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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평점 :
품절
오늘도 후기 적기 참 애매한 책.
그래서 결국 그냥 수다다. 잡생각이라고 생각해줘.
번역가 이윤기는 안다. 의외로 안다. 영국에서 자라면서 한인 커뮤니티와는 전혀 동떨어진 생활을 하였으니 한글로 된 책을 볼 일이 없었다. 반면 어머니는 10년 이상 자신에게는 객지인 영국에서 살면서 영어 한 마디도 늘지 않았을 정도로 한국 커뮤니티에만 지냈다. 그래서 아주머니들 사이에 인기 있는 한국 드라마나 잡지 등을 서로 나눠 읽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근데 놀랍게도 그 중 유일하게 본 한국 책이라곤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였다. 읽어본 적도 있었다. 한국어를 사실상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영국에 들어와서 다시 중학교 때 다시 시도를 했지만 “아니… 이걸 영어로 읽으면 하루도 안 걸리는데 왜 수 개월을 한국어로 읽어야 하는지- 한국의 이야기도 아닌 걸…”하고 불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는 이윤기 번역가의 스토리텔링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화란 수 천 년을 거슬러 내려온 이야기를 마치 처음 이야기 했던 설렘 그대로 보존한 채 이야기한다는 신빙성 있고 맛깔 나는 어조가 가장 중요하다. 어머니는 이윤기 번역가의 그러한 번역이 좋았나 보다. 이남호 평론가의 이야기대로 이윤기 소설의 언어는 투명하고 … 그 언어 자체가 스스로 맛을 풍긴다. 한국 현대 최고의 글쟁이라 불리는 이윤기 번역가는 그래도 처음 알게 된 한국 작가였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에도 나오듯이 해외 나가서 소설가라는 (novelist) 주변 이들의 소개에 장편소설 하나 안 쓴 시점에서 외국인을 당혹스럽게 했던 그 와중에도 분명 Char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그의 책으로 인식했다. 괴담을 좋아하는데 올 여름에도 어김없이 유명한 온라인 괴담 번역가가 책과 E북을 출간하는 소식을 접했는데 그 중 조금 날랐던 일이 있다. 번역은 했다만 사실 다른 이들의 글인데 정확한 출처도 없이 단지 인터넷에 올려졌다는 이유 하나로, 그리고 아마 딴 나라이기 더더욱 원작자의 허락 없이 자신이 번역했다는 이유 하나로 자기의 책으로 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글 상당수는 단순한 도시괴담을 쓴 것이 아닌 실제로 누군가가 자신의 글로 적은 것을 본인이 번역하며 적당이 보완한 수준이지 모든 글을 자신이 할머니에게 들은 괴담을 되짚으며 정리한 것이 아니다. 대단히 기분이 씁쓸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주변에게 자신을 작가라고 소개할까? 글을 쓰는 사람으로도 소개하기 민망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윤기의 번역에는 그토록 감동을 하는 것일까? 남의 이야기를 옮겨 적으면 그것은 글을 만드는 행위가 아닌 것일 텐데 왜 그의 번역은 그의 소설과는 또 다른 세상을 낳는 걸까?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에서 이윤기 작가가 번역할 때는 그 글에 무게를 싣는다는 느낌으로 한다는 이야기를 읽고 많이 느꼈다. 번역의 목적은 원작자의 작품을 최대한 다른 언어와 문화권의 독자에게 적절하게 전달하고 많은 감정을 훼손 없이 전달하는데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창을 spear를 창이라 하고 shield를 방패로만 받아 적을 수는 없다. Lance와 spear가 다르다는 것을 육감적으로 알아야 하며, shield를force field로 느껴야 하는 순간이 온다. 특히 와 닿은 건 이 책의 서문인데, 이다희 번역가의 앞서 적은 이 글은 무척이나 잘 썼기에 이윤기 번역가가 뿌듯해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그 아버지의 그 딸이라는 진부한 표현은 별로겠지?
