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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론 한길그레이트북스 32
마르셀 모스 지음, 이상률 옮김 / 한길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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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론』(마르셀 모스, 이상률 옮김 / 한길사, 2002)은 에밀 뒤르켐의 조카이자 프랑스 사회학·인류학의 거두인 마르셀 모스의 노작이다. 그가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말할 것도 없고, 부르디외, 바타이유, 보드리야르, 푸코 등에게 미친 영향은 무척 크다고 한다. 그런데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저술한 저작은 거의 없는 듯하다. 문화인류학자 류정아 씨가 쓴 해제를 보면 모스는 단독으로 연구하기보다 다른 학자들과 공저하길 선호했던 것 같다. 공동 작업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준 셈인데, 이는 현대 문화연구자와 인류학자들에게도 모범이 된 게 아닐까 싶다(대표적으로 연세대 문화연구 그룹과 조한혜정 등). 


『증여론』을 읽은 것은 『거대한 전환』과 『리오리엔트』를 경유하면서 시장 경제와 비시장 경제 사이의 교점을 탐색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미 2009년의 경제 인류학 콜로키움에서 폴라니와 모스를 연이어 읽은 맥락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증여론』을 읽으면서 프랑스에서는 굳이 폴라니를 볼 필요를 못 느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폴라니가 1944년에 『거대한 전환』을 출간했고(같은 연도에 하이에크가 『노예의 길』을 냈다), 모스가 1925년에 『증여론』을 썼으니까 거의 20년 전에 폴라니가 할 말을 다 한 셈이다(폴라니는 자신의 경제인류학적 관점을 말리노프스키와 투른발트, 마거릿 미드 등에서 찾고 있다). 특히 말리노프스키, 보아스 등의 연구가 품은 의미를 보다 섬세하게 포착했다는 점에서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말하는 '전일론적 관점'과 '다양성 속의 통일성' 개념을 보다 완전하게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른바 원시 혹은 미개 사회의 살림살이는-본문 번역에서는 이 용어를 쓰지 않았지만, 살림살이oekonomi로서의 경제economy 개념은 통시적·공시적으로 중요하다-선물을 매개로 한 공동체 생활이다. 사람들이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은 누군가 강요해서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선물 교환은 자발적이고 우호적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개인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자율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인(들)이 따로따로 흩어진 '섬'이 아니라 마을(가족, 부족, 종족 등)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안에 존재하는 경제는 의무의 경제이다. 주어야 할 의무와 받아야 할 의무, 그리고 받은 만큼(아니, 그보다 더 많이) 다시 주어야 할 의무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부과된다. 이 의무를 함부로 깰 수 없는 이유는 그로 인해 공동체의 힘이 커지거나 줄어들기 때문이다. 즉, 선물 교환은 축제이자 전쟁이며, 우정과 환대의 공간이자 권력 투쟁의 장이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공동체 및 구성원들의 영혼이 걸려 있다. 모스는 이 선물 교환의 축제를 포틀래치potlach로 부르자고, 또 이런 경제를 '전체적인 급부 체계'systeme de prestation totale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게다가 아메리카의 학자들이 밴쿠버에서 알래스카에 걸쳐 사는 백인과 인디언의 일상 언어의 일부가 된 치누크(chinook)어(치누크족은 미국 북서부 컬럼비아 강 유역에 사는 아메리카 인디언-옮긴이)의 명칭을 이용해서 부르는 바와 같이, 우리는 그것을 포틀래치(potlach)라고 부르자고 제의한 바 있다. '포틀래치'란 원래 '식사를 제공하다'(nourrir) 또는 '소비하다' (consommer)를 뜻한다. (p.54) 

씨족 자체가 그 구성원 모두를 위해서, 그들이 소유하는 모든 것을 위해서 또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을 위해서 추장을 매개로 하여 계약을 맺는다는 의미로, 그곳에는 전체적인 급부가 있다. 그러나 이 급부는 추장의 이름으로 매우 두드러진 투기적(鬪技的)인 성격을 띤다. 이 급부는 본질적으로 고리대적(高利貸的)이고 낭비적이며, 무엇보다도 귀족들이 나중에 자신들의 씨족이 누릴 위계서열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p.56) 

이와 같은 내용은 멜라네시아의 트로브리안드 제도를 연구한 말리노프스키(『증여론』에서도 쿨라 교역을 주로 인용한다)와,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 등지에서 사는 콰키우틀족, 틀링깃 족 등을 연구한 프란츠 보아스의 기록 등을 토대로 보다 구체화된다(투른발트도 각주에서 인용되지만, 솔로몬 제도 연구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은 단순한 우애의 표시가 아니다. 더러는 미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사치스러우며 과시적인 소비가 축제 한 가운데에서 벌어진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물 교환은 언제나 축제와 함께 벌어진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경우, 축제의 절정은 부(富)의 상징인 동판을 깨버리거나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이다(더러는 노예를 죽이기도 하며, 재산을 불태우는 등 파괴의 방식은 다양하다). 

