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캡틴
로베르트 슈벤트케 감독, 맥스 후바쳐 외 출연 / 노바미디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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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캡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처구니 없지만, 비이성, 광기의 시대에서는 나타날 수밖에 없는 블랙 코미디. 영화는 매우 역설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입장에서 독일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고 있다. 마치 '세르비안 필름'처럼 세르비아인 감독이 자기 나라에서 저지른 폭력을 포르노에 빗대어 고발하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 헤롤트가 우연히 발견한 장교복을 입으면서, 제복의 힘에 경도되는 과정과 인간성이 파괴되는 과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45년 4월, 헤롤트 일병은 탈영한다. 영화에서도 잘 드러나듯, 이 시기에 독일군 탈영병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전쟁 끝무렵이니 완전히 수세에 몰린 독일군이 계속 후퇴하고 있었고, 여기서 죽는 건 그야말로 개죽음이라고 생각한 병사들이 하나둘 탈영을 시도했다.

독일 헌병대에서는 이렇게 탈영한 군인을 잡아들이거나 즉결 처형하기도 했는데, 이 와중에 헤롤트 일병의 실화가 발생한다. 헤롤트는 탈영을 하지만 당장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막막하다. 그러다 우연히 길가에 세워진 군용 짚차에서 트렁크를 발견하고, 그 안에 공군 대위의 제복과 군화를 비롯한 훈장 등 완벽한 세트를 발견한다.

고작 스무 살의 어린 헤롤트였지만, 이미 1년 정도 전방에서 전투에 참전했었고, 초반에는 매우 영웅적인 군인이어서 '철십자훈장'을 받을 정도로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그런 헤롤트가 어떤 이유에서 탈영을 한 것인지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리지만 이미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철십자 훈장까지 받은 경력을 보면, 나름 배짱도 있고, 머리도 있는 인물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헤롤트는 장교 군복을 차려 입고, 스스로 장교가 된 것으로 자기 최면 및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는 탈영병을 모아 '헤롤트 부대'를 만든다. 그는 후방을 다니며 마주치는 탈영병을 규합하고, 농가에서 밥과 술을 얻어 먹으며 다니는데, 탈영병을 추적하는 헌병대를 만나 위기에 놓이지만, 헤롤트는 자기가 '최고지도자'의 직접 명령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큰소리 치며 위기를 넘긴다.

헌병대 대위와 함께 탈영병들이 잡혀 있는 임시수용소에 도착해 수용소장 쉬테의 환대를 받는다. 쉬테는 탈영병들을 죽이고 싶지만, 그럴 경우 자신이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불만만 터뜨리고 있는데, 헤롤트가 쉬테에게 '총통의 특명'을 받고 있으니 자신이 직접 탈영병들을 처리하겠다고 큰소리 친다.


헤롤트는 단지 자신이 살기 위해 공군 장교 노릇을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장교가 되었다는 확신에 차서 말하고 행동한다. 그가 일병이었을 때라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판단과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탈영병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쥐게 되면서,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여기서 벌어지는 상황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헤롤트와 그의 부대가 탈영병 약 90여 명을 대공포로 살해한다. 탈영병이라 해도 같은 독일인이고, 전선에서 함께 싸운 전우들임에 틀림없으며, 헤롤트 자신도 탈영병이었던 걸 생각하면, 헤롤트는 자신이 탈영병이라는 죄의식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더 극단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헤롤트가 갑자기 장교복을 입고, 장교의 권력을 갖게 되면서,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폭력을 휘두르게 된 것이다. 이때 헤롤트의 본성이 잔혹하고 폭력적이었는지, 아니면 그동안 전투를 통해 선량한 청년이었던 헤롤트가 점점 괴물로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른 하나는, 헤롤트의 행위가 자신이 의식하지 않고 있어도, 독일군이 같은 독일군을 살해한다는 점에서 나치의 폭력성, 전쟁광 히틀러와 독일군의 야만성을 풍자하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헤롤트의 광기는 순박한 청년이 전쟁에서 미쳐가는 과정과 함께, 당시 1차,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광기와 폭력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아이러니한 사건은 뒤에서 발생한다. 탈영병들을 살해한 헤롤트와 그의 부대는 신고를 받고 들이닥치 육군헌병대에 체포된다. 헤롤트도 이 과정에서 체포되며 그가 장교가 아닌, 일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헤롤트는 군사법정에 서게 되는데, 재판장은 장교사칭, 탈영병 학살의 죄를 물어 사형을 집행하려 하지만, 다른 장교가 헤롤트의 행동은 독일군인으로 충분히 할 수 있었던 행동이며, 독일이 전쟁에서 져도 나중에 독일군의 일부는 비밀 저항조직을 만들어 적들과 싸울 것이며, 이때 헤롤트 같은 군인이 필요한 인재라고 옹호한다.

