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다. 어디까지 이 불길이 번져나갈지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자기 이름이 호명될까봐 전전긍긍할 남자들이 셀 수 없이 많으리라는 것. 이렇게 미투 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게 된 것은 여성들이 더 이상은 이런 불합리한 세상에 침묵할 수 없다고,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자각하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불길이 두렵고 탐탁지 않았기에 대개의 남성은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를 그토록 비난하면서 억압하려 들었을 것이다. 물론 억압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갈수록 더 많은 여자들이 페미니즘에 가까이 가고 있다. 나는 페미니즘의 안경을 더 많은 사람들이 쓰기를 바란다. 이 땅에, 아니 이 지구에 살면서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여자가 과연 존재할까?


우리는 흔히 ‘차이가 차별을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권력이 차이를 만든다. (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216쪽)


성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가진 권력의 크기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차이와 차별이 생긴다. 그 권력의 크기를 평등하게 하자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누가 더 많이 갖자는 게 아니다. 권력이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었기 때문에 성폭력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미투 운동을 통해 폭로된 자들을 보라, 연극, 문학, 방송, 연예, 영화, 학계, 종교계 등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권력자에 속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권력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피해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권력에 기생하며 자신 또한 언젠가는 그런 힘을 가진 자가 되기를 꿈꾸던 이들은 방관자가 되거나 동조자가 되었다. 만일 그 권력의 크기가 남녀에게 똑같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성범죄자들의 이름이, 그 민낯이 까발려지고 있을까?

앞서 인용한 문장은 최근 읽은 <혼자서 본 영화>의 한 구절이다. 짧은 문장임에도 여러 가지를 일깨워준다. 정희진의 문장이 늘 그렇듯이 말이다. 신간을 살펴보는데 정희진의 이름과 ‘영화’라는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완전히 흥분해서는 나오자마자 사서, 보던 책도 모두 미뤄놓고 이 책부터 읽었다. 때마침 이다혜 기자의 <어른이 되어서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를 읽은 뒤였다. 두 책의 지은이는 모두 영화광이다. 그리고 둘 모두 페미니즘의 눈으로 영화를, 대중문화를 분석한다. 분석이라기보다는 ‘감상’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는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도 떠오른다. 세 책 모두 페미니즘 눈으로 바라본 영화와 문학, 또는 대중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읽는 내내 흥미롭고 즐거웠다. 물론 가장 좋았던 책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혼자서 본 영화>이다. 순전히 정희진의 글과 사유의 과정을 내가 무척 좋아하고, 닮고 싶기 때문이다. 책을 몇 장 넘기지 않아도 나는 그의 문장과 생각에 미소 짓게 된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나는 이제 알기 위해 영화를 본다.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세상이 넓음을 알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닐까. (19쪽)

영화를 볼 때 내가 ‘마니아’를 넘어 시민으로서 윤리적, 정치적 균형을 잡도록 도와주는 정성일 평론가/감독에게 감사한다. (23쪽)


이 책 서문에 해당하는 글에서, 정성일 평론가에게 감사를 전하는 저 말에는 나도 모르게 밑줄을 그었다. 나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한 영화와 관련한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 책에서 정희진이 언급한 영화들은 나도 거의 본 작품들인데, 그럼에도 그의 눈을 통해 다시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나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여러 번 감탄하다. 나는 아마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알고’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할 것이다. 정희진의 글은 그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언제나 내가 이런 경험을 하게해준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인간관계다. 사랑은 그중에서 가장 치열한 관계다. 사랑은 모호한 개념이고, 계산할 수 없는 노동이며, 돌변하는 퍼포먼스다. (35쪽)

‘필요’가 ‘사랑’이 되려면 윤리가 필요하다. [....] 사랑 이전에 윤리. 윤리는 정치학이고 사회 정의다. 윤리는 상대를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39쪽)

섹스나 외로움이 중산층만의 문제라고 보는 것은 계급 차별적 편견이다. (44쪽)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마조히즘이 있다고 강요하지만, 여성이 마조히즘을 선택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59쪽)

매 순간 변하지 않는 것, 움직이지 않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관계와 감정은 변화하고 발전하고 진화한다. 그리고 퇴화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을 사랑한다.  (68쪽)

타인의 손을 잡는 것이 내 영혼에 사슬을 감는 행위여서는 안 된다. (71쪽)

사람은 사상, 사랑, 권력으로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만이 변화시킬 수 있다. (110쪽)


영화를 보면서 이런 문장을 뽑아낼 수 있다니. 나와 똑같은 영화를 봤는데도 그런 영화를 통해 정희진이 느끼고, 깨닫고, 생각하는 과정은 한없이 깊고 날카롭다. ‘페미니즘적 시각’이라고 하면 지나치게 그런 시선으로만 영화를 해석하는 건 아닐까 오해할 수도 있지만, <혼자서 본 영화>는 한 영화광의 꼼꼼한 영화읽기로 봐도 무방하다. 영화를 무척 좋아하며, 다양하고 깊이 있게 보는 사람이 자신의 상처 또는 기억과 맞물려서 써내려간 솔직하고도 내밀한 감상이랄까. 그래서 나는 이 책이 더 즐거웠다. 여성주의적 사고의 확장은 덤이라고나 할까.