때로는 주거나 답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답례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단순히 물건을 파괴하는 일이 있다. 생선기름이나 고래기름의 통을 완전히 태워버리기도 하고 집과 수천 장의 담요를 태워버리기도 한다. 또 상대방을 압도하여 '끽소리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가장 비싼 동판을 파괴하기도 하고 물 속에 던져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의 사회적 지위도 높아진다.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법과 경제 체계에서는 막대한 부가 끊임없이 소비되고 이전된다. 이러한 이전을-원한다면-교환·교역 또는 판매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교역은 예의와 후함으로 가득 차 있는 귀족적인 것이다. 그리고 어쨌든 그것이 다른 정신으로, 즉 직접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서 행해진다면 그것은 매우 뚜렷한 경멸의 대상이 된다. (pp.141-144)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경제인homo economicus은 존재하지 않는다. 효용(개인적 만족에 대한 양적 개념)에 기반해 최적의 소비를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행태는 보편적인 것도, 원초적인 것도 아니다. 이어서 모스가 '제3장 고대의 법과 경제에서 증여 원칙들의 잔재'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하다. 12표법 이전의 고대 로마와, 게르만 부족 사회, 힌두 전설 등을 참고했을 때, 이른바 '문명 세계'조차도 개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경제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미약했다는 것이다. 이는 서문인 '증여, 특히 선물에 답례해야 하는 의무에 관하여'에서 인용한 에다(Edda,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서사시집)의 한 구절을 통해서도 드러난다(42절은 게임 이론상 팃포탯 전략tit-for-tat의 우월성을 연상시킨다). 

(41절) 무기와 옷을 주면 친구들은 서로 즐거워할 것임에 틀림없다. 누구나 그것을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서로 선물에 답례하는 자들은 만일 그 물건들이 잘 쓰인다면 언제나 변함없는 친구가 된다 

(42절) 누구나 친구에 대해서는 친구로 있지 않으면 안 되며, 또 선물에 대해서는 선물로 답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웃음에 대해서는 웃음으로 답하고, 거짓말에 대해서는 속임수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p.45) 

이 점에서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리오리엔트』에서 중세와 근대의 '세계 경제'마저도 이윤으로 움직이는 시공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것은 착오다. 화폐조차도 단순히 구매력의 수준에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어떤 권력을 상징하고 반영하느냐로 파악해야 한다. 희소한 것은 자원(화폐)이 아니라, 권력(권위)이다. 

여기서 현대인(좀 더 정확하게는 '근대인')이 모스의 전일론적 관점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드러난다. 즉, 선물 경제가 품고 있는 다양한 정치적·경제적·법적 의미와 한계가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물에 영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이 한갖 미신으로 여겨지는 근대 산업 사회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겐 너무나 당혹스런 개념이다(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소통으로서 영(靈), 제의(際儀), 신앙 등은 모스에 대한 프레이저의 지적 영향력과 함께,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을 독해함으로써 더욱 심도깊게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모스의 연구가 주는 의미를 잘 헤아려 보면 선물 경제가 우리 생활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통찰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여전히 우리는 선물을 주고 받으며, 여기에는 호의가 깔려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온전히 자발적이고 순수한 일인가? 선물은 일종의 고마움의 표시이면서, 주고 받은 사람끼리 서로 동등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돌려줘야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선물 교환의 부정적인 행태로는 정경유착과 각종 부정부패가 있는데, 이 또한 선물 경제 연구의 주된 대상일 것이다). 산업 사회에도 남아 있는 이런 관념과 풍습을 인습으로 폄하하거나, '자유 시장'(완전경쟁시장)을 경제 생활의 유일한 장으로 고정시키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제 '살림살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장 경제는 결코 완전히 시장 자율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는 폴라니의 지적은 옳다. 

다시 법적·경제적·정치적·종교적 생활의 복합체로서 선물 경제의 의미를 짚어보자. 모스는 상호부조와 호혜의 경제가 부활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당대 프랑스의 조합주의적corporatist 경향이 시장 자율에 의한 인간성 파괴를 치유할 방법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은 '기능적 민주주의자' 폴라니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보편적 복지'가 화두인 '지금 여기'에서, 모스와 폴라니는 시장 경제와 비시장 경제가 서로 포개져 있는 상황을 직관적으로 포착한 사상가로서 의미가 있다. 여기서 시빌리떼(civilite, 시민윤리. 옮긴이 이상률은 이를 '예의'로 번역했지만, 나는 발리바르의 개념을 끌어와야 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우리, 유럽의 시민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가 일종의 새로운 '시민 종교'로 기능해야 할 이유도 찾을 수 있겠다. 

『증여론』에서 드러나는 소비 행태는 베블렌의 '과시적 소비' 개념으로 이어질 것이다(옮긴이는 바타이유와 보드리야르의 소비 개념을 선취한 모스에 주목하지만, 나는 그런 관점이 종교학적·인류학적 관점은 배제시키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시장 역시 하나의 제도로서, 또 살림살이와 관계망의 '패턴'으로 존재한다는 걸 인식한다면 자기조정 시장의 파괴적인 행보를 조금이라도 완충하고 넘어설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왜 문화연구자로서 모스를 읽어야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추. 공화정 말기 로마에서 카이사르는 유명한 빚쟁이였다. 특히 그의 최대 채무자인 크라수스는 정치적·정서적·경제적 유대를 형성하는 수단으로 빚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한 사람이었다. 『증여론』에 따르자면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의 '노예'(비유적인 표현이다)인데, 어떻게 정치 파트너로 '대등해질' 수 있었을까? 이를 '교활한 카이사르' 때문으로 넘겨짚는 건 그다지 좋은 태도가 아닌 것 같다. 『증여론』은 고대 로마(그리스 포함)의 경제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단초를 제공한다. 이해타산적인 경제가 셈족·헬라인·로마인에게서 나타나지만, 이 또한 멜라네시아와 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종교·관습과 얽히고 설켜 있다. 그런 점에서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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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 운동사 -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역사
한윤형 지음 / 텍스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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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 운동사』(한윤형 / 텍스트, 2010)를 말하기 전에 밝힐 게 두 가지 있다.

