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경영>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이제 다수 대중을 향해 무차별 난사하는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소수 마니아를 노린 '니치버스터'가 성공하는 시대라고 말한다. 니치버스터는 여러 부류의 대중에 대한 홍보에 열 올리기보다는 자기만의 독특한 뭔가를 만드는 데 주력한다. 니치 시대 승자는 소비자가 아닌 숭배자를 양산한다. 애플이 대표적이다. 힐러리는 2008년 대선 민주당 경선 때 중간층 유권자 공략에 주력했지만 오바마는 SNS를 통해 자발적 열혈 지지 그룹을 끌어모아 승리했다.

틈새 시대에도 위험은 도사린다. 인터넷 둥지는 자기 위치만을 지나치게 강화하기도 한다. 유유상종이다. 남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는 폐쇄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또한 곳곳에 남겨놓은 디지털 발자국을 통해 구글은 우리의 다음 걸음까지 예측해낸다.



부제도 화끈하다. ‘담배 산업에서 지구온난화까지 기업의 용병이 된 과학자들’이다. 강도 높은 표현 속에 쟁점도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살충제 DDT가 생태계 파괴의 주범인가 아닌가, 지구온난화·산성비는 인간이 만든 재앙인가 아닌가를 따진다. 미국 레이건 대통령 시절 스타워즈(전략방위구상)가 정당했는가도 검증의 도마에 올린다.

폐암이 흡연습관 탓인가, 취약한 유전자 때문인가도 따져 묻는데, 그럼 과학의 몇몇 쟁점을 짜깁기한 책인가. 아니다. 이 책이 겨누는 칼날은 어둠의 세력의 급소를 겨눈다. 상식을 가리는 의혹의 먹구름을 만드는 데 열중하는 “과학의 탈을 쓴 회의주의자들”은 알고 보니 동일인 세력이란 주장이다.

프레더릭 사이츠와 프레드 싱어가 대표적인데, 이들은 2차 대전 때 물리학자로 활동했다가 냉전 시절 미 정부에 참여했다. 스타워즈 구상 때 보수적 싱크탱크인 마셜 연구소도 설립했다. 냉전 이후 새 가상적으로 극단적 생태주의 그룹을 상정한 뒤 이젠 대중을 현혹시키는 중이란 신랄한 비판이다.

그들은 베트남전 이후 과학계의 자유주의적 기류가 못마땅했고, 때문에 담배회사, 화석연료 업체의 후원 아래 환경 규제론에 반대했다. 산성비는 배기가스가 아니라 화산 활동에 의한 것이고, 지구온난화는 태양활동의 주기 변화 탓이라는 주장이다. 흡연과 암 사이의 연관성도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안데스 지역의 학교 건립을 돕기 위해 페루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그 소년은 커다란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건 바로 공항의 포터, 버스 운전사, 이발사, 상점 점원 등 대 다수 페루 노동자들은 자신의 모국인 노르웨이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 조금도 일솜씨가 못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이 받는 임금은 같은 일을 하는 노르웨이 사람들에 비해 턱없이 낮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 소년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때문이었을까요? 소년은 경제학을 전공했습니다. 스 위스 장크트갈렌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MBA 과정을 밟을 때도, 코넬 대학교 경제학과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도 그 의문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 아일랜드, 핀란드 등에서 회사를 경영할 때도, 국제기구에서 일하면서 제3세계의 발전 문제에 조언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제는 성인이 된 이 소년은 자신이 직접 이 의문을 해결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도서관을 뒤지고, 중고 서적상을 통해 자료를 모았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이 드물었기에 경제 발전의 역사를 기록한 귀한 자료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폐지수집상을 뒤지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그는 5만 권에 달할 정도의 장서를 수집했습니다. 이를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룰 당시 유럽 각 나라의 상황과 역사에서 지워진 수많은 사상가들의 목소리를 생생히 들을 수 있었지요.

[부자나라는 어떻게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나라는 왜 여전히 가난한가]는 어린 소년의 오랜 의문을 근 40여 년에 걸쳐 끈질기게 연구하며 스스로 풀어간 결실입니다.

