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닦고 스피노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 어두움에 빛을 /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서 /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 기도문이 떠올랐습니다.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 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위로가 필요한 시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경제불황은 우리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각 기업은 명퇴의 바람이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스피노자를 만나봅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수학책을 방불케 하는 공리와 정의, 증명들로 가득합니다. 이 건조한 윤리학의 주제는 우리의 감정입니다. 스피노자에게 자유인의 열쇠는 감정에 있습니다. 감정이란 우리 신체에 일어나는 변용에 대한 표현이지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컨대, 우연적인 외적 원인에 끌려다니는 수동적 상태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 나은 길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나쁜 길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이 수동적 신체를 능동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보여준 다소 난해한 기하학과도 같은 문장들을 '치유의 방법론'으로 만들어보겠다는 구상을 하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셀리 케이건 교수에게 하는 말인듯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자유인은 죽음을 성찰하지 않으며, 그(자유인)의 지혜는 삶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셀리 케이건 교수가 한 마디 안 하고 지나갈 사람은 아니지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우리는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시원. 그저 앉아서 책을 볼 공간과 누우면 더 이상의 여백이 없는 곳. 스피노자는 이 시대의 외로운 사람들, 때로는 좌절의 무릎을 꿇고 누군가 일으켜 세워주길 기다리는 우리의 이웃들을 위로해주기 위해 매일 밤 성냥갑 같은 고시원의 우중충한 화장실에 나타납니다. 그들은 모두 마음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각 질환을 앓고 있는 대상들은 바로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20대 백수, 학업과 친구들과의 건강한 관계가 힘든 여고생의 우울증, 감시받고 있다는 피해망상증, 가족이 나를 구속하고 있다고 믿는 신경증, 몽크와 같은 강박증,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과대망상증, 성적으로 또는 물건에 대한 도착까지 포함하는 도착증, 느닷없이 찾아오는 불안감과 발작의 공황장애, 현실을 외면 또는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했던 것이 중독이 되는 경우, 집착을 넘어 넘어 경계선 인격 장애, 기분의 업 앤 다운이 심한 조울증, 모든 것이 나와 관계가 있다는 생각의 관계망상, 광기가 드러나는 분열증 그리고 끝없는 공포감 등.


어쩌면 우리 모두는 위의 증상을 몇 가지 브렌딩한 칵테일을 가끔 한 잔 씩 목으로 가슴으로 넘기며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평정심을 흩어놓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저자가 이런 증상들을 나열하면서 현학적인 설명만 늘어놓았다면 이 책은 참으로 무거운 주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리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게 그려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등장 인물들은 모두 우리의 이웃입니다. 겉으론 매우 평범해보이는 그 사람들입니다.


등장 인물 중 '상시로 우울증 약을 지니고 다니는 소녀'를 만나볼까요? 

우울증(憂鬱症, depression)은 병리적인 수준의 우울한 상태를 말합니다. 일시적으로 우울한 기분을 느끼는 우울감과는 다르지요. 우울증에 대해선 각 나라마다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그 미케니즘이 명료하게 밝혀지진 않은 상태입니다. 워낙 그 기저 원인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기 때문이지요. 여고 1년생인 이한별. 어느 날 저녁 이 소녀는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 하나를 계산대에 올려 놓지만, 편의점 알바의 눈에 소녀의 점퍼 안에 소주로 추정되는 물체가 숨겨져 있다는 의심을 받자 가방을 던져놓고 도망을 갑니다. 가방안에는 우울증 약과 함께 다량의 수면제가 들어 있었습니다. 저자를 통해 스피노자는 마음의 감기라 불리우는 우울증에 대한 처방을 내려줍니다.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는 내재성의 차원을 갖습니다. 이 내재성의 차원은 관계 맺기의 차원을 의미하며, 관계는 사랑과 욕망을 형성합니다. 부부, 가족, 학교, 감옥, 병원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갖게 되는 생각은 그것이 어떤 관계 맺기인가에 달려 있지 개개인의 마음 상태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어서 스피노자는 사람은 어떤 관계를 갖느냐, 어떤 식의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느냐가 한 사람의 정서를 좌우한다고 생각한답니다.  따라서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우울감을 만들어내는 관계로부터 벗어나거나, 색다른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말이 쉽지 결코 녹록하지 않은 현실이 큰 걸림돌이지요. 상대방이 부모일 경우, 내가 몸 담고 있는 직장의 상사인 경우 등..어쩔수 없이 감당해나가야 하는 관계일 경우가 문제이지요. 그렇게 되면 관계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욕망은 감소되고 위축되며 우울해질 수 밖에 없지요.


스피노자의 말이 이어집니다. (책에 등장하는 스피노자의 말은 저자 자신의 직설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에티카]에 씌여져 있는 글들을 현대적 해석으로 집어 넣은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세상에는 그런 예속된 관계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 속에서 색다른 것, 특이한 것이 생성되고 창발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것은 사랑과 변용의 힘이겠지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색다른 아이디어가 생기고, 어떤 말이든 자꾸 건네고 싶고, 그 사람과 무엇인가 창조해 보고 싶은 생각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는 정서의 기쁨만이 아니라, 창조와 생성의 욕망이 극대화하는 경우겠지요. 저는 그런 관계의 차원이 공동선에 기반한 민주적 관계망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관계에 사로잡혀 꼼짝 못하거나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는 새롭게 배치되고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관계의 차원을 바꾸어야 우울한 감정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습니다. 자유인이라면 자신의 관계를 선택하고 결정할 필요가 있는 셈이죠."


에티카 본문을 인용해보겠습니다.  [3부, 정서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 중 정리 19에 나오는 말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파괴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은 슬퍼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유지되는 것을 표상한다면 기뻐할 것이다.'  자신의 활동 능력을 촉진하고 증대시키는 것은 기쁨이겠지만, 자신의 활동 능력을 감소시키고 억제시키는 것은 슬픔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기쁨을 가져다주는 관계를 찾아나서라는 조언을 해주는군요. 관계의 배치를 바꾼다. 슬픔의 관계를 떠나서 기쁨의 관계 속으로 떠난다. 이 떠남이 결코 셀프서비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럴 때 바로 우리가 주는 위로의 말과 손내밈이 필요한 때입니다.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쇼생크 탈출'처럼 드라마틱한 상황만이 필요할 수도 있지요.


책은 이렇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굳이 [에티카]를 의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에티카]를 아직 구경도 못했다고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책에 그 엑기스가 녹아있으니 그냥 책을 읽으면서 간간히 스피노자를 만나보시면 되겠습니다. 옴니버스 형식의 글들을 읽으면서 '철학' 열차를 탑승한다 생각해보시는 것도 좋을듯합니다. 단, 스피노자가 우리의 눈물을 닦으라고 건네주는 손수건은 그(스피노자)가  안경 세공을 하다가 건네주는 것인만큼 대충 닦는 시늉만 하시고 꼭 되돌려주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