한국 식 표현이 아닌 것에 대한 이야기로 이다희 번역가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회상한다. “아마도 우리 팀이 가뿐히 승리할 것으로 보여집니다.”라는 TV멘트에 “이럴 때는 ‘보인다’고 하면 되지, ‘보여진다’고 할 필요가 없어. 응? 다희야.”
Char가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이다. 영어와 한국어는 문장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후자를 위해 영어 문장을 파괴시키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경 써서 교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툭하면 보여진다 따위의 말이 튀어나온다. 이 포스트에도 지겹도록 많을 테다.
“키가 180이 넘는 사람을 키 큰 사람이라고 하지 큰 키의 사람이라고 하지 않잖니?”
이건 영어에서도 마찬가지라 개인적으로 질색하는 것이다. 흔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취미로 글 쓰는 사람들이 고치지 못하는 이상한 버릇이다. 너무 흔한 나머지 예로 들기도 쉽다.
The very fast jet sped across the sky.
아주 빠른 제트기는 하늘을 질주했다. 모국어이고 작문이 특기다 보니 영어로 적힌 문장은 파악이 빠르다. 이를 한국어로 썼다면 저렇게 바보처럼 썼을 텐데, 영어로는 불가능하다. 제트기는 빠른 것이 함축된 단어이다. 그것이 할 행동이나 하는 행동을 말하되 독자가 예상할 수 있는 특징은 중복이 되기 때문에 있어서는 안 된다. 대신 이 제트기가 의외로 느린 속도로 가는 거였다면 문장에 충분히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영어에서도 어린 친구들이나 글을 잘 못 쓰는 이들은 자주 저지르는 실수다. 특히나 뒤에 “질주”가 나왔으니 무려 3번을 빠르다는 속도가 강조된 문장이 됐다. 물론 이러고도 훌륭한 작가는 때때로 이러한 어이없는 문장을 사용한다. 대학시절 영어작문 교수님의 말을 빌리자면 글을 잘 쓰는 A와 못 쓰는 B를 뒀을 때 and를 문장 앞에 쓰는 건 A에겐 금지고 B에겐 자유다. 글을 잘 쓰는 사람에게는 기준이 필요 없다. 솔직히 이윤기의 에세이를 읽고 리뷰를 작성할 자신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많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이렇게 적으면서도 책에 대한 이렇다 저렇다 한 후기를 딱히 남기지 않는 데는 쓰다 보면 어느새 또 책 구절 구절을 이어 붙여 소개하는 식의 알라딘 “미리보기” 페이지의 형성을 갖출 거 같아서다. 그가 소설가 보다 번역가로 유명하지만, 그래도 그의 문장력만 봐도 훌륭한 글쟁이임에는 틀림없다. 아, 그리고 참고로 제목 속 조르바란 이윤기 번역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이름이다.
(246쪽)
외국에서 자란 대학생 처조카가 방학을 맞아 어머니와 함께 귀국했다. 음식점에 가서 함께 저녁을 먹는데, 그 어머니가 갑자기 아들의 발을 철썩 소리가 나게 때렸다. 왜 그러냐니까, 어른 앞에서 조신하게 책상다리하고 앉아야지 버르장머리 없이 다리를 좌악 뻗는 것이 보기 싫었고 그래서 때렸단다.
내가 처남댁을 나무랐다.
좌식 음식점을 고른 나의 불찰이에요. 책상다리는 의자 없던 시대의 앉음새예요.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큰가요? 얘만 해도 키 186센티에 몸무게가 0.1톤, 이런 체형으로 어떻게 책상다리 하고 앉을 수 있어요? 의자를 마련해주어야지 책상다리하지 않는다고 때리다니, 곧 책상다리하고 앉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상이 온다고요.