[부자나라는 어떻게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나라는 왜 여전히 가난한가]에는 유럽은 경제 발전의 비결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그럼에도 경제 발전에서 영국은 성공 모델이 되고 스페인은 전형적인 실패 모델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이런 역사적 사실 자체를 주류 경제학은 어떻게 은폐했는지, 그 결과 가난한 나라에서 어떤 참상이 빚어지고 있는지가 지금은 그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지난 500년 사이의 문헌학적 증언과 에콰도르, 몽골, 르완다 비극의 현장에 근거해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이 책으로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는 뮈르달 상 2008년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책은 주류 경제학의 '모범답안'이 틀렸다고 말한다. 그들은 뭐라고 했나. 비교 우위론에 입각한 자유 무역이었다. 어떤 나라든 하나를 특화해 서로 교역하면 다 잘살 수 있다는 논리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레나토 루지에로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은 "국가와 지역 간의 관계를 균등하게 해줄 국경 없는 경제의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고 했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어떤가?


세계적인 마케팅 전문가인 마틴 린드스트롬은 위의 질문 중 하나라도 `예`라고 대답한다면 마케팅의 교묘한 술수에 걸려든 것이라고 말한다. 20년동안 브랜드 전쟁의 최전방에서 활동한 저자는 신간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에서 마케터와 광고회사들이 어떻게 진실을 은폐하고 소비자들의 구매를 조장하는지에 대한 음모들을 폭로한다.

최근 소셜커머스 쇼핑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소셜 커머스 사이트는 세계 최고 디자이너들이 제작한 고가의 제품들을 `제한된 시간`동안 대폭 할인 판매한다. 이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대부분 `물건이 싸니까 미리 사두는 것`이라고 답한다. 과연 그럴까. 소셜커머스 사이트인 아이딜리의 CEO인 폴 헐리는 소셜커머스 사이트가 `게임적인 구조`를 모두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제한시간, 도전 과제, 다른 사용자들, 그리고 중독성 등 게임의 요소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온라인 경매에서 낙찰을 받지 못했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경험한 아슬아슬함이 욕망을 키운다는 설명이다. 결국 `싸다`는 이유보다 게임을 즐기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마케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한 작은 마을에 `위장 가족을 전입시켜 그들의 이웃에게 다양한 브랜드 제품들을 사도록 몰래 설득하는 과정을 담고자 한 것. 그 결과 구전 효과나 동료압박의 힘이 상상이상으로 막대하다는 결과를 얻었다. 기업들은 마케팅에서 이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역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구전 마케팅이나 동료압박의 힘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소비자의 힘이 크다는 것이다. 즉 이 힘을 소비자들이 긍정적으로 쓴다면 보다 현명한 소비생활은 물론,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침묵의 봄'은 인공 화학물질이 갖는 ①내성(耐性)과 ②농축(濃縮)의 두 현상을 부각시켜 설명했다. 해충에 살충제를 뿌리면 다 죽는 게 아니라 극히 일부라도 살아남아 빈 생태공간을 채워버린다. 돌연변이로 살충제에 저항성을 갖게 된 놈들이다. 이것들을 제거하려고 더 독성이 강한 살충제를 뿌려 보지만 해충과의 전쟁에서 인간은 '짧은 승리' 뒤에 '궁극적 패배'를 할 수밖에 없다. 카슨은 한국전 때 군인들에게 5% 농도의 DDT를 뿌렸는데 이(蝨)가 되레 많아졌다는 연구결과도 소개하고 있다.

스리랑카는 1948년만 해도 말라리아 환자가 연간 280만명 발생했다. 그러던 것이 DDT가 뿌려지면서 1962~64년엔 발병 건수가 31~150명에 그쳤다. 그러나 1964년 DDT를 금지시킨 후 환자가 1968년 100만명, 1969년 250만명으로 늘었다. 그래서 어떤 블로그는 카슨이 나치보다도 많은 사람을 죽인 셈이라며 카슨을 히틀러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녹색 테러(green terror)'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농약이 없다면 작물의 3분의 1은 해충이 먹어 치울 것이다. 인구를 먹여 살리려면 농지를 더 늘려야 한다. 산을 깎아낼 수밖에 없다. 전국 구석구석 경사도가 낮은 산지는 상당부분 논밭으로 개간돼야 한다. 생태환경은 망가지고 말 것이다. 농약은 생태를 파괴하는 측면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선 생태를 지켜주는 역할도 한다.

카슨에 대해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선지자였다'는 평가와 '결과적으로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설익은 과학자였다'는 시각이 함께 존재한다. 인간의 간섭이 생태 위기를 초래한다는 관점과 과학기술에 의존해야 생태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는 관점 사이엔 넘기 힘든 장벽이 있어 보인다. 과학문명을 한계(limit)로 인식할 것인가 가능성(possibility)으로 파악할 것인가. 지금의 환경운동이 부닥쳐 있는 딜레마에도 시사점을 주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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