첫째, 나는 조선일보에 나온 적이 있다. 2002년, <독자만화대상>의 1기 멤버로서 홍보 활동의 일환으로 조선일보 취재에 응했다. 당시 나는 '운동권'이었지만, 한총련과 점점 거리를 두고 있었다. 만화 운동에 몸과 마음이 모두 기울어 있었기 때문이다(이 또한 '운동사'를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언젠가 정리글을 올려볼까 한다). 안티조선 운동이 한창이던 때였음에도, 나는 '안티조선'이라는 구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솔직히 말해서 거의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당시 병행하던 청소년 참정권 운동에서는 "왜 조선일보에 나왔느냐"는 질책도 들었다(우습게도 나는 모 대학 학보와 한겨레에 만18세 참정권 운동가로 취재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무지가 부끄러웠다. 그러나 무지보다 더 부끄러운 건 따로 있었다. 조선일보에 사진이 박힌 것 때문에 온 일가친척들이며 학과 사람들까지 나를 '조선일보에 나온 만화 운동가'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에야 조선일보의 파급력을 깨달았다.

둘째, 조선일보에 대한 지금 나의 포지션이다. 나는 언소주 활동을 지지하며 조선일보 구매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종의 대조군이자 타산지석으로서 조선일보를 탐색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조선일보를 반대하기 위해서는 조선일보를 알아야 한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즉, 구매는 피하되 온라인 구독까지 막아선 안 된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사서 보지 않는다고 해서 조선일보가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책에서도 지적되었듯 광고에 대한 신문의 의존도가 높다는 걸 생각해 볼 때, 실구독자 수가 신문의 존속에 미치는 영향은 거대 언론사일수록 작다(진성당원 수에 대한 한나라당-진보신당 간 차이와 비슷하다). 한겨레와 경향은 상관성이 비교적 높다고 볼 수 있지만, 이들조차 토건 광고 때문에 관련 비판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건 조중동의 종편 문제 및 언소주의 활동과 연결될 만한 꺼리이지만 여기서는 넘어가자.

글머리가 길었다. 조선일보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조선일보도 안티조선도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책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안티조선 운동사』는 말 그대로 안티조선 운동의 역사를 기술한 한윤형식 정리글이다. 근대 한국사 연구자인 신복룡 선생은 역사를 서술하려면 한 세대(30년)가 지나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강준만이 『김대중 죽이기』를 통해 (한윤형의 표현으로는) '광야에서 조선일보를 외친' 시기(1995년)를 생각해 보더라도 15년을 겨우 넘겼다. 그러나 인터넷 매체의 특성상 호흡이 짧고 빠르며, 시대 자체의 변화 속도가 이전에 비할 수 없이 급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안티조선 운동을 말하기 이전에 한국 언론사를 요약 소개한 것도 장황한 감이 있지만 용인할 수 있다. 사건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 한국 언론 운동의 연장선상에 안티조선 운동이 있었다는 입장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안티조선 운동을 중심에 둔 나머지, 언론 운동의 당연한 귀결 내지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과대해석한 감이 있다. 안티조선 운동은 여러 가지 변수가 있었기에 나타난(뒤집어 말해 그러한 것들이 없었다면 없었을) '실현된 가능성'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조선일보 인터뷰를 거부하고 '아흐리만'이라는 아이디로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한 한윤형에게 있어 안티조선 운동에 대한 정리글은 일종의 부채 청산인 듯하다. 한윤형이 책 속에서 즐겨 인용하는(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소설들로 빗대보자.『은하영웅전설』로 치면 율리안 민츠로, 『반지의 제왕』으로 치면 빌보의 '레드북'을 이어받는 프로도에 비길 수 있겠다. 그에게 있어 양 웬리 혹은 빌보 배긴스는 강준만이 아닐까(양 웬리라는 비유는 진중권에게 좀 더 어울리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김대중 죽이기』부터 시작해 조선일보를 언론 운동의 '주적'으로 설정해 안티조선 운동의 이론적·실천적 기반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티조선 운동은 '최장집 사건'(1998년)으로 촉발된 지식인들의 동참과 문학 권력 논쟁을 거치고 대중화되면서 양상이 바뀌기 시작한다. 여기서 한윤형은 운동사에서 벗어나 '노빠'의 인식론/존재론 분석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안티조선 운동의 지식인적 속성은 대중 운동으로의 확산에 장애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운동의 팽창 과정에서 운동 논리의 극적인 단순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 운동이 성공한다는 것은 그것의 이념이 대량 생산되는 공업품처럼 찍혀 나와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는 말과 유사하다. 인터넷 화면에서 클릭 한 번 하면 상품을 구입할 수 있듯, 그렇게 운동은 '원 클릭 쇼핑몰'이 되어 사람들을 유혹한다. (p.152-153)

정서적으로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듯하다. 학력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한나라당 지지층에게는 우월 의식을 지니면서도, 지식인들의 기득권(?)을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게 했다. 이를테면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무식하다고 공박하는 반민중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도 그들이지만, 지식인들이 글을 알아먹게 쓰지 않는다고 인터넷에서 비난하는 민중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도 그들이었다. (…) 즉 이들은 부르주아(자본가) 계급 의식에 대해서도,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 의식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다. '보통 사람'과 '상식'의 역할은 여기서도 분명했다. 여기서도 그들은 중간자적인 입장을 취했다. (p.247)

