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알라딘에서 '출판사에서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으로 쓴 리뷰'라는 일종의 공지인지 경고인지를 내건 글을 자주 보게 된다. 결국 출판사 의뢰로 작성한 광고성/홍보용 리뷰임을 스스로 밝힌 셈인데, 한때 신간마다 (심지어 미간행 도서에도!) 수십 수백 개씩 달라붙던 무성의한 동어반복의 노골적인 가짜 리뷰에 비하면 양반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출판사건 서점이건 책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을 터이니, 상품이 조금이라도 더 잘 눈에 띄도록 갖가지 광고 방법을 궁리하는 것이야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거기에도 일종의 한도는 있는 법이어서 어느 순간 지나치다 싶은 생각이 들면 오히려 기만적이라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한때 유튜브를 휩쓸었던 저 뒷광고 논란의 핵심도 결국 그것이 아니었을까.


뒷광고 논란 이후 유튜브에서는 광고성 콘텐츠임을 확실히 공지하는 것이 규범처럼 된 모양이니, 머지않아 알라딘에서도 실구매자를 가장하던 가짜 리뷰가 줄어드는 대신 출판사 협찬임을 먼저 밝히는 광고성 리뷰가 늘어났던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보인다. 물론 나귀님처럼 둔한 사람의 눈에도 밟히는 것을 보면, 이제는 그마저 효과가 거의 다해가는 듯하지만.


그나저나 협찬 리뷰의 공지에서 하나 의아한 것은 '주관적으로 쓴 리뷰'라는 구절이다. 십중팔구 자발적인 글이 아니라 의뢰받은 글임을 알리려는 의도이겠지만, 사실 상품 리뷰나 도서 평론이야 애초부터 작성자의 '주관적'인 의견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예를 들어 신문사 서평이건, 이동진 유튜브건, 나귀님 페이퍼건 주관적이기는 마찬가지 아니냐는 것이다.


협찬 리뷰마다 대동소이한 경고문을 내건 것을 보면 십중팔구 출판사나 대행업체나 서점 차원에서 어떤 지침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한데, 막상 그 의미에 대한 숙고가 충분하지 못한 까닭에 자발성/광고성을 객관성/주관성과 혼동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엄밀한 의미의 객관성이라면 작성자의 리뷰는 물론이고 데카르트의 저술에서도 찾기 힘들 테니까.


반대로 엄밀한 의미의 주관성도 달성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유튜브의 '앞광고'도 협찬 리뷰인 한에는 설령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도 감히 지적할 수 없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품 리뷰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내용은 장점만 늘어놓지 않고 단점도 지목하는 내용임을 감안하면, 홍보 목적의 협찬 리뷰가 지닌 태생적 한계는 매우 뚜렷하다고 봐야겠다.


그렇게 보자면 '주관적 리뷰'로 자칭하는 협찬 리뷰의 문제는 '충분히 주관적'이지 못했다는 점이 아닐까. 예를 들어 돌고래유괴단의 광고처럼 '이게 광고인지 디스인지' 헛갈릴 정도는 되어야만, 또는 최근 나온 스타니스와프 렘의 가상 서평집처럼 아예 있지도 않은 책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주관성에 가까이 갔다고 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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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턴 와일더의 <운명의 다리>가 새로 번역되어 나온 모양이다. 물론 원제는 이번에 나온 번역서의 제목처럼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이지만, 나귀님은 1990년대에 나온 동아출판사의 번역서로 처음 접했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그 제목으로 기억하고 있다. 중편 소설 분량이다 보니 단행본으로 나온다면 문고본 정도가 적절해 보이는데, 이번에는 국판 판형인 듯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알라딘에 올라온 새로운 번역서의 소개 글에서 "한국에서도 1950년대부터 읽힌 책으로 2025년 '신형철 해제본'으로 4번째 판을 출간한다"라고 떡하니 적어 놓았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1958년 신양사 이호성 번역본, 1994년 동아출판사 유승각 번역본, 2010년 샘터 김영선 번역본 같은 이전 번역본을 표지 사진과 함께 줄줄이 소개해 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소설의 번역본이 책 소개에서 열거한 네 가지 외에도 하나 더 있다는 점이다. 나귀님이 가진 <현대미국문학전집>(한국아메리카학회 편역, 시사영어사, 1971)의 제2권에 극작가 이근삼의 번역으로 수록된 "도온턴 와일더"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 소개에서 "4번째" 번역본이라고 주장한 내용은 사실과 어긋나게 된다.


