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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에 대한 노왁의 의문은 이렇다. 자연이 선택한 적자(The Fittest)가 생존해 그 유전자를 후대에 퍼뜨리는 것이 진화론의 골자라면, 생명의 세계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피를 튀겨야 하는 전장인가.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표현대로 자연은 “피 칠갑을 한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는가. 세상은 온통 갈등의 장인가.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를 먼저 떠올려보자. 두 공범이 잡혀 따로 취조받는다. 네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 둘 다 죄를 시인할 경우, 한쪽만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 등이다.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하면 검사가 둘에게 중죄를 물을 근거가 없어 2년형을 받는다. 이것은 둘이 서로 협력하는 경우다. 둘 다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하면 둘은 중죄로 기소되지만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3년형을 받는다. 이것은 둘이 서로 배신하는 경우다. 한쪽이 배신하고 다른 쪽이 협력하면 배신한 쪽은 1년형을, 협력한 쪽은 4년형을 받는다. 두 범인은 사전에 협력을 모의할 수 없다. 보수 행렬(payoff matrix)이라고 불리는 선택의 표를 그려볼 때,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면 ‘배신’을 택해야 한다. 즉 둘 다 3년형이다. 상대방의 ‘선의’를 믿고 침묵을 지켰다가는 4년간 감옥에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자연 선택 역시 배신을 지지한다. 진화론의 언어를 쓰자면 “협력자는 항상 배신자에 비해 낮은 적합도(번식률)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범인이 협력해 2년형을 받고 풀려나는 수는 없는 걸까. 사실 생명은 최선의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생물이 갈등을 접고 때론 협력한다는 것은 다윈의 딜레마였다.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인간의 이타적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침팬지·사자·개미·벌의 세계에서도 종종 이타적인 행위와 협력이 관찰된다. 다윈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를 통해 풀어보려 했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1976)에서 진화의 주체는 종이 아니라 유전자이기 때문에, 종 전체의 보호를 위해선 개체의 이타적 행위가 나타날 수 있다고 봤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뒤 노왁은 변이, 선택이라는 진화의 두 가지 규칙에 협력이라는 세 번째 규칙을 덧붙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먼저 ‘죄수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우선 ‘직접 상호성’이다. “내 등을 긁어다오. 그렇다면 나도 네 등을 긁어주겠다”로 요약될 수 있는 이 방법은 생물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코스타리카의 흡혈박쥐를 조사해 보니, 밤 사이 충분한 피를 마신 박쥐는 사냥에 실패한 동료에게 자신이 빨아낸 피를 토해서 먹였다. 덕분에 매일 밤 몇 퍼센트의 성인 박쥐와 3분의 1가량의 어린 박쥐들은 피 한방울 사냥하지 못하지만, 굶어죽는 개체는 거의 없었다. 흥미로운 건 박쥐가 과거에 자신에게 피를 나눠줬던 박쥐에게 피를 더 잘 준다는 사실이다.

‘간접 상호성’은 “내 등을 긁어다오. 그러면 너의 선행을 본 누군가가 네 등을 긁어줄 것이다”로 표현할 수 있다. 직접 상호성이 개인의 경험에 기반한다면, 간접 상호성은 다른 사람의 경험까지 고려한다. 집단 내 ‘평판의 힘’에 의지해 이기심을 제어하는 것이다. 간접 상호성은 영토와 인간 관계가 확장된 대규모 사회가 출현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간 게임’은 우리의 협력이 특정 공간을 전제할 때 더 잘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조미료나 공구는 낯선 사람이 아니라 평소 안면을 익힌 이웃에게 더 쉽게 빌릴 수 있다. 이는 생명의 기원을 상상할 때도 적용된다. 비유기체 화학물이 유기체 화학물로 전환된 것은 매우 우발적이고 특정한 장소에서만 가능했다.

