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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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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전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몇 권 읽지도 않았다. 나이를 먹어서도 그랬다. 남들이 좋다고 칭찬하면 '분명 나쁜 점이 있을텐데…'하며 눈에 불을 켜는 못돼먹음을 기본 옵션으로 갖고 있었던지라 긍정적 측면을 중심으로 실존 인물의 삶을 짚어나가는 글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입을 삐쭉거리곤 했다. 지루했다.


그뿐인가. 러시아 역사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 파시스트는 인간에게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심한 욕이라고 생각한다. 민족주의는 영 맞지 않는 옷 같다. 엠마뉘엘 카레르의 책은 겨우 한 권 밖에 못 읽어본데다가 그 한 권도 끝까지 못 읽었고 크게 재미있다고 느끼지도 못했다. 이러니, 리모노프를 펼쳐들기 전 내 마음이 가벼웠을 리가 없다. 리모노프를 읽기에 적절치 않은 요건을 이리도 두루두루 갖고 있으니. 심지어 책은 또 왜이렇게 두꺼워? 마음에 드는 건 표지 하나 뿐이었다. 보기만 해도 신맛이 입 안에 고이는 레몬과 수류탄의 조합. 이것이 '리몬카'에서 나온 디자인이겠구나 하는 건 나중에 깨달았지만.


'그래도 어디 한번 읽어나 보자'였던 마음이 조금씩 변한 건 프롤로그를 거의 다 읽어갈 때쯤이었다. 리모노프가 엠마뉘엘 카레르에게 세면대에 대한 일화를 얘기해주는 장면, 그러니까 감옥에서 철제 세면대를 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을 맞닥뜨렸을 때, 딱 집어 말하자면 여기서.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처럼, 볼가 강변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감된 일반범의 세계와 필립 스탁의 디자인 속에서 유영하는 멋쟁이 작가의 세계, 이토록 이질적인 세계뜰을 두루 경험한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틀림없이 많지 않아, 라는 결론에 이르는 순간 그는 자긍심을 느꼈다. 그 심정, 나도 이해한다.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이 책을 쓰려는 것이다. (37쪽)


이질적인 세계를 두루 경험해 본 이의 자신만만함 속에서 나는 자신이 그 중 어디에도 완전히 속한다고 느끼지 못하고 떠도는 이의 그림자를 느꼈다. 그 그림자는 자주 나의 것이기도 했기에, 왠지 나는 그 스킨헤드 민병대의 우두머리인 몹쓸 파시스트(라니, 어감은 정말 무시무시하다!)이자 우크라이나의 깡패로 출발해 소비에트 언더그라운드의 아이돌, 맨해튼의 거지, 억만장자의 집사를 거쳐 파리의 인기 작가로, 발칸 반도를 헤매던 사병으로, 그리고 이제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혼란기에 청년 무법자들의 당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늙은 보스로 살고 있다는 그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의 이야기가 읽고 싶어져 버렸다. 갑자기 불현듯이 우르르쾅쾅쾅쾅!



죽음조차 그는 두렵지 않았다. 무명으로 죽는 게 괴로울 뿐이었다. (201쪽)

어떤 사람은 자신이 남들보다 유명하지 않다는 것 때문에 고통받는다. 어릴 때는 나도 그랬다. 다른 사람들보다 튀고 싶어했던 것 같고,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했던 것 같고, 리더 같은 역할을 잘 한다고 평가받았던 것 같다. 지금은 나의 가장 큰 욕망이 바틀비처럼 상대의 모든 말에 I would prefer not to라고 대꾸한 후 총총히 사라지고 싶어하는 욕망이라는 걸, 그러니까 내가 노출과 외양 대신 고독과 은둔을 익숙히 여기는 엠마뉘엘 카레르와 가까운 인간이 되었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서 나는 이 불같은 성미에 청개구리 같은 친구(269쪽)의 순수한 욕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잘나가고 싶고, 잘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고 싶고, 그래서 잘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면 그들보다 더 잘나가고 싶고, 그들과 다르고 싶고, 그렇지만 막상 더 잘나가면 허무하고, 왠지 이게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딴 길로 가버리는 청개구리. 그것이 청년 에두아르드의 삶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사람 도대체 언제 진짜로 잘나가게 되는 거지? 


안나의 집주인이 되었을 때나 엘레나와 함께 큰 뜻을 품고 러시아를 떠났을 때는 금방 '청년천재문호 에두아르드'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엘레나와 헤어지고 엉망으로 살다가 제니를 만났다 헤어지고 스티븐의 집사로 살았던 에두아르드의 이야기는 버스 안에서 끽끽거리고 웃게 해 줄 만큼 재미있었지만, 나는 조금씩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226쪽이나 읽었는데 아직도 엄청나게 유명해지지 않았으니 어쩌면 좋아! 이 유명해지지 않으면 절대 안 되는 이 남자가!!