차라리 그냥 '예전부터 여러 차례 번역된 책'이라든지, '대략 20년 간격으로 재번역된 책' 정도로만 말하고 넘어갔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굳이 "4번째"라고 단언하다 보니 틀린 셈이다. 또 하나 의아한 점은 저자나 번역자보다 해제를 쓴 '평론가'를 부각시켰다는 점인데, 십중팔구 그 명성을 빌리려는 의도이겠지만 뭔가 배보다 배꼽이 더 커 보이기도 한다.


아울러 평론가와 번역가의 해설은 나귀님이 기억하는 책의 내용과는 살짝 차이가 있어 보이는 점도 뭔가 의아하다. 비록 전문은 읽지 못했지만, 책 소개에 발췌된 부분만 보면 불행과 재난에 대한 위로를 얻을 수 있다고 보는 듯한데, 이 소설은 오히려 등장인물들의 불운한 최후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회의적이고 실존적인 입장을 줄곧 취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다시 책을 꺼내 뒤적여 보니, 실제로 이 소설은 회의와 위로 모두를 이야기하고 있었음을 뒤늦게야 깨달을 수 있었다. 소설의 제목에서 언급된 다리가 끊어지며 사망자 다섯 명이 발생한 날, 역시나 그 다리를 건너려다가 가까스로 재난을 모면한 수도사는 '왜 그들은 죽고 나는 살았을까?' 하는 의문에서 사망자 다섯 명의 생전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결국 수도사가 내린 결론은 사망자 다섯 명의 죽음에 딱히 어떤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마치 예수가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에서 무너진 망대의 사망자'를 언급하며 더 간략히 요약했듯이, 또는 우주 규모의 부조리극인 '히치하이커 안내서' 소설에서도 반복해서 묘사했듯이, 인생과 세계와 우주는 무자비할 뿐이며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무기력할 뿐이었다.


하지만 수도사의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후일담에서 저자는 무의미하게 죽은 다섯 명과 인연을 나누었던 수녀원장이 그들의 유족과 지인과 새로운 인연을 맺음으로써 뭔가 유의미한 행동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나귀님이 보기에는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마 그래서 기꺼이 망각했던 것이 아닐까!) 결국 저자는 위로하는 결론을 제시한 셈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위로는 어디까지나 살아남은 자들의 몫일 뿐이고, 죽어버린 자들의 몫까지는 아니다. 아울러 책임 소재를 따질 수 없는 소설 속 재난과 달리 (왜냐하면 문제의 다리는 식민지 이전 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니까) 세월호나 이태원이나 최근의 제주항공 참사 같은 사건에서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일이라는 체념 대신 정의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용돈 6만 원을 가지고 떠났다가 죽어서 돌아온 아이라든지, 그 사실에 분노해 세상 앞에 나섰던 아버지의 과거 행적에서 그 비극의 단서를 찾아내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한 일인 반면, 더 일찍 침몰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만큼 갖가지 문제를 안고 있던 여객선을 방치했던 회사라든지, 결국 침몰시킨 승무원이라든지에 대해서는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테니까.


소설에서 수도사가 사망자의 이력을 조사한 까닭도 종교인의 입장에서 '정의'를 추구하려는 것이었다. 즉 선악을 심판하는 하느님의 정의가 그 비극에 개입되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우리는 참사를 겪을 때마다 운명의 장난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원인 제공자에 대한 정의를 요구하고, 그런 다음에나 위로를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이겠다.