‘집단 선택’은 협력이 개체가 아니라 그보다 상위인 집단의 이익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진화생물학자들은 집단 선택 개념을 이단시했으나, 최근 와서는 조금씩 받아들이는 추세다. 배신자들은 개체 수준에서는 승리하겠지만, 배신자들만 모인 집단은 협력자들로 이뤄진 집단을 이길 수 없다. ‘혈연 선택’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옛말로 요약된다. 혈연 관계가 강한 이들과는 협력하기가 쉽다.

사실 협력 없이 생명은 존재할 수 없었다. 단세포 생명체들이 가깝게 어울려 하나처럼 작용하다가 고등세포가 됐다는 이론이 있다. 반면 암세포는 협력이 아닌 배신을 택한 대표 사례다. 엄청난 수준의 협력을 통해 형성된 복잡한 신체에서 암세포는 증식이라는 자신의 목적만 위하다가 신체 전체를 위험에 빠트린다.

그러나 세포나 동물의 협력을 통해 인간 사회를 설명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공격성, 이타성 등을 진화론으로 설명하는 사회생물학이 현실의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돼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의 문명은 단세포 생명체 수준의 협력을 뛰어넘는 그 어떤 수단을 통해 이룩됐다.

노왁은 인간이 가진 그 수단을 설명한다. 가장 강력한 것은 언어다. 그는 “언어의 탄생은 지난 6억년 동안 발생한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사건”이라며 “이는 최초의 생명체가 등장하면서 시작된 진화의 전개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인간 이전 생명체는 DNA나 RNA 등 화학적 유전물질로 정보를 교환했고, 원숭이 · 새 · 벌 역시 ‘언어’를 사용한다지만 그것은 인간의 언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다. 반면 노왁은 “우리가 언어를 창출했다고 믿고 싶겠지만, 이는 앞뒤가 바뀐 주장이다. 언어가 우리를 창출했다”고까지 말한다.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인간의 뇌 역시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영어 사용자를 조사해보면 여섯 살짜리 아이가 1만3000개 어휘를 쓴다. 1세부터 7세까지 익히는 인간의 단어 학습 속도를 계산하면 깨어있는 90분마다 한 단어를 배우는 셈이다. 큰 뇌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출산에도 위험하지만, 큰 뇌가 언어 사용을 도운 덕분에 인간의 삶은 더욱 정교해졌다. 무작정 공격이 아니라 말을 통한 협력이 가능해진 것이다.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역시 협력을 증진시키는 한 방안이다. ‘공유지의 비극’ 게임은 죄수의 딜레마를 변형한 것이다. 농장주 사이에 공유 목초지가 있을 때 농장주는 자신의 가축을 굳이 이곳에 풀어놓아 목초지를 과잉 이용한다. 그렇게 하면 목초지가 황폐해져서 누구에게도 이득이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노왁은 오늘날의 기후 변화도 이 같은 이유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인류가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을 유지한다면 지구가 큰 위험에 처할 테지만, 그럼에도 연비가 낮은 차를 타거나 물을 펑펑 흘려보내는 이들이 많다. 지구의 위기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전하고, ‘간접 상호성’에서 언급된 ‘평판의 힘’을 이용해 이런 행동을 자제시켜야 한다. 도요타의 인기 많은 하이브리드 자동차 프리우스는 쉽게 눈에 띄는 디자인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난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는 시민이야”라는 점을 홍보해 평판을 유지시키는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전 세계 현인의 말을 살피면 ‘도덕체계의 황금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네가 네 이웃에게 바라는 존재, 너도 그런 존재가 될지어다”(그리스 철학), “네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기독교), “자신에게 해가 된다고 여기는 그런 것들을 남에게 결코 해서는 안된다”(힌두교), “누구도 너를 해하지 못하게 하려거든 누구도 해하지 말라”(이슬람교), “네가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유교) 등의 격언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수학자가 최신의 게임이론을 동원해 현대의 진화생물학을 파고들어 얻어낸 아이디어가 옛 현인의 가르침과 비슷하다는 것은 지적인 짜릿함을 전한다.

