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잡한 지하철이었다. 대개는 러시아워를 피했는데 그날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입성도 칠칠치 못한 채로 지각 면피용 달리기 끝에 가까스로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은 사람들로 미어터질려고 했다. 신촌에서 신도림을 걸쳐서 신림까지. 신자로 시작하는 2호선의 난코스. 신촌에서부터 갑갑했던 지하철은 신도림쯤에서 좀 나아지려나 했더니 더 밀려선 옴쭉달싹도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옆사람의 입김까지 거칠게 전달되는 순간, 어? 이게 뭐지. 하반신 근처에서 어떤 움직임이 감지됐다. 슬쩍 부딪힌게 아니라 노골적으로 비비고, 비트는 느낌.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성추행? 에이 아니겠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그리고 내가 고개만 들면 얼굴을 볼 수도 있는데 그럴 수 있겠어?

 움직임은 끈덕지게 계속됐다. 정말이지 대놓고 손이었다면 손을 꺾거나 손을 꽉 잡아서 이제껏 암기해온 욕들을 한바가지로 해줄 생각이었지만 대체 이 움직임을 뭐라고 말해야한단 말인가. 슬쩍 팔꿈치에 힘을 실어 그 ㅅㄲ의 몸을 제쳤다. 다른 쪽으로 집요하게 파고든다. 어떻게든 해야해. 나만 당하는게 아니잖아. 누군가는 또 피해를 당할거라고. 증명할 수 없다는건 말이 안 돼. 어서. 악이라도 쓰라고.

 나는 살아오면서 작게든 크게든 많은 성추행에 노출돼 왔다. 그럴때마다 호기심이거나 별일이 아닌 것처럼 생각해왔다. 내 불쾌감이 중요한게 아니라 내가 아무리 악을 써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이 더 크게 작용했다. 비겁했고, 무지했다. 추행의 기억이 차곡차곡 포개지면서 다음번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 결심을 하며 질펀한 욕들도 외워보고, 강제로 키스하려고 하면 입을 쫙 벌려서 틈을 안 보이게 하는 방법이 있다는 기상천외한 방어에 대한 후문에도 귀를 기울였다. 이제는 나이도 있고, 목소리도 좀 커졌으니까 행여나 성적인 바운더리를 훼손하는 일이 생긴다면 간과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침묵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지도 못했고, 고함을 지르지도 못했다. 다만.

 신도림에 도착해 사람들 틈에서 뻥소리나게 튀어나와선 그 사람을 노려보는 것 밖에는 할수  있는게 없었다. 눈이 작고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그가 나를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섞이면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평범한 얼굴에 조롱을 담은 표정. 성추행을 당한 순간보다 더 지독한 무기력과 분노가 밀려왔다. 욕이란게 난생 처음 입 밖으로 나왔다. 분해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를 향하기보다는 내 내부로 불쾌함이 쌓여갔다. 왜 나는 대항하지 못했나. 왜 제발 네 욕망을 내 몸에서 떼라고 왜 말하지 못했나.

 성적인 훼손을 받은 사람의 가장 큰 자괴감 중 하나가 자신이 아무것도 못했다는 무기력이라고 한다. 난 힘이 센 여자였을 수도 있고, 괴력의 소녀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번연히 성추행을 할 수 있었던건 아저씨가 용가리 통뼈여서가 아니었다. 나 스스로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틀 안에 갇혀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살아보면 엉덩이를 바짝 앞으로 당긴 후 발 뒤꿈치로 걷어차 상대방의 급소를 공격할 수 있을까? 두꺼운 머리로 박치기를 시도해볼 수 있을까? 고함을 지를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성적인 수치심과 노골적인 추행에 노출되지 않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혹은 이건 네 잘못이 아니라, 상황이 좋지 않았단 위로라도. 그래, 혹은 정말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입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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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4-01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추행의 기억이 더 끔찍해지는 건, 말씀하신 대로 무기력했던 나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보거나 듣거나 할 때도 그때의 기억을 반복해서 재생하게 만든다는 거예요. 그러니 정말 엿같은 일이죠.

