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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다니엘 파울 슈레버 지음, 김남시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간혹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가 있지만, 그들이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1900년대 초에 한 신경병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회상록이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다니엘 파울 슈레버(Daniel Paul Schreber), 그는 독일 드레스덴 고등법원 판사회의 의장을 역임할 정도로 엘리트이자 유산 계급의 사람이었으나, 건강염려증 및 강박증으로 두 차례 치료소에 입원했습니다. 이 책의 이야기는 두 번째로 입원한 후 7년동안 그가 겪었던 일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을 학문적 관찰 대상으로서 전문가들의 판정에 맡기고자 이 책을 출간하였다고 합니다. (p.332)


슈레버의 편집증적 망상체계

   다니엘 파울 슈레버에 따르면, 그는 세상이 멸망해가는 세대에 신의 선택을 받았고 신과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몸 전체가 쾌락신경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신경에 흡입력이 있어서 여러 영혼의 조각을 가지고 있고 신의 일부분도 그에게 흡입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중에는 순수한 영혼과 검증된(순수하지 않은) 영혼이 있습니다. 검증된 영혼은 슈레버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슈레버가 고함을 치거나 원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도록 만듭니다. 그 영혼들로 인해 육체적으로도 많은 일을 겪어서 예전과 다른 심장을 가지게 되었고, 갈비뼈의 일부분이 산산조각나고 위가 없어졌으며 식도와 내장, 척수와 머리가 고통받는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순수한 영혼들은 신의 광선으로 슈레버를 치유해주기 때문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어도 살아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책의 처음보다 나중 부분에서 슈레버가 좀더 치유된 듯한 모습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여성화(탈남성화)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거역할 수 없게 되어버린 내 신경의 흡인력으로 인해 신은 오래전부터 내게서 떨어질 수 없도록 묶이고 말았다. 신이 내 신경에서 떨어져 나갈 가능성은 - 신에 의해 추구되는 정책은 바로 그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탈남성화가 이루어지는 것 말고는 없다. 다른 한편, 신은 세계질서에 적합한 영혼들의 존재 조건에 따라 지속적인 향유를 요구한다. 나의 과제는 일단 한 번 생겨난 세계질서에 어긋나는 관계 하에서 영혼쾌락을 가능한 한 풍요롭게 키워냄으로써, 신이 계속 향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p. 273~274


    흔히 생각하는 신경병자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슈레버는 자신이 집착하는 것 이외의 분야에 대해서는 이성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가 만들어낸 망상 세계 역시 오랜 시간 사고해온 인과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체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는 망상과 이상한 행동이 아니라면, 그의 지적 능력과 지성과 기억은 정상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슈레버의 회고록의 의의

   이 책은 슈레버의 회상록과 후기, 담당의사였던 베버 박사의 법의학 감정서, 항소이유서 및 고등법원의 판결문(금치산 판정 철회)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책의 뒷부분을 읽으면서 슈레버의 시선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관점에서 저자를 바라보며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한 사람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금치산 판정으로 하여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기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슈레버의 편집증적 망상 체계는 현대 정신의학과 정신분석 등의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로이트는 슈레버의 편집증의 원인을 어릴 적 잃은 아버지와 형에 대한 감정에서 비롯된 동성애적 소망으로 보았고, 윌리엄 니덜란드는 의사이자 교육자이던 부친의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교육에서 원인을 찾았습니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슈레버의 망상과 파시즘 체제의 구조적 유사성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p.476~478)

논리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고 괴기한 이야기가 500여 페이지에 달하여 집중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해제에 나와있는 대로, 슈레버의 문체가 복잡한 구조이고 분열증자들의 언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보니 그것을 우리 말로 옮기는 데 한계가 있어 읽기가 더욱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정신분석가들이 관심을 가졌고 영향을 받았던 슈레버의 회고록인만큼, 정신분석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그 원본인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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