노왁은 게임이론과 진화생물학의 결합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중 독자를 의식한 듯, 자신의 학문 여정, 현대 과학의 발전을 위해 애쓴 동료들의 에피소드, 학문 세계의 별스러운 전통도 흥미롭게 전한다. 미국의 학자 조지 프라이스는 한계에 갇혀 있던 게임이론을 자연 선택에 적용하는 업적을 보인 인물이지만, 예수의 말을 직접 들었다고 주장한 순간부터 학문 대신 사회사업에 몰두했다. 알코올 중독자를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는 결국 가산을 탕진한 뒤 자살했다. 인간의 이타성, 선함이 과연 존재하는지 결국 알아내지 못한 채로 말이다. ‘공유지의 비극’ 게임을 처음으로 설계한 가렛 하딘은 애덤 스미스식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개인은 결국 공동선을 파괴할 것이라고 봤고, 생태계가 “태어나는 모든 생명을 감당할 만한 여유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안락사를 지지했던 하딘과 그의 아내는 62번째 결혼기념식을 마친 직후 자살했다.

책의 제목은 <초협력자>(Supercooperators)지만, 정작 ‘초협력자’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다. 단지 인간은 ‘직접 상호성’ ‘간접 상호성’ 등 협력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을 모두 사용하는 유일한 종이기에, ‘초협력자’라고 불릴 수 있다고 말하는 정도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은 지금까지의 분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앞으로의 염원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좋겠다.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요즘 대선 정국의 가장 뜨거운 유행어가 된 경제민주화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밝힌 <한국 경제론의 충돌>도 함께 읽어볼 만하다. 저자는 오랫동안 재벌 타파를 외쳐 온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벌 옹호론자로 찍힌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유력 경제학자인 그의 발언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박정희 체제의 유산에 대한 평가에 있어 긍정적인 장 교수 그룹이 자본과 노동의 계급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희박한 탓에 중요 경제 이슈에 혼선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장 교수와 뜻을 같이 하는 그룹이 노동 세력의 주적을 금융자본으로 겨냥하면서 신자유주의 지배 세력에서 재벌을 제외시켰다는 점을 근본문제로 지적한다.

 

 

 

 

“전통 경제학 수치로만 따져 오늘날 지구촌은 엄청난 경제성장으로 중세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부유해졌어요. 그런데 지금은 집 한 채 사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고, 부부가 1년 내내 맞벌이해야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어요. 그것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이런 경제학은 버려야 합니다. 이제 경제학은 윤리학 생물학 심리학 지구과학까지 포괄하는 거대 담론이어야 합니다.”

한국은행에서 화폐 발행 실무를 총괄하는 조군현씨가 경제학의 새 이정표를 제시하는 책을 번역해냈다. 세계적인 진보 경제학자 2인이 쓴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실체를 고발하고 새로운 경제 시스템 창안을 역설한다.

“전통 경제학자 계산에 따르면, 근대기 이전 중세 때 보통 농부 한 사람이 연평균 15주 정도 일하면 1년 동안 생활하는 데 필요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0년 동안 유례없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중세의 소작농들보다도 더 죽어라고 일해야 살 수 있다.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그는 특히 척박한 경제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전 세계 인구 중 30억명이 하루에 2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고, 가장 잘산다는 미국조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절대빈곤자가 4000만명”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세계 상위 1%의 부자들은 57%의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을 합한 것보다 많이 벌고 있으며, 이런 부의 불평등이 계속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조씨는 “애초(애덤 스미스 등의) 경제학은 소수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했다”면서 “이런 불합리한 현대 경제학은 새로운 경제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GDP(국내총생산)로 대변되는 ‘경제성장’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됐다”면서 “현대인들이 무의미한 ‘경제성장’으로 ‘삶의 질’을 맞바꾸는 것은 비효율적이며 지구 자원만 낭비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진정한 경제학이란 “우리가 갖고 있는 자원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어야 한다”면서, “이 책은 GDP를 공해, 질병, 천연자원 고갈 등의 사회·환경적 비용을 뺀 ‘참경제발전지수(GPI)’로 대체하자”고 제시한다.

