서버리는 거겠지. 나 역시 자주 그러고 말겠지. 그렇게 악령으로부터 잡아먹히고 말겠지. 고개 돌리지 말고, 바로 보고,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일 텐데.


왜 망각은 전염병처럼 우리 동네를 휩쓸고 지나가는 걸까?

-우리 동네 이야기 1권, 4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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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족.


해설을 읽지 않고서도 성경에서 모티프를 따왔다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자발라위의 권위는 신의 것과 다름 없었으니까. 아드함과 이드리스, 까드리와 후맘, 자발과 리파아의 이야기를 읽으며 만약 이런 얘기가 우리 작가의 손으로 쓰였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봤다. 마흐푸즈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공격받았듯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엄청난 고초를 겪었겠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리파아였다. 폭력적 권위 대신 사랑을 통해 힘을 가진 자와 싸웠고 약한 자를 위해 살려고 했던 리파아는 예수님을 바로 연상시켰다.



1권의 남은 페이지가 줄어들 수록 두려웠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글로 옮겨져 있을 리파아의 죽음을 확인하기가 겁났다. 리파아의 죽음이 서술된 페이지 앞에서 몇 번을 주저했고, 읽는 내내 한 글자 한 글자가 참 아팠다.


리파아는 절망스러워 물었다.

"왜 저를 죽이려 하십니까?"

바유미가 몽둥이로 리파아의 머리를 가격하자 그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붵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발라위!"

그다음 쿤피스가 몽둥이로 그의 목을 내리쳤고 이어서 몽둥이찜질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의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손으로 열심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 이야기 1권, 424-425쪽


저 부분을 읽던 때의 고통 덕분에 오늘날의 답 없는-_-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야말로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저런 죽음을 온몸으로 맞은 그분의 가르침은 당신들이 지금처럼 힘을 가진 자 앞에서 비굴하고 약한 자 앞에서 기세등등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당신들이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팔고 다니는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라는 걸 알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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