나 역시 노빠의 멘털리티를 '공부하지 않는 지식인'과 '정서적 중도'로 분석하는 입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 책이 표방하는 바가 '역사'인 이상,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탐색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한윤형은 서프라이즈 등에 올라온 글들을 인용하면서 그들의 태도와 입장에 대해 논하기는 한다. 그러나 운동의 담론적인 측면과 사건들에 대한 기술에 치중한 나머지, 정작 안티조선 운동의 주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에는 좀체 가닿지 못하고 있다. 단적으로, '3부 안티조선 운동의 성장'과 '4부 혼란에 빠진 안티조선 운동'에서 도드라지는 사람들은 여전히 홍세화, 진중권, 유시민, 노무현 등 '영웅캐'들이다. 주체가 곧잘 증발하고 글의 양적 축적이 오프라인에 비할 수 없는 온라인 게시판의 특성상 불가피한 부분은 있다. 내가 아쉬운 건 '살아남은 평범한 사람들'과의 인터뷰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한편, 안티조선 운동은 담론 투쟁이자 정치 활동으로서 지극히 그람시적이다. 또, 레닌(주의)을 누구보다 싫어할 조중동과 노빠들 모두 담론 투쟁의 장에서는 철저한 레닌주의자였다는 것도 역설적이다. 안티조선 운동의 한계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 안티조선 우리모두에서 좌파가 이탈하고, 서프라이즈가 동프니 남프니 하며 갈려나가는 데는 한국의 이념 지형이 강하게 작용한다. 물론 정치와 언론의 완전한 분리는 불가능하다. 이들은 서로 견제해야 하지만, 언론의 이념적 색채 자체를 무화시킬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안티조선 운동은 지극히 '상식적인' 운동으로 출발했고, 당파성을 표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당파적인 운동이었다. 운동 주체들이 안티조선 운동의 당파성을 거세했을 때 운동의 역동성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즉, 안티조선 운동은 '상식'과 당파성 사이의 괴리로 인해 무너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안티조선 운동의 내외적 모순은 노무현 정부 시기와 2008년 촛불 때에도 반복된 듯하다. 대한민국 상식인의 입장에서 '순수한' 시민 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덜 불편하고 온건해 보인다. 그러나 상식을 강조하다 보면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발산할 자리는 사라진다. 노무현 정부의 노동 정책이 그랬고, '촛불 시민'이 비정규직 투쟁을 외면한 것이 그렇다.

여기서 안티조선 운동이 안티테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언론다운 언론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야 했다는 지적은 적절하다(히요, <교과서>). 언소주 활동에 대한 지지와 별개로, 나는 언소주 활동에서 보이는 방식 역시 '원 클릭 쇼핑몰'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가장 온건한 운동이랄 수 있는 소비자 운동마저 탄압과 방해의 대상이 되는 외적 조건이 원 클릭 쇼핑몰의 위험성까지 합리화해 줄 수는 없다. 다만 안티조선 운동과 뒤이은 언론 운동에 최소한의 의미가 있다면 '성찰하는 개인들'이 태어날 조건을 만들 가능성에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관심가는 주제는 '사이버 민중주의'다. 한윤형은 사이버 민중주의가 나타나는 이유를 정치적 채널의 부재에서 찾는다. '네티즌 수사대'와 '신상털기'로 상징되는 웹 생태계의 평등주의('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는 위기의 징후이자 온라인 언론이 활동하는 조건이다. 이는 블로그와 SNS로 다양화되는 웹 생태계에서 개인 언론이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이건 웹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른바 '논객(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안티조선 운동사』는 기술하는 주체의 측면에서 볼 때 무척 상징적이다. 『안티조선 운동사』는 강준만과 진중권의 리즈 시절에 대한 기록이고, 현재까지도 재생산되고 있는 온라인 토론술과 논쟁술이 어디서 유래했는가를 탐색하는 작업이다(더 파고들면 PC통신 게시판 시절까지도 들어갈 수 있겠다. 막상 책에서는 그런 부분에 대한 분석이 적은 듯싶다). 동시에 안티조선 운동에 개입하고 관찰한 20대 필자의 성장기라는 점에서, 이 책은 '20대 논객'의 처음이자 끝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잠시 언론에서 회자되던 20대 논객론(?)이 어떤 배경에서 태어났는지를 가늠해볼 때, 『안티조선 운동사』는 20대 논객론의 소멸을 상징하고 있는 게 아닐까. 덧붙이자면, 책 중간중간에 『은하영웅전설』이나 『반지의 제왕』을 삽입한 것은 작가의 취향을 다분히 반영하지만, 굳이 넣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운동에 대한 (한윤형식) 정리는 여러 단점이 있긴 하지만, 온라인 운동에 대한 재조명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업이다(한편 한윤형의 글에서 느껴지는 노회함은 운동에 대한 회의주의에 바탕한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 남은 질문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한윤형 글이 품고 있는 회의주의를 넘어,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를 어떻게 관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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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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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 박사와 박권일 기자가 공저한 '88만원 세대' (2007)는 "우리나라의 10대가 동거를 선언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동거, '옥탑방 고양이' 같은 드라마 등으로 주류매체의 아이템으로 등장한데다 20대의 동거는 종종 발견되는 일이라 그리 낯설지만도 않지만, 이 나라에서 젊은 여자와 남자가 '결혼'과 '부모의 동의' 라는 매개 없이 함께 사는 것은 그 역사(?)가 꽤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정한 생활방식으로 인식된다. 하물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10대가 동거를 선언한다니! '어린 신부'도 아니고 말이지. 하지만 '88만원 세대'는 우리나라에 잔존하는 유교적 관습이나 사회인식 같은 문화적 장치는 일단 빼고 최대한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본다.