그러고 보면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모두에서는 정의 추구와 위로 제공이 혼동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사건의 원인을 알아내서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겠지만, 엉뚱하게도 사망자나 유족의 행동이나 이력을 들먹이기 일쑤였고, 유족을 지원한다는 쪽에서도 각종 추모 사업을 내세우면서 어설픈 위로를 남발하지는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드는 탓이다.


급기야 최근의 제주항공 사고에서는 관계 당국의 언론 브리핑에서 초장부터 '추모 사업'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였다. 정의를 실현하기도 전에 어설픈 위로부터 언급했으니, 직접 관계가 없는 일반 시청자인 나귀님조차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 앞에서 정의 대신 위로부터 이야기한 것이 과연 옳았을까...



[*] 그나저나 알라딘 책소개에 올라온 1994년 동아출판사 유승각 번역본의 표지 사진은 책껍데기가 없는 하드커버 알맹이만의 모습이다. 참고로 나귀님이 가진 책의 사진을 올려보자면 이렇게 생겼다.




[**] 아래는 극작가 이근삼의 번역으로 "도온턴 와일더"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수록된 <현대미국문학전집>(한국아메리카학회 편역, 시사영어사, 1971)의 제2권 케이스 뒷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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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인터넷 밈 가운데 "다시 보니 선녀 같다"라는 것이 있다. 홍콩 배우 주성치가 나온 영화 <당백호점추향>의 한 장면인데, 남자 주인공 당백호(주성치)가 여자 주인공 추향(공리)을 처음 보자마자 '미녀라더니 별로인데' 하고 실망했다가, 곧이어 그 옆에 있는 다른 여자들이 박색임을 깨닫고는 '다시 보니 선녀 같다!' 하고 잽싸게 태세 전환을 하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유명한 밈이 유래한 코미디 영화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 원작인 "당백호점추향"은 중국의 유명한 고전 소설이다. 이른바 '삼언이박'(三言二拍), 또는 '삼언양박'(三言兩拍)으로 일컬어지는 중국 명대의 다섯 가지 단편 소설집 가운데 하나인 풍몽룡의 <경세통언>에 수록되었다가, 훗날 '삼언이박'의 선집인 <금고기관>에도 수록된 작품이다.


'삼언이박'에 수록된 단편은 모두 200편인데, <금고기관>은 그중 40편만 골라 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언>이나 <금고기관>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번역본이 여럿이지만 대부분 완역이 아니라 선역이었다. 최근에야 <금고기관> 완역본이 나왔고, '삼언이박' 가운데 <유세명언>과 <경세통언>도 한 번역자의 노력으로 완역본이 나왔으니, 나머지도 기대해 볼 만하겠다.


해당 단편은 영화에도 사용된 "당백호점추향"(唐伯虎點秋香), 즉 "당백호가 추향을 점찍었다"는 제목으로 유명하지만, <경세통언>에는 "당해원일소인연"(唐解元一笑姻缘), 즉 "당해원과 한 번의 웃음으로 맺어진 인연"이라는 제목으로, <금고기관>에는 "당해원완세출기"(唐解元玩世出奇), 즉 "당해원이 기발한 계책으로 사람들을 놀리다"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그 주인공은 명대에 화가 겸 문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실존 인물 당인(唐寅, 1470-1524)이다. '백호'(伯虎)라는 호를 따서 '당백호'로도 통하고, '해원'(解元, 수석)으로 과거에 합격해서 '당해원'으로도 통했다. 소설에서 묘사된 추향과의 연애담이야 물론 후대의 창작에 불과하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 제작된 영화와 드라마만 해도 20여 편에 달할 만큼 인기였다.


