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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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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팟캐스트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한 가수가 공연을 하러 갔는데 공연장에 어려 보이는 관객들이 많더라고. 몇 살인지 물어봤더니 열 다섯 살이란 대답이 돌아왔다고. 그 대답을 듣고 나니 이 관객들이 이제까지 살아온 만큼을 더 살아도 지금 내가 살아온 것보다 많이 산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도대체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온 건가 싶어 아찔했다고. 


지평을 읽는데, 이상하게 그 얘기가 자주 떠올랐다. 그와 몇 살 차이나지 않는 나도 자주 내가 너무 오래 살아왔구나 싶어 아찔함을 느끼기 때문일까. 희미해진 날짜들, 장소들, 얼굴들, 소리들, 냄새들이 이 긴 시간 속에 묻혀 있겠지. 그만큼의 날짜들과 장소들과 얼굴들과 소리들과 냄새들을 앞으로도 기억해야 할 지 모른다는 게 문득 버겁게 느껴지곤 한다.



2. 소설 속의 시간은 잔뜩 주름져 있다. 주름 사이사이에는 잊었던 이름들이 묻혀 있다. 메로베, 즐거운 도당, 세르슈 미디 가, 리슐리외 대행사, 세비녜 호텔, 이본 고셰, 꼬맹이 페터…수많은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이. 질질 늘어난 현재는 잔뜩 구겨져 있다. 뚝뚝 토막난 과거는 현재 주변에 흩어져 있다. 보스망스는 수첩에 메모를 하며 과거의 조각들을 모은다. 될 수 있었거나 되지 못한 것들을 생각하며 현기증을 느낀다. 너무도 많은 길이 나타나는 까닭에 어디를 골라야 할지 몰라 당황하게 되는 그런 시기를 떠올린다. 지금의 내가 때때로 열 넷의 나를, 열 일곱의 나를, 스물의 나를, 되새기는 것처럼. 그 때 내 주변에 있었던 이름들을 찾으려 애쓰는 것도 어쩌면 그와 같을까?

 

그리고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를, 마르가레트 르 코즈를, 찾아 헤맨다. 한때는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자취를 찾아 다닌다. 빨간 머리에 매정한 눈빛을 가진 여자와 환속한 신부의 꼴을 한 남자를 피해 다니던 자신이 부아야발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서리치던 그녀와 거리를 걷고, 페른 교수의 집에 가고, 푸트렐 박사와 점심을 먹고, 페터와 더불어 산책을 하던 그 때를. 그녀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살아갈 힘을 얻던 그 때를. 나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들의 이름을 알면 위험에 맞설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가 생겨나던 그 때를.



3. 삶은 녹록치 않다. 그 모든 잘못된 만남을 잊을 수 있을 것이라는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의 믿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의 한 교차로에, 보다 정확하게는 미래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한 경계에 도달한 느낌으로 자신들은 파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산속에, 앙가딘 어디쯤에 들어와 있다고 느꼈던 그들의 평온함은 일순간 깨어진다.


마르가레트는 그에게 연거푸 손을 흔들던 그날 밤 후 지평 너머로 사라졌고, 보스망스 역시 어수선한 시절을 살아가며 마르가레트를 찾지 못한다. 그러니 조만간 그녀와 새로운 지평을 찾아 파리를 떠날 수 있을 거라고, 두 사람은 자유롭다고 마르가레트를 설득하던 보스망스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보스망스의 지평에서 마르가레트는 사라졌다. 스무살에 가까웠을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들 앞에 놓인 현재는, 왜그리도 그들에게 가혹했을까.


그러니 누군가는 보스망스를 어리석다고 할 것이다. 과거에 얽매여 방황하고 있다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서로를 사랑했다고 말하지도 않고, 마르가레트가 자신의 연인이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보스망스가 왜 마르가레트를 찾고 있는지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마르가레트는 보스망스 앞에 놓여진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했었고 그 가능성은 현실의 옷을 입지 못했으니, 결국 보스망스에게 마르가레트는 한 때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4. 어쩌면 시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나온 길을 돌아봤을 때, 박제된 과거를 비집고 나온 누군가의 이름을 발견한다면, 그 이름과 맞닥뜨린 순간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벽을 서서히 통과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면, 일종의 희망이, 먼 지평을 향한 탈주로가 남아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과거의 기억에 묶여 지평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살아남은 기억 그 자체가 어쩌면 나의 지평이자 미래인지도 모른다고.


그러므로 보스망스는 과거에 얽매여 어리석은 방황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믿는다. 그의 삶은 마르가레트를 찾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을테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던 마르가레트를 기억 속 어딘가에서 끄집어내 찾아낸 사람은 결국 보스망스였고,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 보스망스는 자신이 떠나온 그 장소 그 지점으로 같은 시간 같은 계절에 돌아온 것이니까.



5. 로드 밀러의 안부를 가지고 마르가레트의 서점을 방문한 보스망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반은 깨고 반은 잠든 듯한 상태로 부유하듯 걸어 가는 보스망스의 뒷모습을 상상해 보며 생각했다. 밤늦도록 문을 열어둔다는 마르가레트의 서점이,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가 젊은 날 함께 있던 구 사블리에 출판사의 서점 같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들이 태어나던 그해에도 공원 저 구석 폐허 사이에서 꽃을 피웠던 라일락의 향기가, 그들의 재회에 가득했으면 좋겠다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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