독일의 군부는 연합군에 패배한 다음에도 어떻게든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헤롤트 같은 인물을 독일군의 훌륭한 인재라고 생각할 정도라면, 독일군부는 히틀러처럼 이미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작동하지 않는,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영화는 헤롤트가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무사히 탈출해 숲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실제 헤롤트는 그로부터 얼마 살지 못하고 참수형을 당한다. 전쟁에서는 살아남았지만, 독일이 패하고, 헤롤트는 항구도시이자 해군주둔지인 빌헬름스 하펜으로 가서 굴뚝청소부로 일하며 살았다. 그가 욕심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살았다면 아마 늙어죽을 때까지 살았겠지만, 1945년 5월에 빵을 훔치다 영국 해군에게 체포된다. 당시 영국 해군은 이 지역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단지 빵을 훔쳤다는 가벼운 죄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헤롤트는 자기가 군인이었을 때 저질렀던 장교사칭과 탈영병 학살까지 모두 밝혀졌고, 영국 해군은 헤롤트를 끌고 수용소가 있던 아셴도르퍼모어의 수용소 부지로 이송되어 학살당한 장소에서 195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영국 해군은 헤롤트와 그의 부대원들을 검거했고, 모두 여섯 명이 체포되어 다시 재판을 받았다. 이 가운데 다섯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헤롤트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1946년 11월 29일, 볼펜뷔텔 교도소에서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선고받고, 모두 참수되었다. 

이때 헤롤트의 나이는 불과 스물 한 살. 전쟁이 헤롤트를 괴물로 만든 것일까, 아니면 헤롤트의 내면에 있던 괴물이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튀어나온 것일까. 권력을 가진 자가 광기에 휩싸이기 쉽고, 이성을 잃으면 얼마나 위험해지는가를 헤롤트의 행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직 어리기만한 헤롤트는 그래서 더욱 쉽게 권력의 노예, 권력의 광기에 영혼을 빼앗겼을 수 있다. 당시 독일 전체가 이미 미쳐버렸고, 나치의 광기에 휩싸인 뒤여서 청년들의 생각도 그렇게 세뇌되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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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0-08-22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진짜 재밌게 본 영화. 광기에 미쳐가는 사회를 아주 잘 봤죠.

마루프레스 2020-08-22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실제 일어난 일이어서 더욱 충격인 영화입니다.
 
쓰리 몽키스
누리 빌게 제일란 감독, 하티스 애슬랜 외 출연 / 야누스필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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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몽키스


'윈터 슬립'을 보고 이 감독이 누구인지,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 찾아보았다. 누리 빌제 세일란. 터키 영화감독이다. '윈터 슬립'은 따로 리뷰를 쓰기도 했지만, 마치 영화로 보는 또스또예프스키라고 할 정도로,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음에도 긴장감이 대단했던 영화다. 그것은 오로지 대화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철학적이면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날카로운 공방이었는데, 이 영화 '쓰리 몽키스'에서도 감독의 철학적 고뇌를 읽을 수 있다.

부유한 기업가이자 정치가를 꿈꾸는 세르빗은 어느 날 운전을 하다 사람을 치어 죽인다.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세르빗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되므로, 자신의 운전기사로 일하던 이윱에게 사고의 책임을 떠안는 대신, 감옥에서 나오면 한몫을 주겠다고 회유한다. 가난한 이윱은 아내와 아들을 위해 세르빗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대신 감옥에 간다.

