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와 둘이 사는 살림이 시작됐다. 내 새끼가 지금 함께 있다는 것이 이토록 큰 위안일줄 몰랐다.  그 애와 둘이 먹을 음식을 이렇게 만들고 밑반찬을 하고 그랬는데 자꾸만 음식이 남아서  버려야 했다.  내가 네 식구분의 음식을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서늘해진 것은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계절 과일을 사거나 야채를 살 때도 예전의 버릇대로였다.  그 애가 학교로 가고 나면 나 혼자 남았다.  맑고 밝은 가을 햇살이 방안 가득 찼다.  아주 오랜만에 베토벤을 들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며 지나간 내 청춘의 적막함과 조우하려고 해봤다.  깊고 투명한 공허감 속에 가만히 들어갔다.  자취하는 사람의 살림같은 단순한 집안을 돌아보았다.  저 햇볕이 없었다면 얼마나 우울했을까.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  행복하다.  자꾸만 자신에게 말했다.  그리고 마루를 청소하고 방을 청소하고 자꾸만 음식을 만들고 일기를 썼다.  그러고도 시간이 나면 후다닥 산으로 올라갔다.  산으로 오를 때, 어쩌면 그렇게 분노가 마치 지층처럼 솟구쳐 오르는지. 사람들이 왜 이혼이라는 이별을 졸렬하게 하는지,문득 이해할 것 같았다.  비열하고 야비하고 졸렬하게 하면서 얻어내는건 아마 정을 털어내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비열할 수도 야비할 수도 졸렬할 수도 없었다.  <그 매듭은 누가 풀까>를 교정보고 또 일거리가 생기면 어느 것 하나 거절하지 않고 매달렸고 또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참 이상했다.  돌아보면 이런 단순소박한 삶은 내가 늘 꿈꾸던 것이었다.  행복보다 더 익숙한 것이 쓸쓸함같은 것이었다.  어느 때,행복이 느껴지면 울컥 겁이 나던 거. 직업병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직업병이 남편을 떠나게 하는 깊은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내 처지를 나보다 더 헤아려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주변 사람들의 나에 대한 진정성이 드러 난다고 하던데 꼭 그랬다.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집을 얻는데 흔쾌히 돈을 빌려주고 집안정리를 도와주고 내 파도치는 감정이 쏟아지는 거품을 견뎌주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내 처지를 알게 된 사람들 외엔 내가 '이혼했다'고 먼저 말하지 못했다. 그토록 내게이혼해야 한다고 말하던 친구들에게조차 말을 못했다.  부끄러워서?  열패감 때문에?   "엄마 정말 이혼했어? "  때론 내 갈팡질팡하는 감정이 지겨워진 딸이 내게 물었다.  몸 둘바를 모르게 부끄러웠다.  " 시간이 필요하단다."   딸보다 더 어리디어려져버린 내가 말했다.  "난 엄마가 당당했으면 좋겠어! "  "그래. 시간이 필요하단다."  주눅든 내가 말했다.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28년 결혼 생활끝에 내 영혼이 남루하다면 그건 내가 잘못 산 것이 분명했다.  아이들의 지적대로 내 생명이 병든 것이 분명했다........중략.........

"당신은 소설을 못쓰면 죽은 여자 아니냐. 그러니 나가라. "  그가 막판에 한 말 중 하나였다.  그도 깊이 헤아리지 못했을 한 여자의 운명의 분열증을 그가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잡을 수 없는 남편에 대한 집착. 그의 아내에 대한 환멸은 이게 아니었을까.  나는 처녀로 28년 살다가 결혼해서 28년 살았다.  그리고 쉰 여섯 살이됐다. 기운도 많이 늙었고 폐경된 지 오래다.  여자인 나를 남자의 말뚝에 고삐 매려고 아득바득 시달리는 어리석은 인생을 다시는 살지 않으려고 한다.  남자를 벗어 던지자 비로소 내가 사람인 것이 느껴진다.  나를 깊은 병에 들도록 한 분노는 남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학대한 것에 대한 분노라는 걸, 이제 깊이 깨달았다.  큰딸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당부한 말이 있었다.   "누구에게 잘해주려고 애쓰지 말것. 엄마만 생각할 것."   인생도 그저 인생이듯이 이혼도 그저 이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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