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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다정한 사람
은희경 외 지음 / 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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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걸음은 느리다. 시야는 넓고 너그럽다. 그들이 선 풍경과 그들의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어 보는 이를 흐뭇하게 만든다. 낯설지만 설렘이 가득한 그곳에서 먹고 마시는 식사와 와인에 대한 부러움은 덤이다. 나는 내 자리를 떠나는 일을 지독하게 두려워한다. 가진 것도 잃을 것도 변변치 않으면서 어찌 그리되었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 얻은 익숙함을 내려놓고 떠날 용기가 없었다. 지난 시간들 속에, 대학을 다닐 때, 한 번쯤 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낯섦에 대한 스트레스와 불안을 마주했다면. 어느 먼 곳에 그날의 나를 두고 와 다시 찾아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놓았다면. 삶은 (기억의 측면에서) 조금 더 풍요롭지 않았을까. 휴학 없이 대학 졸업, 취업, 처음 한 연애, 결혼, 어느 새 품에 두 아이. 20대를 기록하니 그렇다. 여느 사람들 보다 조금은 빨리 살아온 것 같은 기분.

떠나려야 떠날 수가 없는 현실.

그러면서도 그것을 핑계로 나를 위안하며 방치해 온 것은 아닌가. 문득 묻는다.

 

여기,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여행이야기가 있다. 모두 한 번쯤은 매체를 통해 책을 통해 만났고 멋지다고 생각했던 분들이다. 그런 열 분이 중앙일보 기자의 제안으로 릴레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병률 작가가 동행해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각자의 과거나 미래가 놓여 있는 곳으로 여행지를 정해 떠났고 그곳에서 문화와 질서, 이방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을 즐겼다. 떠난 자리에서 그들은 자유로워 보였다. 지난 시간을 더듬으며 웃었다. 열 분의 여행자의 기록을 보면 모두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분야의 색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자가 살아온 삶과 몸담은 분야에 맞춰진 시선으로 자연스레 여행지를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이 당연하면서도 신기했다. 모두 한 곳의 여행지를 두고 여행을 떠나와 글을 썼다해도 글에 담았을 이야기는 서로 닮지 못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땅에서 소와 염소와 양떼를 돌보는 사람에게는 그 광대함이 곧 외로움일 수도 있다. 차를 타고 두세 시간씩 달리면 나타나던 깊은 골짜기의 찻집들. 그 주인은 차를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만나기 위해 찻집을 열어놓고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서 손님이 떠나지 못하도록 계속 차를 권하기도 하고, 내가 갑자기 나타난 노란 수선화 언덕에 탄성을 지르며 차를 세우고 그 속으로 달려들어갔을 때, 그 옆 어딘가의 작은 농장에서 어쩌면 어떤 외로운 사람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p.46, 은희경 <애인 만나러 호주에 갔지요, 그의 이름은 와인이고요. 흠뻑 취했답니다, 저 풍경 때문에> 중에서

 

누군가에겐 일터이며 자신을 가둔 외로운 장소가 또 누군가에겐 떠날 곳이 되며 마음을 내려놓는 여행지가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연의 힘에 의해 만나 말을 나누게 된 사람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치유를 얻는다. 여행자는 여행지에서 낯선 이가 선뜻 내준 따뜻한 밥과 차에 한없이 겸손해진다. 자신이 좀 더 덜 갖고, 가진 것을 나누고픈 마음을 갖게 된다. 그곳에서 나는 누군가가 바라보던 내가 아니다. 나는 좀 더 달라질 수 있고, 다르게 행동해볼 수 있다. 너 왜 그래? 할 사람 없이 누구나 호감을 갖고 바라봐주는 곳. 그곳이 여행자가 택한 여행지의 모습이다.