강하고 못된 그가…모든 민중의 착한 무기력함을 지켜 주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었다. (296쪽)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는 그의 화려한 성공담이 줄줄 나열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뒷표지에 쓰인 리모노프의 인생 요약 중 '문단의 풍운아로 뉴욕과 파리를 휘어잡다가'에 해당하는 부분은 '미국 이민 길에 올라'에 해당하는 부분보다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성공한 리모노프는 조금 알려진 작가에 만족하지 않고 정말 유명한 작가가 되겠다는 야심에 불타고 있었으니까. 달콤한 맛에 취해 있을 여유 따위 없었던 거다. 그사이 강하고 음울하다고 믿었던 고국 소련은 급격히 변해가고, 적군 사병의 군복 단추가 놋쇠에서 플라스틱으로 바뀐 것을 보며 군인들이 이렇게 조악한 고국을 볼썽사납게 입고 다니는 나라의 국민은 자신감을 상실한 국민이며, 더 이상 주변의 존경도 받을 수 없는 국민(269쪽)이라며 기분 나빠하던 리모노프는 1989년 12월, 소련으로 돌아간다.


그 이후 리모노프의 삶은 소련의 현대사와 맞물려 돌아간다. 고르바초프와 옐친, 푸틴으로 권력 구도가 이어지는 와중에 등장하던 러시아의 수많은 정치인들은 낯설었지만, 자본주의의 폭격과 무시무시한 독재정치로 쑥대밭이 되어가는 나라 꼴은 어디서 보던 거랑(-_-) 너무 많이 비슷해서 기분이 꽤 묘했다. 특히 <충격 요법>의 등장 이후에 대한 부분. 


지폐를 포대로 들고 다니면서 늘씬한 미녀들을 정부로 거느리는 포악하고 상스러운 <신러시아인>이라는 인물 유형이 현대적 신화로 등장했다. (중략) 수완 좋은 1백만 명이 <충격 요법> 덕에 벼락부자가 되는 사이 나머지 1억 5천만 명의 꽁다리들은 빈곤에 시달렸다. 물가는 지속적으로 올랐지만 임금은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했다. (360쪽)


거물들은 콤비나트나 천연자원 매장지를 놓고, 피라미들은 가판대나 시장 좌판을 놓고 서로 혈투를 벌였는데, 손바닥만 한 가판대든 손바닥만 한 시장 좌판이든 무조건 <지붕>이 필요했다. 이것은 난립 중이던 경호업체들에 붙여진 이름으로, (중략) 갈취를 일삼는 강도 집단과 하등의 차이가 없었다. (362쪽)


기껏 열에 한 명만 총을 든 시위대를 기다리는 것은 결사 투쟁의 대오로 서 있는 오몬 부대였다. 오몬들은 버스들이 도착하기 무섭게 발포했고, 곤봉을 휘두르며 돌격해 왔다. 곤봉으로 시위자들을 가격하고 총을 난사하면서 전진해 왔다. 살육이었다. (386쪽)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정부가 독재를 자행하며 국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이를 견디지 못한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자며 '극우민족주의파시스트집단'의 형태로 시위를 하다가 정부군에 의해 짓밟히는 모습. 폭력적인 정부와 극우파시스트 중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반동인지 누구도 구별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리모노프는 끝까지 약한 자들의 옆에 서 있으려고 했다. 그것이 내가 그에게 파시스트라는 딱지를 붙일 수 없는 이유이다. 물론 엠마뉘엘 카레르는 '에두아르드라는 파시스트'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ㅋ


에두아르드라는 파시스트한테 한 가지는 인정해 줘야 한다. 그는 과거나 지금이나 항상 소수의 편에 서 있다. 뚱뚱한 사람들보다는 마른 사람들,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사람들, 수두룩하게 있는 착한 사람들보다는 당당한 개차반들의 편이다. 갈팡질팡하는 듯 보이는 인생 역정이지만 그는 언제나, 정말로 언제나, 그들의 편에 서는 일관성을 보여 주었다. (436쪽)



그가 늘, 용기 있게 어린애처럼 고집스럽게 되고자 했던 영웅 (472쪽)

그러니 정치인 에두아르드의 삶이 평탄할 리 없다. 출마를 하고(당연히 낙선하고) 전쟁에 뛰어들고(심지어 사람도 죽이고!) 당을 없애라는 정부의 방침에 "합법적인 길을 막으면 우린 다른 길을 가겠다는 겁니다."라고 대꾸한 후 정치적 탄압을 당하고 중앙아시아를 떠돌고 알타이의 오두막에서 갑자기 체포당하고(심지어 대령에게 스카우트 제안도 받고!!) 그리고 그리고 테러리즘, 무장 단체 결성 및 가입, 총기의 불법 취득과 운반과 판매 및 저장, 극단주의 활동의 선동으로 재판을 받고 옥살이를 하고…