즉, 이 나라에서 10대가 동거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 생존 뿐만 아니라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경제적(물질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자문자답에 우석훈 박사는 "그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라고 못을 박는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번째는 집값, 두번째는 교육비, 마지막으로 월급(급여)이다. 간단히 말해 "돈이 없기 때문" 이지만, 이것을 인권의 측면에서 보자면 주거권과 피교육권, 노동권이고, 경제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부동산과 등록금(학자금) 그리고 고용이다.
이 점을 이웃나라 일본이나 선진국 프랑스 등과 간단하게 비교하지만, 자문자답의 목적은 그 너머에 있다. 10대에게 생존권을 포함한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데 과연 지금 '성인'으로 인정되고 또 사회 구성원이 된 20대에겐 미래가 있느냐 없느냐 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이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밑바탕에 깔고 들어가는 것이 있다면, 지금의 한국에서 20대는 '지옥'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영화 '배틀로얄'에서처럼 서로 죽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배틀로열을 벌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무척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렇다면 "지금 20대가 체감하고 있는 이 현실은 정말 그렇게도 인간이 발붙이고 살 수 없을 정도로 생지옥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따지고 보자면 전혀 살지 못할 곳은 아니다. 비록 자랑스럽게도 GDP 4만달러시대를 앞두고 1년 대학등록금 1천만원시대를 먼저 맞이하는 현 시점이어도, 전체 대학생의 약 70% 가량이 학자금 대출을 받은 경험이 있다는 기사가 도처에서 뜬다고 해도, 열심히 일해서 벌면 먹고 살 수는 있는 시대다. 어디까지나 '먹고 살 수는 있다'에 한정한다면 그렇다. 라면에 삼각김밥으로 삼시세끼를 때우는 인생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여기서 '자기개발' 이니 '자아완성' 같은 말이 먹혀들리가 없다. 사회개혁에 대한 이념 역시 마찬가지인지 오래되었다. 연구자들의 경고가 다소 과장되게 들리긴 하지만, 어쨌든 '먹고 살 수는 있는 사회'의 현실이다.

연구자들이 던지는 또 하나의 주장 :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경쟁의 정체는 '세대 안에서의 경쟁'이 아닌 '세대 간의 경쟁' 이라는 것에 관해서도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결국에는 자기의 능력으로 평가받는 사회에서 경쟁을 통한 성공은 당연하고, 실패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라고. "재태크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걸까요?" 라는 질문에 "무조건 아끼세요. 내 인생 남이 대신 살아주는 거 아니잖아요? 지출은 최대한 줄이시구요, 모임 같은 것도 꼭 필요한 것만 나가시구요, 자기를 위해 투자한다 생각하시구 밥도 최대한 싼 거 사먹으세요. 그럼 꼭 부자되세요^^" 라는 어느 네티즌의 답글이 지금의 우리네 생각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당연시 되는 세계에서,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다는 룰을 받아들인 20대에게 진짜 커다란 장벽은 같은 20대가 아니라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어른' 혹은 기성세대들이다. 무한경쟁의 룰에서 자리를 잡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공정한 게임 같은 게 성립할 리가 없는데도, 20대는, 우리는 그 룰을 '공정한 게임'으로 인정한다. 왜? 결국에는 '자기 능력'에 달린 거니까...

차마 지옥이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이런 환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 것이 신기할 정도다. 10대 때 IMF를 맞이하고, 20대 때 비정규직 노동을 맞이한 우리들은, 현실이 이대로 진행된다고 가정했을 때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 '밥그릇'을 넘어 '생존'을 둘러싼 이 전쟁이 계속된다고 했을 때, 집안에서는 딸과 아버지, 조카와 삼촌, 막내와 큰형으로 만나게 될 20대 '88만원 세대'와 50대의 유신세대, 40대의 386세대, 30대의 X세대(연구자들이 지금의 30대를 X세대라고 규정하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있긴 하지만) 간의 무한경쟁이 지속된다면 지금 20대 대부분의 경제적 빈곤 또한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것은 이제 곧 20대가 될 지금의 10대들과 현재의 20대가 생존경쟁을 벌이게 될 장면이다. 각박한 경쟁사회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들에게 항상 밀려나던 20대가, 과연, 자기 뒤에서 생존을 위해 맹렬히 추격해 올 새로운 '88만원 세대'들에게 온정을 베풀 거라고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미래의 가능성을 미리 대출받아 흥청망청 써버리다가 결국에는 빚을 갚지 못해 파산할 대한민국이 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개인의 노력은 중요하다. 성공한 소수도 존재한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의 뒤안길에는 '실패한 다수'가 웅크리고 앉아있다. 그것을 단순히 패배자들의 능력부족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는 것이 이 책이 외치는 바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해결책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다. 우선 전제를 깐다. '혁명'과 '반(反)세계화' 그리고 '포드주의로의 회귀'(즉, 우리는 더 이상 개발독재시대의 고도성장을 이룰 수 없다)로는 현재의 세대간 경쟁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전제가 있다.