이윱의 아들 이스마일은 자동차를 구입하고 싶어한다. 차를 사면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다고 엄마 하레스에게 말한다. 그러면서 세르빗이 아버지에게 줄 돈을 미리 받을 수 없느냐고 묻는다. 하레스는 세르빗을 찾아가고 그와 불륜을 맺는다.

감옥에서 나온 이윱은 약속대로 세르빗에게 큰 돈을 받는다. 세르빗은 지방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개의치 않는다. 이윱은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사이, 세르빗이 살해당하고, 아내 하레스와 세르빗이 간통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다. 


하레스는 왜 세르빗을 일부러 찾아갔을까. 전화로만 요구하고 아들 이스마일이 돈을 받아와도 충분한 일이었고, 이슬람 사회에서 - 비교적 자유로운 터키라 해도 - 여성이 일부러 찾아가 만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 아닌 다음에는 얼굴을 맞대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아는데, 하레스는 세르빗을 만나고, 쉽게 육체관계를 맺는다. 이건 하레스가 의도하지 않았다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뒤로도 세르빗이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하지 않고 단절하자고 했을 때, 하레스는 세르빗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떠나지 말라고 애원한다. 하레스는 지금의 삶 - 이윱과 아들 이스마일과의 삶 - 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는 지금의 궁핍하고 답답한 삶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이 있다. 그것을 드러낼 수 없는 사회적 억압을 느끼고 있으며, 이슬람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의 삶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그런 구조적 억압 아래 살아가는 여성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하지만, 그와 함께 개인이 갖는 순수한 욕망 또한 언급해야 한다.

어느 사회나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갖고 자신이 놓여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태도이기도 한데, 문제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욕망의 크기만 큰 사람이 보여주는 태도의 역겨움이다. 

배우지 못한 사람이 고고한 지식인 흉내를 낸다던가, 가난한 사람이 부자의 사치를 흉내 내는 것은 스스로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짓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준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하레스도 그런 도착적 욕망의 하수구에 빠진 여성으로 보인다. 하레스가 단순히 '육체적 욕망'만을 충족하기 위해 세르빗을 유혹했다고 보진 않는다. 세르빗은 성공한 사업가이고, 정치가이며 하레스가 보기에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남성이다. 반면 이윱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남편이다.

반면, 하레스는 비록 가난한 남편과 살지만 미모가 뛰어난 여성이다. 젊었을 때부터 미인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하레스는 그러나 가난한 남자와 결혼했다. 자기처럼 미인이라면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런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하레스를 괴롭게 하는 원인이다.


아내 하레스가 자기를 감옥에 가라고 한 세르빗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윱은 내색하지 않는다. 아니, 갈등한다. 자기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세르빗이 살해당한다. 누가 세르빗을 죽였을까. 세르빗의 차를 운전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으면서, 이윱은 경찰이 알려준 강력한 단서를 듣게 된다.

집안은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이 흐르고, 이스마일은 자기가 세르빗을 살해했다고 엄마 하레스에게 고백한다. 한밤중, 잠에서 깬 이윱은 옥상에서 아내가 자살하려는 모습을 보지만 그것을 숨어서 지켜보기만 한다. 아니, 그것은 이윱의 환상이거나 상상이다. 하레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던 것이다. 아니, 이윱은 그런 자기의 바람을 아내 하레스에게 직접 말한다. '가서 잠이나 자, 아니면 뛰어내리던지.' 이렇게 말하지만, 그는 그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고 있다. '바보처럼 굴지 마, 거기서 내려 와.' 이윱은 하레스를 용서한다.

이윱도 아들이 세르빗을 살해했다는 말을 듣게 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깊은 밤, 인적이 끊긴 골목, 밝은 전등 아래 홀로 서성이는 이윱의 그림자가 짙다. 그는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하고, 오래 망설이다 평소 알고 지내던 청년 바이람을 찾아간다. 찻집에서 일하며 돈을 벌고 있는 바이람은 돈을 벌어 찻집을 열고 싶어한다. 이윱은 감옥에 갔다오면 한몫 챙겨주겠다고 제안한다.