이 책을 보면 틀림없이 여기 언급되는 영화들을 보고 싶어질 것이다. 나 또한 몇몇 작품은 다시 또는 새롭게 볼 생각으로 제목을 적어두었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은 마음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여태껏 보지 않았던 작품인데, 이제는 정말 봐야겠다. ‘메릴 스트립’의 작품도 보고 싶어졌다. 때마침 요즘 극장가에서 그녀가 주연한 <더 포스트>가 개봉했는데 그것부터 볼까. 내 인생의 영화 중 하나인 <타인의 삶>은 다시 봐도 또 울게 될 것이다. 영화와 관련한 가장 좋은 책은 이렇게 영화를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 아닐까. 정희진의 <혼자서 본 영화>가 바로 그렇다. 그것도 왠지 늦은 밤, 홀로 극장을 찾아 최대한 사람과 멀리 떨어져서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든다.

<혼자서 본 영화>가 나를 지적으로 자극하고 깨우치게 했다면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는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내 또래가 쓴 대중문화 읽기라, 매우 공감하면서 때로는 이런저런 추억에 젖으면서 읽은 책이다. 물론 이 책 또한 내가 간과했거나 익숙하게 젖어있던 사고나 세계관을 깨뜨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다혜 기자가 여고생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했던 말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지금 이 세계에서 꼭 필요한, 마음에 새겨둬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여성 당신은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라고, 그걸 기억하라’고-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때,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불편한 딱지나 낙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하고,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비난으로 사용할 때, 그 자리에서 대응하는 게 어렵다면 그냥 침묵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좋습니다. ‘좋은’ 분위기를 위해 상대방이 원하는 반응을 해주고 싶다는, 비록 그것이 나의 존엄을 해치더라도 상대가 원하는 나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해도 저는 그런 당신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부당한 비난에 저항하고,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 비난을 무시하는 법을 익히는 것은 여성으로서 살아가게 될 수많은 나날에 가장 중요한 생존 기술이 됩니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아주 작은 것부터 천천히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인격체입니다. 그 사실을 어떤 순간에라도 기억하세요. (이다혜,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9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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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8-02-27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땅에 여자로 태어나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기가 더 힘들지 않나?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 책 꼭 읽어봐야겠어요^^

잠자냥 2018-02-28 12:07   좋아요 0 | URL
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이따금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이면서 말하는 여자들이 있더라고요. ㅎㅎ 이 책 꼭 읽어보세요. 참 좋았습니다.

케이 2019-01-21 1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말동안 ‘혼자서 본 영화‘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저는 못본 영화도 꽤 많았는데 언급한 영화를 안봤어도 읽고 사유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더군요. 정희진 선생님도 사실 잠자냥님 덕분에 알게 됐는데 너무 공감가는 구절이 많아서 (특히 ‘질투는 나의 힘‘ 에 나오는 모든 구절) 종종 찾아서 읽을 거 같아요.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9-01-21 13:31   좋아요 1 | URL
영화와 관련한(책도 그렇지만) 책 중에서 정말 좋은 책은 그 비평 대상이 되는 영화(책)를 잘 몰라도 그 영화를 마치 본 것처럼 생각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게 해주는 책이 아닐까 싶어요. 또 그 영화(또는 책)를 찾아보고 싶게 하는 힘을 지녀야 하고요. 그런 면에서 정희진 선생님 글은 독자를 언제나 그렇게 이끌어주지요.

사실 정희진 선생님은 기회가 닿는다면 꼭 한번 강연을 들어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네요. 말씀을 얼마나 재미나게 하지는지(그러면서도 물론 또 얼마나 사유의 확장을 열어주시는지!) 정희진 선생님 강연은 무조건 강추합니다.

그리고 정희진 선생님 저작 중에 단연코 한 권만 추천하라고 한다면 <페미니즘의 도전>을 꼽겠습니다. 이 책은 틀림없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앎‘과 다른 진정한 ‘앎‘의 세계로 이끌어 줄 거예요. 제 조카가 이번에 대학생이 되는데, 이 책을 성인 시절 첫 책으로 선물하려고 해요. 케이 님도 꼬옥 읽어보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