소설에서는 풍류남아인 당백호가 우연히 타지의 부잣집 하녀 추향의 모습에 반한 나머지, 자기 정체를 속이고 그 집에 들어가 서기 노릇을 하다가 주인에게 신임을 얻고 그녀와 결혼을 해서 야반도주한다. 가족처럼 여겼던 부부가 재산도 고스란히 반납하고 사라진 것에 의아해 하던 부자는 뒤늦게야 그가 명사 당백호임을 알게 되어 놀라게 된다는 것이 결말이다.


반면 주성치의 영화에서는 "다시 보니 선녀 같다" 밈으로 대번 알 수 있듯이 당백호가 부잣집에 들어가 추향과 인연을 맺어 보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겪는 갖가지 우여곡절을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다고 기억한다. 비유하자면 <춘향전>을 뒤집은 마당놀이 <방자전> 비슷한 셈인데, 우리나라에는 이 이야기가 이 영화로만 알려졌으니 살짝 아쉽기도 하다.


그나저나 저 인터넷 밈을 최근 다시 떠올린 까닭은, 비상 계엄 이후 체포와 탄핵 과정에서 '과연 일국의 대통령까지 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옹졸한 태도로 일관한 윤석열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박근혜는 선녀였다'라는 평가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라리 톨스토이의 유명한 말을 응용해 '정치인의 옹졸함은 각자 다르게 마련'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제아무리 윤석열이 한심하다고 해서, 그에 앞서 탄핵 파면 제1호 기록을 세운 박근혜가 상대적으로 훌륭해질 리는 없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문재인이나 이명박이나 노무현이나 김대중이나 김영삼이나 그 이전의 여러 대통령처럼 저마다 큰 사고 몇 개씩은 치고 사라진 작자들이 훌륭해질 리도 없다. 저마다 방식은 달라도 국민을 괴롭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어제 뉴스를 보니 민주당 대선 후보로 이재명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비상 계엄과 탄핵 심판 이후 지금까지의 전개를 보면 당선은 거의 확실해 보이지만, 나귀님으로선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선택지이다. 막말부터 위증까지 각종 구설수에 올랐던 사람임을 감안하면 더욱 믿음이 가지 않는다. 물론 누군가는 그를 보며 "다시 보니 선녀 같다"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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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양세찬의 유튜브 영상 중에 함께 일하는 방송 관계자들의 사무실을 소개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대부분 여성인 직원들의 책상마다 갖가지 인형이며 소품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그 숫자도 놀랍지만 그 가격은 더욱 놀라운데, 결국 '귀엽지만 쓸모 없는' 물건을 왜 이렇게 모으느냐는 질문에 그 소유주 대부분은 위로와 격려를 얻는 힐링용품이라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유재석의 유튜브 영상에서도 특이하게 레고가 협찬 광고로 들어오자, 순수한 재미 외에도 '마음이 불안한 분들이 조립하며 위로를 받는 상품'이라며 의외의 힐링 효과를 강조했던 것이 기억난다. 어쩌면 가방이며 배낭에 이런저런 인형을 줄줄이 달고 다니는 아가씨들도 (역시나 대부분 아가씨들이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십중팔구는 그 의도를 묻는 질문에 그냥 '귀여워서'라고만 대답하고 말겠지만, 어찌 보면 네잎 클로버나 토끼 발이나 말굽 편자나 트럭 운전석 앞에 줄지어 늘어놓은 씨디(?)마냥 하루하루 무사와 행운을 기원하며 부지불식 간에 휴대하는 일종의 부적일 수도 있겠다. 예전에는 진짜 부적을 얻어가지고 옷 주머니나 가방 안에 넣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 원조는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라헬의 '드라빔'일 수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남편을 따라간 딸년이 발칙하게도 평소 아버지가 모시던 작은 우상을 훔쳐가고 (이번에도 아가씨구나!) 노발대발한 아버지가 뒤쫓아오자 얼른 엉덩이 밑에 깔고 앉은 채 '오늘은 그날이라 움직일 수 없다'고 시치미를 떼자, 결국 아버지도 포기하고 떠나 버렸다 전한다.