Arch 2009-04-01 23:53   좋아요 0 | URL
평안의 마노아님에게서 엿이란 소리가 나올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킹콩걸의 비르지니 데팡트의 말처럼 이런 엿같은 일은 빨리 잊을수록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아요. 자기 책임을 묻는건 너무 어처구니 없는데도 성적 침해에 있어서 피해자들은 늘 셀프플레임으로 더 지난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요.

뷰리풀말미잘 2009-04-0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기억에는, 더 어린시절의 지저분한 기억도 몇 개 있지만 언제 어디서라고 확실히 기억나는 수준은 아니고, 저도 성추행을 당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번은 펍에서 일할때 서빙하는데 어느 놈(인지 년 인지) 뒤에서 엉덩이를 만지더군요. 오, 그 지저분한 느낌이란.. 하지만 너무 피곤했고, 바빴고, 정신이 없어서 그 순간엔 별 생각이 들지도 않았습니다. 또 한번은요 한적한 길을 걸어가는데 어떤 남자가 달려오더니 뒤에서 꼭 껴앉는거에요. "흐흐 * **** **"(자체심의) 라고 하면서요. 허허허허허허허.. 그런 노땅 손목 관절 하나쯤 뽑아버리는 거나, 콧잔등 몇 센치 주저앉히는건 일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이 하얘지더군요. 아무것도 못하고 한 5분쯤 멍때리고 서 있었던 기억이 있네요.

성폭력이 (어쩌면 모든 종류의 폭력이) 여성들만의 문제는 아닌데 왜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을 더 혐오스럽게 느끼는 걸까요? (따지는 거 아닙니다.ㅋㅋ) 아마, (사회적이고 육체적인) 약자에게 상대적 강자가 행사하는 폭력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왜 어릴때도 고만 고만한 녀석들이 싸우는 것 보다 쎈 놈이 약한 놈 괴롭히는 게 더 재수없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군대의 성 폭력은 참 심각한 문제죠. 아, 전 정말 그런 건 못 참아요. 애 새끼건 어른 새끼건.

하긴, 약자가 강자를 추행하는 일은 별로 없겠죠. 제가 최홍만같은 덩치에 그런 외모를 가졌다면 감히 그 녀석이 저를 뒤에서 껴앉았을리는 없었을거에요. 제가 서빙 알바가 아니라 지배인이었다면 제 엉덩이가 안주거리가 됐을 일은 없었겠죠. 흐..

마노아님 말씀처럼 성폭력은 참 엿같은 일이에요. 그 자체도 고통스럽지만 내 사회적, 육체적 위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거든요. 미모로운 우리에게 우리를 지킬 수 있는 대안이란게 겨우 급소공격과, 박치기와, 고함밖에 없다니 역시 '엿같은' 일입니다.


Arch 2009-04-02 00:06   좋아요 0 | URL
미잘님, 사회적 약자 가운데 여성에 대해 쓴거라 그렇게 봤을 수도 있겠네요.
글을 올리고나서 좀 더 생각을 정리해야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모든 폭력, 특히 자신의 우월한 힘을 과시하려는 폭력은 모두 혐오스럽죠. 성폭행이나 성추행은 자기 바운더리 안에서 할 수 있는 치졸한 폭력의 일종이고, 실은 성폭력이나 성추행의 주체가 여성이 될 수도 있는거겠죠. 그런 의미에서 그간 관습적으로 행해졌던 폭력적인 행동에 대한 다른 입장을 써보고 싶었는데 말씀했던 것처럼 별다른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네요.
군대내 성폭력과 문화에 대해서는 경험해보지 않고,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어요. 이건 여성주의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을 볼때의 시각이랑 비슷하다는 것 인정해요. 잘 알 수는 없지만, 미잘님이 제 페이퍼에 공감했던 것처럼 이 문제에 있어서도 동의해주고 지지해주는게 시작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섣부르게 그러면 모병제 하자느니, 군대문화를 전면적으로 바꿔야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말이죠.
성폭력의 가해자는 쾌감보다는 상대방을 굴종시키고, 지배했다는 만족감, 자신이 물리적 힘에서 우위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변태(다른 의미의 변태는 환영함^^)란 의미에서 정말 shit이죠. 자꾸 어떤 대안이 있을까, 이런쪽으로 생각이 흐르고, 그런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란 위악도 떠오르지만 지금으로선 그냥 좀 놔두려구요. 그냥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