 

 

도대체 왜 어떤 사람들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하는 걸까.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중대 변수가 아니라면 무엇이 성공을 결정하는 걸까. <80/20 법칙>의 저자인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 리처드 코치 등이 쓴 <낯선 사람 효과>(원제 'Superconnect')는 그 비결을 '본능적으로' 네트워크를 잘 이해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에서 찾는다.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것은 연결이 많은 것보다도 올바르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며 저자들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 '약한 연결'이라고 말한다. 미국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가 1970년대 초반에 지적한 대로, 지인들과의 '약한 연결'은 단지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각각의 밀집된 덩어리(강한 관계)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다. 약한 관계가 부족한 사람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그룹에서는 정보를 거의 얻지 못하고 오직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얻는 지엽적이고 개인적인 정보만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우리 주변에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사회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풍부한 사회적 연결을 기반으로 가치 있는 유용한 정보에 쉽고 빠르게 접근하는 그들은 '슈퍼커넥터'이며, 그들이야말로 현대사회의 '진정한 엘리트'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슈퍼커넥터는 엄청난 인맥을 가진 유명인이 아니다. 많은 사람을 알고 있어야 하지만 좋은 첫 인상으로 친근감을 주고 아무 대가 없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외향적이고 카리스마 넘치고 매력적이기보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평범한 스타일이다.

'약한 연결'을 잘 이해한다면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도 유용할 지도 모른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체로 돈을 버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인ㆍ외부인과의 약한 연결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래서 가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자본, 외부 기업들로 이어진 약한 연결을 공동체 속으로 풍부하게 주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저자들은 책에서 약한 연결의 유용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들을 포함해 기업을 사고 파는 사업 과정에서 성공한 사례를 잔뜩 늘어 놓는다. 그러면서 찰리 채플린이 '모던타임스'에서 그렸던 초기 산업사회와 달리 '우리에게는 자신의 의지대로 허브(연결망)를 옮기거나 또는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허브를 만들 수 있는 권리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장점이자 맹점이 바로 이 대목이다. '어떤 종류의 허브가 자신에게 잘 어울리고, 어떤 형태의 허브에 자신이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도전과 실패의 과정을 거치면서 깨달아가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외부상황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한 허브에서 다른 허브로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저자들의 주장은, 그들에게는 가능했을지 모르겠으나 대단한 열정과 노력, 지혜와 의지를 갖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가능해 보이지만 실은 불가능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난해 출간 이후 미국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됐다. 저자 코리 로빈이 분석한 보수주의가 기존 학설이나 일반적 관점과 달랐기 때문이다. 홉스와 하이에크를 같은 테이블에 놓고 보수주의와 반동주의, 반혁명주의를 한 범주에 놓은 분석틀이 논쟁의 이유였다. 한 예로 18세기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주의가 2008년 미 대선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나왔던 세라 페일린의 급진 대중주의적 보수주의에 닿아 있다는 주장이 논쟁을 촉발했다. 원제는 '반동의 정신(Reactionary Mind)'. 로빈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보수주의 이념은 반동적이지만, 그 이념의 자주성이나 힘을 대수롭지 않게 본 게 아닌데도 보수주의자들이 '정신 나간 반동(Mindless Reactionary)'으로 잘못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로빈의 “보수주의자들은 예외 없이 반동과 반혁명에 투신했다”는 주장은 쟁점이 

로빈은 18세기의 버크에서 21세기의 네오콘까지 3세기에 걸친 보수주의를 개관한다. 조소나 당위론이 아니라 진지하게 반동의 속성을 지닌 보수주의의 기원과 현재를 분석한다. 보수주의는 프랑스혁명에 대응하면서 생긴 반혁명의 반동적 이념이다. 로빈이 보기엔 자유방임론자이건, 파시스트이건, 전통주의자들은 모두 반동적 충동을 가슴 속에 품고 있다. 그 충동이 그 세력들을 단합시켰다.