여기서 말하는 '드라빔'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문맥상 일종의 우상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나중에 구약성서 "사무엘상"에서도 비슷하게 장인과 사위와 딸의 삼각 구도에서 '드라빔'이 등장하는데, 사울의 딸 미갈이 남편 다윗을 몰래 도피시키고 나서 주위의 눈을 속이기 위해 '드라빔'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놓았다고 한다.


이 내용을 근거로 저 우상은 엉덩이로 깔고 앉으면 안 보일만큼 작은 것에서부터,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놓으면 사람이라 착각할 만큼 큰 것까지 종류가 다양했다고도 해석하는 모양이다. 최근의 각종 피규어도 손바닥만한 것에서부터 사람만한 것까지 다양하게 나오고 있으니, 어쩌면 이런 '덕질' 문화도 무려 '성경적인 근거'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겠다.


작은 우상이라고 하니 프로이트의 수집품도 생각난다. 대부분 이집트나 그리스나 중국에서 제작된 골동품 조각상인데, 책장과 진열장에는 물론이고 책상 위에까지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고 전한다. 프로이트는 이런 골동품을 종종 만지작거리기도 했다는데, 자기는 심리학 책보다 고고학 책을 더 많이 읽었다고 말했다는 일화를 보면 단순한 취미 이상이었던 듯하다.


나귀님이 보기에는 이 모두가 실제로는 종교적 심성의 발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배낭에 달린 인형이나 책상에 놓인 피규어도 이른바 '영성에 관심은 있지만 종교까지는 없는' 세대의 풍조인 셈이다. 기성 종교의 틀 안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타로와 점에 열광하는 것이라든지, 이름부터 '아이돌(우상)'인 대상에 열광해 시간과 금전을 적극 투자하는 것도 그렇다.


물론 위로는 대통령부터 아래로는 초등학생까지 저마다의 미신에 사로잡혀 우행을 일삼는 대한민국의 암울한 현실 운운 이야기하고 싶은 것까지는 아니다. 다만 우상 숭배고 기복 신앙이고 간에,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나약함을 인정하는 순간에 자연스레 솟아나는 종교적 심성의 표현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어딘가 친근함을 느끼게 되어 한 마디 해 보는 것뿐이다.


나귀님이 즐겨 보는 '앵무새 루몽다로' 유튜브 영상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크리스천 앵무새'이다. 평소에도 주인(엄마)의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내는 것으로 유명한 앵무새 루이가 '하느님'이니 '아멘' 하면서 기도까지 똑같이 따라하는 것인데, 물론 문자 그대로 '앵무새 같은 행동'일 뿐이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그 행동에는 의외로 의미심장한 데가 없지 않다.


평소 루이가 따라하는 말은 엄마의 작별 인사("잘해구와!")와 웃음소리("깕깕깕깕깕깕!")와 딸 꾸지람("유정아, 영어 숙제 해")처럼 일상다반사인 발언들이었다. 그러니 언젠가 앵무새가 발을 다쳤을 때도 엄마가 그 앞에서 '하느님, 우리 루이 낫게 해주세요, 아멘'이라는 기도를 마치 주문처럼 되풀이하다 보니, 급기야 앵무새도 그 말을 외우게 된 것이 아닐까.


앵무새의 엉뚱한 기도가 엄마의 안타까운 마음에서 비롯되었듯이, 배낭에 매단 인형이며 책상에 놓은 피규어도 그 소유주 각자의 바람과 기대의 표현, 어쩌면 불안과 초조의 표현일 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작아질 때가 있고, 마음이 허해질 때가 있게 마련이니, 그때가 되면 인형과 피규어, 우상과 부적, 루몽다로와 루이후이아여사가 필요할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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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맥머트리 책을 찾으려고 책장을 뒤지다 보니 (2종 3권인데 하나는 결국 찾지 못했다) 지난번에 사다 놓은 토마스 만 정치평론집 <예술과 정치>가 눈에 띈다. 마침 예전에 꺼내 보고 한동안 방치한 예술론집 <숲 속의 예술철학>을 도로 꽂은 직후라서, 이것도 가져가서 함께 꽂으려고 일단 꺼내 뒤적이다 보니, 책 앞에 적힌 플라톤의 인용문이 눈에 들어온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One of the penalties for refusing to participate in politics is that you end up being governed by your inferiors) - 플라톤, <국가>". 토마스 만의 책이라면 십중팔구 독일어에서 옮겼을 터인데, 특이하게도 이 인용문에는 독일어나 희랍어 대신 영역문이 병기되어 있었다.