그것은 우리들 20대가 현재의 상황을 자각하고 스스로 나름의 생존전략을 집단적으로 짜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먼저 이뤄지지 않는다면 어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이나 제안 따위도 무용지물이 되기 쉽다. 그리고 이것은 연구자들도 고백하듯이, 그 무엇보다도 힘든 과제다. 같은 20대인데도 각자 너무 뿔뿔이 흩어진 나머지 집단적인 힘은 커녕 서로 간의 의견이 맞을지조차 의문이다(이렇게 말하는 본인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지난 대선에서 보았듯이 '경제성장'에 대한 꿈에 취해 이명박 캠프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20대 지지자들과, 학생회의 이름으로 이명박 지지를 선언한 총학생회장들의 모습을 그저 정치에 대한 순수한 참여와, 좌파 정권과 우파 정권이 각각 집권하는 '진짜 민주주의'의 실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몇 걸음 양보해서 그것이 정치학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집권세력이 정말 지금 비정규직 평균임금인 119만원에서 20대 급여의 평균비 74%를 곱해서 나온 결과인 88만원 전후 밖에 받지 못하는(그리고 당분간 계속 그러할) 우리 20대에게 무엇을 얼마나 해줄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이들이 우리사회의 다양성과 안정성, 즉 '다안성'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가 들 수 있는 '짱돌' 중 하나는 20대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 즉 20대 정치인을 내세우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하등 문제가 없다. 만 25세 이상의 시민은 국회의원과 지방의회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에 후보로 나갈 수 있으니까. 다만 어떤 당에서 활동하는가 하는 문제와(설마 한xx당에서 청년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두 팔 걷어붙일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얼마나 많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기존의 보수적인 정당제도 안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이젠 정당에서조차 세대 간 갈등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라는 구체적인 난관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피선거권을 가진 20대 정치인이 나타난다 해도 그 기반인 지방정부가 허술하고 부패가 심한 한국에서는 풀뿌리 민주주의와 지방정부의 기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연구자들이 선진국의 사례에서 주목하는 부분도 이쪽이다. 독일과 스위스와 같이, 경제난 같은 거대한 파도에 맨몸으로 처할 수 밖에 없는 젊은이들을 지방정부가 자체고용과 보조금 지원이라는 형태로 보호해주는 사회적 안전망을 한국에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20대를 위해 제시하는 정책과 제안자가 좌파냐 우파냐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연구자들의 제안은 심하게 급진적이거나 과격하지 않다. 오히려 제안하는 것은 '인간의 탈을 쓴 자본주의'라고 봐야 한다. 비록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원자재값 상승으로 위기를 겪고 있긴 하지만 올해 약 4.6% 정도의 성장률을 보일 세계경제가 갑자기 무너질지 어떨지는 모를 일이다. 적어도 지금과 같이 무자비하고 패자부활전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식 자본주의'에서 보다 현실적인 대책과 전략으로 지금의 20대와, 미래의 88만원 세대인 10대에게 외부의 충격을 완화해 줄 매트리스를 깔아주는 것은 분명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모여야 되는 지점은 바로 '공동체'다. 우파적으로 말하자면 '공화국'의 어원인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일 거고, 좌파적으로 말하면 꼬뮌(commun)일테지만, 역시나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언제까지 K모F의 '붉은 악마'로 하나되고, 첼시의 유니폼을 입으며 삼☆의 홍보대사나 될 것인가. 된장녀 소리 들으며 명품족의 뒤꽁무니를 쫓을 것인가. 당장 토익책을 던져버릴 수도 없고, 끊임없이 추락하는 주가를 지켜보며 펀드에 쏟아부은 돈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짓고 있다 해도, 이 책을 읽은 20대들 그리고 10대들-저자들이 자신의 책을 꼭 읽어주기를 바라는 세대-이 이것 하나만은 떠올렸으면 좋겠다. "나 하나만은 살아남을 수 있다" 는 생각만은 버리자는 것을.

영어의무화교육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로스쿨 선정으로 대학과 교직원들이 상경투쟁도 불사하고, 본고사 부활로 학원가가 들썩이고, 1년 등록금 1천만원시대 진입으로 청년실업과 비정규직화, 신용불량자 증가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는 2008년 2월 첫날인 오늘, 집값과 교육비와 임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바라기에는 아직 날씨가 매섭다.
한편에서는 한국의 선진국 진입이 코앞이라고 떠들어댄다.'선진국' 이란 무엇일까. GDP만 높다고 해서 선진국이 되는 걸까. 우리는 약자에 대한 배려와 여유가 있는 사회가 선진국이라고 배운 것 같았는데, 현실은 역시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반대여야 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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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8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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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으로 처음 시오노를 만났을 때, 장르의 구분을 넘는 문체와 구성에 매료되었다. 그녀의 전작들, 예컨대 '바다의 도시 이야기'처럼 길지도 않았고, 간결하고 깔끔한 서술 덕에 읽기도 쉬웠다는 점이 고등학생 때 그것을 손에 들게 된 주 요인인 듯 싶다. 그 뒤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나 '레판토 해전' 등의 전쟁 3부작 두 편, '사일런트 마이노리티(국내에서는 '침묵하는 소수'로 이름을 다시 바꿔 재판)'나 '나의 인생관은 영화에서 시작되었다' 등의 에세이를 살펴보며 이 괴팍한 할머니의 삐딱한 시선을 조금은 경계하게 되었다.