이윱은 옥상에 올라 먹구름 사이로 치는 번개와 천둥소리를 들으며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넋을 놓고 바라본다. 굵은 빗줄기가 퍼붓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두 사람이 굳은 결심을 할 때 이슬람 사원을 찾는다. 이스마일이 세르빗을 살해하기 전, 이슬람 사원을 찾아 깊이 생각하고, 이윱이 바이람을 찾아가기 전, 역시 사원에 들러 오래 생각한다. 두 사람은 모두 알라신의 뜻을 알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가 그들 자신의 의지로 결행되는 사건이다.

사건의 흐름과는 관련이 없다고 보여지지만, 이 가족에게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존재가 있다. 고통스러워 하는 이윱의 등 뒤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어린 아이. 불과 서너 살에 세상을 뜬 이스마일의 형이자 장남이다. 이름도 나오지 않는 그 어린아이의 존재는 이 세 명의 식구를 붙들고 있는 강력한 원심력이기도 하다.

세 명 가운데 적어도 이윱은 어릴 때 죽은 아이를 내내 마음에 묻고 살아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 자체가 이미 커다란 비극이지만, 이윱은 어디에서 비극이 시작되었는지 어렴풋하게 느낀다. 아내 하레스의 불륜도, 아들 이스마일의 범죄도 모두 자기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그의 앞날이 저 마르마라해, 에게해에 드리운 먹구름과 천둥, 번개처럼 무겁고 두려운 것이라는 걸 이윱은 잘 알지만, 그 앞에서 오로지 침묵하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견뎌내는 것임을, 오로지 침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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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슬립
누리 빌게 제일란 감독, 할룩 빌기너 외 출연 / (주)영화사 백두대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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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영화. 별 다섯 개. 

국내 개봉에서는 3시간 18분이지만, 원래 영화는 3시간 59분짜리로, 훨씬 길다. 나중에 DVD나 블루레이로 삭제하지 않은 내용을 모두 보고 싶은 영화. 또 반드시 그래야 할 영화.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인물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도스또예프스키였다. 이 영화의 감독은 터키 사람이지만,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서사를 보면 러시아 정서와 매우,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지성과 감정, 욕망, 이기, 분노, 절망에 관한 것이다. 어느 나라, 어떤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해당할 수 있는 감정의 변주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고 있다.

특별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시간이 대화로만 이루어지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고, 대화에 몰입할 수 있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지루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개인마다 크게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나에게 이 영화는, 주인공 아이딘을 통해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아이딘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면들, 허영심, 우월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글쓰기, 지극히 보수적인 태도, 자신보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위선, 늘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분위기...

주인공 아이딘과 그의 여동생 네즐라와 서재에서 나누는 이야기와 아이딘이 아내 니할과 나누는 이야기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자,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다.

아이딘이나 네즐라는 모두 지식인이다. 그들은 교육을 많이 받았고, 지성인이며 사회에서는 상류층에 해당한다. 아이딘은 연극배우도 했었고, 책도 쓰고, 신문에 기고도 하는 지성인이지만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호텔도 운영하고, 시내에 집과 상가가 여러 채 있는 부자이기도 하다.

네즐라는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오빠의 집에 들어와 살고 있는데, 호텔 운영에 도움을 주고 있지만 딱히 눈에 보이는 일을 하지는 않고 있다.

아이딘의 아내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젊은 여성으로, 독립적인 생각을 하고 있지만 현실은 무기력하다. 세 사람의 입장은 모두 자신이 놓여 있는 상태 때문에 미묘하게 다르고, 그것이 각자의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여기에 아이딘의 건물에서 월세를 살고 있는 가족이 등장한다. 사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아이딘의 시각으로 보여질 뿐이다. 하지만 영화를 조금 해체해서 각 등장인물의 방향으로 조금씩 돌려보면, 이 영화가 말하는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가난한 노동자가 자본가의 집에 세를 얻어 살고 있다. 하지만 가장은 아내를 성추행한 못된 놈들을 응징하다가 감옥에 갇혀 6개월 징역을 살고 나오고, 그 때문에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다.