문득 '플라톤에 이런 구절이 있었나?' 하는 의문도 들었는데, 뭔가 좀 지나치게 신랄한 발언처럼 들려서였다. 최근 검색한 체스터튼의 (실제로는 출처불명인) '무신론자는 아무 거나 믿는다' 명언처럼 혹시 와전된 것은 아닐까 싶어 구글링해 보니, <국가> 제1권 347c에 실제로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그런데 박종현 번역본을 꺼내 보니 원래의 문맥은 영 달랐다.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에,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통치를 당하는 것일세."(101쪽) 희랍어 원문 번역에는 토마스 만 책의 인용문에서 유난히 두드러진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이라는 표현도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토마스 만 책에 병기된 영역문 역시 앞에 함께 나온 번역문보다는 박종현 번역문에 더 가까웠다.


해당 영역문을 직역하자면 "정치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치르는 대가 중 하나는 결국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통치되는 것이다"쯤 된다. 여기에 굳이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 같은 자극적인 표현을 집어넣었으니, 이쯤 되면 의도적인 왜곡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듯하다. 게다가 편역서임을 감안하면, 원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번역자/출판사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더욱 이상한 점은 책 앞(15쪽)에 위처럼 왜곡된 인용문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책 뒤(416쪽)에 해당 구절을 전후한 <국가> 제1권 347c의 문장이 여러 개 더 인용되어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해당 구절도 여기서는 적절히 옮겼다. "훌륭한 분들이 스스로 통치에 나서기를 거부할 때 그들이 치르는 가장 큰 대가는 자기들보다 못한 사람들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똑같은 내용인데 앞과 뒤의 인용문이 달리 번역되었으니, 결국 뭔가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봐야 하는 걸까? 혹시 이 책에 수록된 글 가운데 하나에서 토마스 만이 해당 인용문의 왜곡과 진의에 대해, 또는 플라톤과 <국가>에 대해, 또는 정치 참여에 대해 설명한 것이 있나 뒤적여 보았는데, 막상 관련 내용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지는 않았던 듯하니 의아할 따름이다.


더 큰 문제는 <국가>에서의 원래 문맥을 감안할 경우, 위와 같이 똑 떼어서 인용해 놓으면 자칫 오해가 생기기 쉽다는 점이다. 즉 토마스 만 책 앞에 나온 인용문만 보면 마치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최악의 통치자를 낳는다'로 이해하기 쉽지만, 플라톤의 발언 요지는 '훌륭한 사람이 정치를 하지 않으면 훌륭하지 못한 사람에게 통치를 당한다'는 뜻이었다.


즉 플라톤은 선거 같은 일반 대중의 정치 참여를 독려한 것이 아니라, 엘리트의 정치 참여의 필연성을 입증하려 위와 같은 논리를 제시했던 셈이다. 따라서 번역자/출판사가 혹시라도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대한 옹호로서 플라톤의 인용문을 집어넣었다고 한다면 문맥의 왜곡이고,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 같은 자극적인 표현을 집어넣은 것도 온당하다 볼 수 없다. 


게다가 번역문과 다른 영역문을 병기한 것이며, 달리 옮긴 인용문을 추가한 것도 고의성을 드러내니, 정확한 의도야 불명이라도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면 그저 인용문 하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 책 전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다른 문장은 충실히 번역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앞으로 이 번역자/출판사는 피해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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