어느 만화 스토리 작가의 말처럼 그녀의 역사서술은 동인지-그 중에서도 남성 동성애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만화들-를 연상케 한다. 특히, '남성성'에 대한 애착과 남자들 간의 인간관계는 중세 이탈리아와 고대 로마, 중세 일본을 넘나드는 서술의 기반으로 자리잡는다. 체사레 보르자도 그녀의 시선에서 빗겨갈 수 없었다. 시오노는 체사레라는 남자의 인격과 행동력에 주목하며, 체사레가 살았던 시대의 세평과 근대의 르네상스 연구자(특히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평가 따위는 체사레의 매력을 강조하는 조미료가 되거나 명백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녀가 바라본 체사레는 '근대인 체사레 보르자'였다.

종교가 현실정치에 강하게 영향을 미쳤고 또 각종 금전관계와 유착했던 15,6세기 유럽에서 시오노에 의해 묘사되는 체사레는 운과 능력을 겸비한 사내였다. 그는 미남은 아니었지만 강인한 느낌을 주었고, 적 앞에서 여유롭게 웃지만 옆구리를 찌를 준비를 늘 하고 있는 영리한 사람이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완과 충분한 재력, 정치적인 호위(아버지가 교황이라는 데서 오는 권위)를 모두 가졌기에 체사레는 역사의 주인공-영웅사관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나, 봉건사회에서 권위적인 입장에 선다는 점을 보건대-으로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시오노가 주목하는 부분은 그의 근대적인 사고와 행동에 있다. 기존의 종교와 도덕관념 등과 완전히 거리를 두고 자신의 자유와 야심을 철저히 추구하는 자유주의자 체사레는 봉건사회의 윤리에 구속된 여타 귀족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특히,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로마냐 공국을 건설한 뒤 용병대 체계에서 '국민개병제'로의 군사조직의 변형과 그것에 기반한 통일 이탈리아라는 국민국가를 구상하는 모습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와 오버랩된다. 국민개병제와 근대 교련, 근대국민국가의 원형인 절대 왕정은 그로부터 수십 년 후인 30년 전쟁 후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지만 그는 시간을 앞지를 뻔했던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천재'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의 근대인으로서의 면모는 마키아벨리나 다 빈치 등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정치/경제 구조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실 상 유럽의 상업자본과 금융자본의 약 절반을 양분한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무역활동은 근대로의 진전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단계는 흐름의 연속이자 생산체제의 단절의 역사다. 유럽 사회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르네상스와 종교전쟁으로 묘사하는 기존 역사관을 따르더라도 체사레 보르자의 활동은 그 시기에도 존재하는 문화의 다양성과도-이탈리아는 지리적으로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튀르크 제국과 가까워 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시오노의 작품들에서도 그런 면은 종종 묘사된다-밀접한 연관이 있다.

다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은 체사레 보르자" 라는 추정은 과장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시오노가 분명하게 밝혔다기보다는 '우아한 냉혹'을 읽은 독자들이 생산한 추정인 셈인데, 시오노는 마키아벨리가 당시 이탈리아의 떠오르는 야심가로서의 체사레를 피렌체 외교관 자격으로 접견한 사실을 바탕으로 문학적인 몇 가지 장난을 펼쳤을 뿐이다. "어느 정도 연관은 있지 않겠느냐"고 은근히 분위기를 띄우지만,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에게 체사레는 여전히 위험한 인물임은 분명했다. 다만 시오노는 체사레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평가-이 위험한 사내의 과감함과 교활함-를 긍정한다.

한편 그녀는 이 매력적인 남자와 그 가족을 서술함에 있어서 여자관계와 남색(男色) 또한 빠뜨리지 않는다. 가장 거룩해야 할 교황의 가족이 가장 사치스럽고 방탕했다는 세평은 비단 보르자 가에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교권 전체가 부패해 위클리프와 후스 등의 종교개혁가들을 처형하고 그 추종자들과 적대적인 전쟁상태에 돌입하던 당시 사회에서 교황을 비롯한 지배계급의 부패는 극심했다. 시오노는 그런 역사적인 사실들을 체사레 보르자에 대한 서술의 양념으로 쳐가면서 체사레와 그 일가의 남색이나 자유분방한 성관계를 가볍게 서술한다. 시오노 작품의 미시적인 부분이면서도 항상 등장하는 남색은 작품의 극적인 분위기를 위한 소스이기에 다른 작품들에도 빠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오스만 튀르크 쪽 주인공 메메트 2세가 그의 어린 동성 애인과의 잠자리에서 깨는 걸로 극을 시작한다.

결국 돌아오는 곳은 시오노의 극 구성의 특징인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지점'이다. '우아한 냉혹' 역시 그녀의 서술방식이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며, 논픽션을 자기 식으로 재구성해 내는 힘이 여지없이 발휘된다. 그러나 체사레가 사는 방식은 다중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지극히 억압적인 지배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는 시대를 앞질러가다 '운명의 장난으로' 무너진 비운의 사내임은 분명하다. 그나마 독자들은 그가 재기할 수 있는 가능성 속에서 죽었기에 안도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시오노가 '우아한 냉혹'을 통해 찬미하는 것은 젊은 남자의 과감한 행동력이다. 시오노의 기획은 올리버 스톤 감독이 '알렉산더'를 만들 당시의 인터뷰와 합치된다.