참신하다고 해서, 진화의 징후를 보인다고 해서 내가 누리꾼들의 언어 풍습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길에서,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좔좔 외면서 자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언감생심인, 보석 같은 낱말들이 무수히 반짝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생략)
책만으로도 대략 감이 잡히는, 참 이윤기 작가다운 말이라 느껴져서 이것 하나 담아왔다. 그리고 참고로 Char의 어머니도 이러한 어머니라 지금도 그 여타 때문에 항상 벌 받는 거처럼 다소곳하게 이런 자리에서 앉아서 주변이 의아해 한다. 하지만 여기에 숨은 비밀은, 어려서부터 바닥에서 앉은 습관이 없으면 다리가 빨리 저리다. 그리고 아무리 수 십 년 연습해도 안 사라진다. 참는 것도 10분이 고작이다. 아무 것도 안 느껴질 때까지 낑낑대다가 모두 일어날 때 벽을 짚고 발을 끌면서 나가고 한참을 신발을 못 신는다. 나의 어머니는 이분처럼 찰싹 때리는 정도가 아닌 발을 차든지 꼬집어서 시꺼멓게 멍들게 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한국 떠나는 날까지는 이것은 고쳐지지 않을 것도 같다. 매가 머리를 굳히는 데는 최고니까. 어쨌든 예전의 것과 현재의 것을 언어에 있어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변화해야 하는지 궁금하면 이윤기의 말을 떠올린다. “적자인 것으로 판명된다면 생존할 것이다 (適者生存).”
참고로 (104 쪽) ‘오독과 오역을 번역가의 숙명으로’에서의 기운대로, 출파사 측에 135쪽에 영국 작가 이언 플래밍 (Ian Fleming) 의 이름이 아이언으로 오타가 났다는 걸 꼭 적고 싶다. 나중에 수정해주십사 하고… 이미 아시겠지만!
알라딘 신간평가단은 한 달에 두 권의 책을 받아 후기를 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 두 권을 본인 고르는 게 아닌 알라딘 측에서 평가단이 매달 작성하는 위시리스트의 참고 하에 임의로 지정한다. 일기를 쓰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의 차이는 이러한 위시리스트와 임의로 발송되는 책의 후기를 남길 때의 차이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내가 쓰고 싶은 것만 쓸 줄 알면 그것은 일기이고, 써달라 하는 것도 선뜻 쓸 줄 알면 글쟁이다. 하지만 역시 운과 관련된 건지는 몰라도 흥미가 적은 책을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참 쓸 말이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취미라 생각하며 눈감고 발로 쓰는 블로그조차 느낌이 팍 올 때 아니면 진도가 안 나간다. 영감이 없는 상태에서 글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은 작가에게도, 신간평가단 담당 측에도 참 미안한 일이다. 처음에 신이 났던 건 사실이지만- 글에 대한 편식이 심해서, 잘 쓰지 못한 책부터 (자신의 기준에서;;;) 지루한 책 (아, 역시 내 취향이니- 그게 그건가?)까지 하나라도 걸리면 다 읽고도 “뭐라고 써야 할지…”하며 한숨을 푹 쉰다. 농담이 아니고 게으른 것과 무관하다. 주변에 핑계 댈 필요가 있을 때가 생기면 가끔 “게을러서 그러네~ 왜 이렇게 미루는지 몰라~” 같은 평범한 소리로 오히려 그들이 웃어 넘겨주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또 쉰다. 하지만 사실 “아… 뭐라 쓸지 모르겠어. 짜증나는데?”라고 말하면 게으름 보다 더한 무책임으로 비춰질까 요즘 이게 고민이다. 워낙 동경하는 알라딘 신간평가단이라 일기로 마칠 수 없는 것이라 느껴 매달 부담에 꼬꾸라지는 걸 수도 있다. 다음 달 서적부터는 그냥 글이 나오던 안 나오던 무조건 안절부절 쓸 것 없다고 괴로워하기 보다 정말로 후딱 매를 먼저 맞듯이 끝내버려야지. 기존의 도서평을 꼼꼼하게 읽어주시고 어렵게 뽑아주신 걸 알기에 도대체 왜 알라딘 도서평만 올리려 하면 비명 소리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미친 척 하고 다음에는 그냥 한 달 내내 하루에 한 줄씩 쓰는 한이 있어도 애써야지. 정말 스스로 갑갑하다. 매달 이것 때문에 신경 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