월세가 밀리자 집주인인 아이딘을 대신한 변호사와 대리인이 월세를 독촉하고, 집기를 가져간다. 그 행동을 모두 지켜본 노동자의 아들이 어느 날, 아이딘이 타고 있는 자동차에 돌을 던져 유리창이 깨진다. 상황은 그때부터 달라진다.

월세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노동자의 입장에서, 한겨울에 쫓겨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시간을 더 달라고 부탁하는 건 당연하다. 물론 법대로 한다면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세를 사는 사람-정확히는 아이의 삼촌-이 아이딘의 호텔까지 찾아와 호소를 하지만 아이딘은 자신은 잘 모르는 일이니 변호사와 이야기를 하라고 책임을 떠넘긴다.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아이딘의 태도는 분명 이기적이며 자신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 아이딘을 바라보는 여동생 네즐라는 그의 태도를 매우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네즐라가 바라보는 아이딘은 위선적인 인간이다. 종교도 없으면서 종교적 태도에 대해 말하고, 보편적인 내용만을 글로 쓰며, 교훈적이고 보수적인 내용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말도 많고, 여기저기 참견도 많이 하며, 아는 척, 잘난 척을 하는 인간이다.

아이딘으로서는 매우 억울한 말이지만, 동생이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는 것을 아이딘이 모를 리 없다. 아이딘 역시 이혼하고 집에 와서 생활하는 여동생의 태도를 비난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아이딘과 그의 젊은 아내 니할과 나누는 대화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드러난다. 아이딘은 자신이 누리는 기득권을 공기처럼 누리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무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딘의 여동생이나 아내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이딘이 가지고 있는 부유한 환경에서 안락하게 기생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은 중요하지 않고 또 그것을 가릴 기준도 없다. 사람은 저마다의 입장과 시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부닥치면, 극한으로 치닫다가 파멸로 끝나거나 서로의 이해를 조절하고 양보해 각자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공감한다는 것은 쉬울 것 같지만 매우 어렵다. 특히 남성들이 여성들의 입장과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여성과 잘 공감하는 남성들도 있다. 하지만 남성 사회에서는 극소수여서 통계치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일 것이다.


이 영화를 다시 분석해보면, 기득권 남성, 기득권 남성에 기생하는 여성, 기득권 남성과 여성에게 착취 당하는 가족이 있다. 기득권 남성 아이딘은 자신이 놓여 있는 사회적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모른다. 그는 예의바르고, 겸손하며, 정의롭고, 친절하며, 가난한 사람을 동정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세입자와의 관계에서는 거북하고, 짜증나는 상황을 회피하고 자기의 하수인에게 떠 넘긴다. 그러면서도 말로는 온갖 지성과 양심을 떠들어댄다.

아이딘의 아내 니할은 오랜 결혼 생활을 하면서 아이딘에게 정신적 고문을 당하고 있다. 아이딘은 결코 겉으로 드러내 놓고 학대를 하지 않지만, 그가 하는 말이 곧 니할에게는 상처가 되는 것이다. 니할이 볼 때 아이딘은 허위의식으로 자신을 감추고, 이기적인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한다. 오로지 자기만 옳다는 신념으르 갖고 있으며,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다 나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아이딘의 모순된 태도를 비난하는 니할은, 월세를 내지 못하는 노동자의 집을 찾아가 많은 돈을 주려고 하지만, 그 돈을 받은 남자-감옥에 갔다 온 남자-는 그 돈을 벽난로에 던져버린다.

여기서도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드러난다. 니할이 돈을 가지고 간 것은 안쓰러운 마음에서 그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돈을 받아든 남자는, 그것을 다르게 해석한다. 월세를 독촉하고, 가구를 빼앗아 간 아이딘의 대리인들이 저지른 폭력의 대가, 아이딘의 대리인들이 자신의 가족에게 한 모욕의 대가, 그리고 아이가 받은 정신적 충격에 대한 대가, 그리고 니할의 약간의 자비심이 그 돈의 액수라고 해석하고는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돈을 태워버리는 그 남자의 행동을 이해하면서도, 몹시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지금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가족의 안위를 포기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노동자의 처지를 당당하게 보여주었다고 옹호하겠지만, 니할이 준 돈은 집을 사고도 남을 큰 돈이었다.