"젊은이가 역사를 이끈 적이 있다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알렉산더와 체사레 보르자 모두 역사를 이끌기 위한 동력을 확보하는 입장에 있다는 걸 전제로 한다 해도, 체사레 보르자에 대한 재구성은 분명 흥미로운 읽을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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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이학문선 1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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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Empire 은 놀라운 책이다. 현상과 그 분석의 깊이, 해박함의 수준을 보아도 충분히 학구적이며,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을 설명하는 과정은 서사적이기도 하다. 맑스적인 혹은 맑스주의적인 글쓰기/글읽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낯선 개념과 그들 간의 혼합 속에서도 어느 정도 독해의 갈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제국은 무수한 오해를 낳을 여지가 있다. 개념의 이해에서부터 '제국'의 지배형태 등등에 대해 자칫하면 '미국이 곧 제국'이라는 등의 오해가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제국'이 자본주의 질서의 확장이라는 개념을 전제하지 않는 한 발생하는 필연적인 실수일 것이며, 제국을 읽는 많은 독자들이 염두에 두면서도 종종 잊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제국은 무수한 학문분야와 현상-국제정치경제학, 맑스주의 역사학, 포스트모더니즘, 사이버펑크, 미국의 탄생과 발전, 인종주의 등등-을 가로지르고 있고, 깊이있는 독해를 위해서는 스피노자, 마키아벨리, 헤겔, 니체, 맑스, 푸코, 들뢰즈/가타리, 그리고 네그리의 다른 저작과 아우토노미아 사상가들을 살펴봐야 한다는 지적인 문턱이 존재한다. 제국의 시도는 분명 종합화이지만, 이 종합화를 네그리/하트와 같이 달려가기 위해서는 각각의 상이한 문턱들을 뛰어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용의 충실함과 해박함이 도리어 독해에 문제가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그리/하트가 제국에서 풀어내고자 하는 시도는 훌륭하다. 특히 두 개의 근대성의 발견과 제국의 탄생, 훈육사회/통제사회를 설명하는 것은 근대 분과학문의 경계를 스스로 넘는 탈근대적인 서술이다. 생각컨대 제국은 또한 문학적이다. 여기서 네그리/하트, 특히 하트의 보이지 않는 공헌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제국하면 으레 네그리를 떠올리지만 공저자인 하트는 문학이 주된 전공(근대 분과학문의 경계 상)으로, 이들은 맑스/엥겔스의 '공산주의 선언'의 선언적 의미와 문학적인 뉘앙스를 멋지게 오마쥬하고 있다. 제국은 '제국'의 탄생을 알리는 선언문인 동시에 '대항제국' Counter-Empire 의 생산을 진지하게 공언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제국이 안고 있는 한계는 종종 지적받는 것처럼 '다중' Muititude 의 존재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맑스가 자본 Capital 의 저작에 몰두하면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생산의 영역으로 내려가' 파헤쳤지만,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 대해서는 별 아이디어를 제시하지 못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에 대해 네그리/하트는 새 저작인 다중을 집필하였지만 아직 살펴보지 못했고, 출간 후의 영향력이 제국에 미치지 못해 '다중'의 생산에 대한 충분한 논쟁거리를 던져주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한다(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으면서 이런 평가를 내리는 것이 위험함은 물론이다. 올바른 비판을 바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중'을 기다린다는 것은 메시아 혹은 대중을 선도할 '전위'를 기다리는 바램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한다.'전위' Vanguard 와 '대중' Mass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가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실천보다 도태되고 고립되는 상황을 낳았다는 것은 수많은 혁명 상황과 현재의 투쟁들이 역사를 통해 고증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우리는 네그리/하트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다중의 징후를 세계의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제국 안에서도 언급되는 68혁명과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LA 폭동 등 뿐만 아니라, 역사의 각 장면들 scene - 수많은 농민반란과 그 실패, 그것이 낳은 보다 반항적이고 지혜로운 대중-에서 '자발성'과 '현명함'으로 무장한 다중은 늘 존재하고 있었다. 한국 역시 혁명적인 상황을 자주 체험하지 않았는가. 한국전쟁을 전후한 이념갈등, 반일투쟁, 반독재투쟁, 80년 서울의 봄과 광주, 87년의 혁명적 국면들. 다중은 오히려 가까이 있지 않을까. 지역에서 주민들과 함께 푸른 희망을 생산해 가는 녹색정치운동, 성인과 미성년자 사이의 이분법을 깨고 사회의 동반자로 서기 위해 노력하는 청소년 운동, 지율 스님의 투쟁과 사람들의 화답이 일구고 있는 천성산 살리기 운동, 여중생의 사망에 분노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촛불을 밝힌 추모집회(물론 그 안에서 기존 운동사회 헤게모니를 쥔 운동가들이 스스로 전위가 되어 '미군 철수'를 위해 집회를 활용했다는 측면과 '질서'라는 근대적인 관념이 운동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훼손했다는 것도 지적되어야 한다)...  

'제국'의 자본주의적인 생체정치가 끊임없이 작동하는 현실에서도 다중은 생산된다. 그것은 나일 수 있고, 내 곁의 친구들일 수도 있다. 흑인 여성 파트타임 노동자일 수도 있고, 아일랜드 탄광 노동자일 수도 있다. 다중의 투쟁전략 또한 다양하다. 잡종성과 다양성이 '제국'을 생산하는 동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중'이 경계와 제한이 없는 '제국'의 리좀에 있기 때문에 거꾸로 잡종성과 다양성은 '다중'의 거름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중'은 국제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전략과 대안은 여전히 실천 속에서 생산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제국은 실천에 대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 뿐이다. 제국은 그것으로 제 역할을 충분히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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