하지만 나에게는 '정치 투사로서의 파란만장한 삶'보다 감옥에서 에두아르드가 보여준 '좋은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더 인상 깊었다. 이 때의 에두아르드를 묘사하는 엠마뉘엘 카레르의 시선이 가장 호의적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러니 그가 감옥에 있을 때를 리모노프의 인생의 절정기였을지도 모르는 때,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이자 영웅에 가장 근접했던 때라고 설명한 거겠지. 너무 이상적이었다면 좀 짜증스러웠겠지만, 마흔 살 차이가 나는 애인 나스치아에게 자신을 떠나라고 말하지 못하고(심지어 그는 출소 후 나스치아와 바로 헤어진다) 나타샤가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자신의 형량 선고 소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완전히 이상적인 인간'과는 또 좀 멀어서, 짜증나지 않았다.

에필로그에서 에두아르드가 자신의 입으로 말한 것처럼 그의 삶은 부분적으로 개떡 같을지도 모른다. 500페이지 넘게 서술한 주인공의 삶이 결국은 '개떡'이라니, 엠마뉘엘 카레르가 독자들 입장에서 실망스러운 결말이 될 거라고 걱정할 만 하다. 하지만 에두아르드의 그 말이 진심은 아니었을거라고 나는 믿고 싶다. 나르시스트이고 에고이스트인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삶을 개떡에 비유했을 리 없을 거라고. 평온한 노년이나 은퇴 대신 중앙아시아에서 넝마를 걸친 채 모두 다 내려놓은 사람들로 생을 마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그가, 그럴 리 없다고.

그러므로 이 책의 결말은 하나도 실망스럽지 않다. 잘나고 싶었고, 유명해지고 싶었고, 강하고 싶었고, 그래서 많이 갖고 많이 누리고 싶어했던 에두아르드 베니아미노비치는 재산도 이름도 없이, 모두 다 내려놓은 사람들로서, 동전을 던져 줘도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는, 느리고 격렬한 도시 안 사원들의 높은 담장 및 그늘에서, 왕처럼, 늙어가는 누군가의 모습을 편안하게 떠올리고 있으니까. 그게 자신의 미래여도 그는, 아무렇지 않다고 여기고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히, 감동적이니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사족 1. 소설을 다 읽은 후 너무나 당연하게!! Eduard Limonov를 찾아보았다. 여러 페이지가 나왔는데 그 중 두 개만 링크해 본다. 하나는 리모노프와 격렬하게 사랑했던 나타샤에 관한 페이지 : http://ex-soviet.blogspot.kr/2006/11/natalia-medvedeva.html 다른 하나는 리모노프의 사진이 청년 시절부터 노년 시절에 이르기까지 쭉 올라와 있는 페이지 : http://www.tout-sur-limonov.fr/222318826 리모노프의 연인이었던 여인들의 얼굴도 모두 볼 수 있고 소설에서 언급된 엘레나와 리모노프의 사진도 올라와 있다. 리모노프의 누드 사진도 ;ㅂ; 엘레나와 리모노프의 '그' 사진만 올려 보면,


설마 음란물로 신고당하진 않겠지;



사족 2. 리모노프의 표지는 소설리스트(www.sosullist.com)의 2015년 세 번째 표지갑으로 선정된 바 있다. (표지갑이란 그 주에 나온 소설 중 가장 표지가 훌륭한 책을 뜻한다) 디자이너는 Fallk Nordmann이라는 분. 소설리스트에 링크된 그분의 웹사이트에 가 보니 작업하신 여러 책 표지가 올라와 있었다. 거기서도 리모노프는 눈에 띄었다. 웹사이트 주소는 http://falknordmann.de/illu/buch/falk-nordmann-buch.html


사족 3. 박노자 씨의 비굴의 시대에 리모노프의 활동을 국내 NL과 비교하는 부분이 있었다(리모노프를 다 읽은 후에 알았다. 읽어봐야겠다). 박노자 씨는 '두긴이 당을 떠난 뒤로 민족볼셰비키당은 한국이나 남미나 중미의 좌파 민족주의의 전형에 가까워졌다'며 에두아르드가 대통령 선거 출마 때 내걸었던 공약을 제시하고, '지금 러시아의 여러 반독재 민주화 운동 세력 중에서는 리모노프의 무리야말로 가장 대중적이고 서민적이며 열정적이고 자기희생적'이라고 평가했다. 오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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