보수주의에 대한 일반적 관점이나 생각을 봐야 할 것 같다. 작은 정부와 자유에 대한 신념, 또는 변화에 대한 신중함, 점진적 개혁이나 덕의 정치에 대한 믿음? 로빈은 이런 것들은 단지 보수주의 부산물이며 수시로 변할 수 있는 양태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여긴다. 더 근본적인 보수주의 뜻은?

로빈은 이렇게 정의한다. "보수주의는 바로 사람들이 상급자들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 특히 사적 영역에서 자유를 얻는 것에 대한 반대다." 프랑스혁명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도 사적인 뇌관으로 격발된 것이다. 그것은 가정, 공장, 현장에서의 권리와 지위에 대한 다툼이었다. 로빈은 "해방의 진정한 주제는 사적 영역에서 권력의 향배"라고 규정한다.

그래서 버크는 프랑스혁명을 큰 위협으로 봤다. 명령과 복종의 의무 관계가 역전되는 것이 문제였다. 버크가 대중에게 절대로 양보할 수 없던 것은 "권력, 권위, 지도력을 나누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대중은 "국가를 관리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는 1919년 미국 시애틀 총파업 때 나타났다. 노동자들은 법과 질서 유지를 포함한 기초적인 공공서비스를 제공했다. 시애틀 시장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은 폭력과 무정부 상태를 억제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능력이야말로 큰 위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로빈은 프랑스혁명, 노예해방, 여성해방과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 운동 같은 투쟁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권력 배치의 변경이라고 규정한다. 보수주의는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적 도전에 대응해 자신의 원칙을 재조정"하며 반동의 원칙과 입장을 세워나갔다. 특권의 조그만 일부를 나눠주고, 대중이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점진적으로 인정했다. 가족, 공장, 현장에서 유사 귀족으로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통념과 달리 보수주의자들은 구체제에 대해서도 신랄했다. 프랑스혁명에 반대한 정치학자 메스트르도 구체제의 세 기둥인 귀족제, 교회, 군주제를 비판했다. 버크는 혁명을 경탄했다. 시민들이 마리 앙트와네트를 침실에서 끌어내 그녀와 가족을 앞세워 파리로 행진한 일이 일종의 장엄함을 성취한 것이라고 봤다. 보수주의자들은 때로 좌파의 전략, 혁명이나 개혁의 이념과 전술을 흡수했다.

이 모든 비판과 경탄, 수용은 우파를 재건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 시도는 현대에서 우익 대중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로빈은 우익 대중주의 역할을 "수많은 군중을 모아 위세를 과시하면서도, 권력이 진정 공유되거나 분배되지는 않도록 단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로빈은 이런 말도 했다. "평민인 척 하는 것은 보수주의자들의 무기고에 소장된 최고의 무기다."

책 1부에서 반동적 이념의 여러 갈래와 흐름을 살핀 로빈은 2부에서 우파의 폭력 과잉 문제를 들여다본다. 로빈은 보수주의의 폭력이 "결코 일탈적인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보수주의) 전통 그 자체의 구성요소"라고 말한다. 예컨대, 로널드 레이건은 1982년 12월 과테말라 대통령이자 민간학살로 악명이 높았던 리오스 몬트를 만난 뒤 “대단한 인격자”라고 평가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전쟁을 증오한다고 주장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폭력 때문에 슬퍼하거나 부담스러워하거나 괴로움을 겪기는커녕 그것에 의해 활력을 얻어왔다"고 로빈은 말한다. "지배가 장엄할 수 있다. 그렇지만 폭력은 더욱 장엄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좌파의 거대한 사회운동을 물리치기 위해 20세기에 등장한 현대 보수주의의 향배는 어떨까. 로빈은 하이에크의 "(자유시장의 방어는) 그것이 가장 번성할 때 정체된다"는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전망한다. "가시권 내에서 보수주의는 이미 그 목표를 달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것은 퇴장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그렇게 할지, 퇴장하는 길에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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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6 1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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