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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아이 ㅣ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2월
평점 :
무언가를 소중히 여겼던 추억.
무언가를 좋아했던 추억.
사람은 그런 기억들에 의해 지켜지며 살아간다.
그런 기억이 없는 사람들은 서글프리만큼 간단하게 검은 손을 등에 짊어지게 된다.
(74쪽, '지요코' 중)
...<눈의 아이>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을 다 읽고 내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결국 이 이야기들은 검은 손을 등에 짊어진 사람과 짊어지지 않은 사람에 대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눈의 아이'나 '성흔'의 서술자가 검은 손을 등에 짊어진 사람이라면, '장난감'의 구미코나 '지요코'의 서술자는 짊어지지 않은 사람이겠지, 당연히. '돌베개'의 아사코와 이시자키가 좀 헷갈리긴 하는데, 안 짊어진 사람에 가깝겠지? 결말을 보면 말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과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데도, 많은 사람들은 발작적으로 과거에 얽매이는 건 나쁜 거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맨날 옛날 얘기, 좋았던 때 얘기, 다 빛바랜 케케묵고 먼지묻은 얘기 끌어안고 사는 게 무슨 의미 있냐고 시니컬한 표정으로 묻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진취적이고 능동적이며 사회와 시대가 원하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 오래된 것, 철없던 시절에 낭비하고 소비했던 것에 집착하지 말고 앞날, 새로운 것, 실용적이고 생산적인 그 무엇을 추구해야 한다고 눈을 빛낸다. 과거에 이랬네 저랬네 하는 사람 치고 현재를 의미 있게 사는 사람 없으니 잊을 건 빨리 다 잊고 새로운 걸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자못 비장하게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들도 많다.
부분적으론 맞는 말이다. 고루하고 융통성 없어 생각과 사상이 낡아빠진 사람들을 보면 나 역시 답답하고 짜증스러우니까. 이 순간의 나를 딱딱하고 획일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낡은 것은, 잊혀져야 할 것들과 동의어일 테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시간은 흘러가니까, 결국 나의 현재란 아까 전 나의 미래일 뿐이고, 그런 의미에서 나의 과거란 '바로 지금'이 아닌, 내가 살아온 모든 순간이라고 한다면, 그 모든 순간이 잊혀져야 할 건 아니지 않나. 심지어 내게 올지 안올지도 모르는 미래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가치와 의미를 위해 버려야 할 것은 더더욱 아니고.
결국 지금을 살아가는 나를 지탱해 주는 건, 앞으로 올지 안올지도 모르며 좋아질지 나빠질지 장담할 수도 없는 미래보다는 무언가를 아끼고 사랑했던 과거의 기억, 그 따뜻했던 순간에 대한 추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런 기억이나 추억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 사람은 현재를 열심히 신나게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런 기억이나 추억이 내 삶에 더 많이 생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불투명한 미래의 무게로 힘들고 지치려고 할 때 나를 잡아주는 희망, 일, 테고.
'눈의 아이'의 '나'에게도, '성흔'의 '나'에게도, '지요코' 속 인물들이 가진 지요코가, 건담이, 곰 인형이 있었다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검은 손에 휩싸여 내 세계의 법칙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도 아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괴물이 되는 일은 안 일어나지 않았을까. 무언가를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히 보살피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그 무언가에게 '내가 잘 해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잘 되는' 건 그 무언가가 아닌 우리 자신이 되어가니까.
그래서, 누구나 마음 속에 지요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있다.
그 지요코가 더 나를 잘 지켜줄 수 있게, 나 역시 내 세계의 접점들을 잘 보살피고 소중히 다루어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해 봤다. 검은 손에 휩싸이지 않게. 누군가의 지요코를, 쉽게, 아무 생각 없이 해치지 않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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