그 돈은 아이딘이 익명의 기금으로 내 놓은 것이고, 니할은 당장 생활이 위태로운 세입자를 생각하고, 그를 돕기 위해 가져 온 것이었다. 남자가 돈을 불태운 것은 니할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그것도 하나의 폭력이었다.

가난한 노동자의 처지지만, 남자는 남성 일반이 가지고 있는 왜곡된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계급을 뛰어 넘어, 남성성이 보여주는 천박하고 한심하고 유치한 이기심의 표현이다. 자본가이자 지성인인 아이딘이나 노동자인 남자나 모두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공감이라는 주제를 비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우리는 날마다 이 문제로 인해 다투고, 화내고, 삐치고, 울고 웃는다. 인간이 얼마나 더 진화를 해야 공감의 문제가 해결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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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레닌
볼프강 베커 감독, 다니엘 브륄 외 출연 / 영화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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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위한 지상최대의 거짓말이 시작된다...

동독의 열혈 공산당원이자 교사인 크리스티아네는 베를린 장벽 제거를 주장하는 시위대에서 아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그 충격에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진다 . 
그 후 8개월 후... 그녀는 베를린 장벽과 함께 사회주의 동독이 이미 무너진 후 의식을 되찾게 된다.
아들 알렉스는 기뻤지만 그 기쁨도 잠시, 크리스티아네의 심장이 매우 약해 조금의 충격이라도 받으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의사의 경고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엄마를 위한 아들의 지상최대 거짓말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우선 엄마가 사는 아파트를 과거 동독 시절의 모습으로 되돌려놓는 것은 물론,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엄마가 즐겨찾는 구 동독 시절 오이피클 통조림을 구하고, 급기야는 엄마를 위해 동독의 발전과 서독의 붕괴를 담은 TV 뉴스까지 친구와 함께 제작하기에 이른다. 

알렉스의 거짓말 시리즈가 매일 부풀어가는 무렵 엄마는 다시 위독해지고 알렉스에게 소원을 부탁 하는데...

 

동독의 정치체제는 공산주의 이상향을 구현한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알렉스의 엄마 크리스티아네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고, 자신이 선택한 이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레닌은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그가 추구했던 '공산주의 사회'의 이상적인 사회상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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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동막골
박광현 감독, 정재영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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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한 곳에 모인 그들

1950년 11월,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그 때...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함백산 절벽들 속에 자리 잡은 마을, 동막골. 이 곳에 추락한 P-47D 미 전투기 한 대. 추락한 전투기 안에는 연합군 병사 스미스가 있었다. 
동막골에 살고있는 여일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 소식을 전달하러 가던 중 인민군 리수화 일행을 만나게 되고 그들을 동막골로 데리고 온다. 바로 그 때, 자군 병력에서 이탈해 길을 잃은 국군 표현철과 문상상 일행이 동막골 촌장의 집까지 찾아 오게 되면서 국군, 인민군, 연합군이 동막골에 모이게 되고 긴장감은 극도로 고조된다.

목숨을 걸고 사수하고 싶었던 그 곳, 동막골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세 사람· 국군, 인민군, 연합군. 총을 본 적도 없는 동막골 사람들 앞에서 수류탄, 총, 철모, 무전기· 이 들이 가지고 있던 특수 장비들은 아무런 힘도 못 쓰는 신기한 물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쟁의 긴장은 동막골까지 덮치고 말았다. 동막골에 추락한 미군기가 적군에 의해 폭격됐다고 오인한 국군이 마을을 집중 폭격하기로 한 것. 
적 위치 확인...! 현재 좌표... 델타 호텔 4045.
이 사실을 알게 된 국군, 인민군, 연합군은 한국 전쟁 사상 유례없는 연합 공동 작전을 펼치기로 한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세 사람은 목숨까지 걸고 동막골을 지키려고 한 것일까? 

전쟁 속에서, 이념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영화. 우리의 시민정신이 조금은 성숙해진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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