 

은희경 작가의 '와이너리'. 그녀는 와인을 매개로 하여 자신에게 박힌 딱딱한 선입견을 부드럽게 하고, 삶을 유연하게 만드는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찾았고 그리워했다. 이명세 감독의 태국은 영화를 찍을 장소를 물색하며 얻은 곳이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끼는 여행. 여행지를 따라 꿈을 따라 영화를 그려가는 모습에서 많은 시행착오로 얻은 연륜이 묻어났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으로 떠난 이병률 작가. 그곳의 문화와 사는 모습을 담으면서도 역시 그의 글에는 따뜻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사람들이 산타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 흰 눈이 가득한 그곳에서 따뜻함을 느끼는 건 그 동심 때문 일 것이다.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며 시작된 백영옥 작가의 홍콩 여행은 청량했다. 무엇인가를 시도하려는 모습들이 그랬다. 다리 밑에서 만난 할머니들. 그 중 미워하는 사람을 대신 때려주는 의식 속 할머니가 인상깊었다. 푸른 바다와 섬이 가득한 김훈 작가의 여행.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섬을 여행하면서 그는 문장화 할 수 없는 자연의 힘과 그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의 날카로운 문장은 보는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박칼린의 뉴칼레도니아 여행은 일상을 떠난 그녀의 여유가 묻어났다. 바다에서 만나는 '천국의 그윽한 바람'. 떠남으로써 얻는 상상의 공간과 생각의 전환. 그녀는 상상하는 일과 그것을 이루는 일을 즐기는 듯 보였다. 정갈한 일본에서 만난 요리사 박찬일의 여행. 역시 음식. 너무 먹고 싶어서 혼이 났다. 한 곳에 담긴 여러 개의 정성들. 아기자기한 도시락 속에서 그는 옛 생각들을 꺼내고 사람을 꺼낸다. 지역마다 다른 도시락 취미와 역사 속 도시락 이야기도 살짝 들을 수 있었다. 가수 장기하는 영국에서 마시고, 보고, 듣는 여행을 즐겼다. 그의 음악 세계가 구현되기까지 영감을 준 아티스트의 이야기와 어느 거리, 지는 노을 앞에 서서 음악을 들으며 눈시울을 붉히는 남자의 감성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세렌디피디(serendipity, 뜻밖의 발견이나 운 좋게 발견한 것). 그것은 혼자 하는 여행이 주는 가장 짜릿한 선물이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여행 중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기 마련인데, 그것이 좋은 일일 경우에는 그 순간이 여행의 절정으로 기억되곤 하는 것이다. 나는 길치라서 어디가 어딘지를 잘 알지 못하지만, 또 길치라서 세렌디피티를 자주 마주치기도 한다. -p.286, 장기하 <나 돌아가면 얼마나 이곳을 그리워할까> 중에서

 

'그리운 것들과의 재회'를 위해 뉴욕을 찾는 신경숙 작가. 그녀의 발길이 닿는 거리마다 자유로운 공연이 있고 그 문화를 즐길 줄 아는 뉴욕 사람들의 모습이 좋았다. 산책을 통해 자신을 위로하며 그 도시에 자신의 자리를 만든 작가가 그곳에서 어떤 작품을 쓰셨을지 궁금했다. 캐나다를 찾은 가수 이적은 불친절했던 입국심사부터 마음이 무거웠던 여행이었지만 거리를 채우는 음악과 특별하고 멋진 공연, 그리고 음식에 대한 이야기로 두려웠던 캐나다 여행기를 채웠다. 두려움을 뚫고 나가 만나는 낯선 도시의 친절만큼 여행자를 감동하게 하는 것도 없는 듯하다.

 

거리 곳곳의, 아주 사소한 풍경들마저도 아름다운 기억이 되는 여행. 현지인들은 여행자의 사진기 속에서 환하게 웃으며 그들의 기억에 그리움을 더한다. 그들이 있는 풍경 속에 나를 슬쩍 기워넣어 보았다. 나는 어떤 여행기를 쓸 수 있을까. 꿈꾸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내게 미래가, 생겨났다.

 

늘 매체에서 보는 모습이 아닌 낯선 곳에 선 그들의 또다른 모습을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가볍게 읽기 좋겠다. 나는 조금 아쉽기도 했는데, 열 분의 여행기를 한 권으로 묶어야 했기 때문이었을까. 여행자마다의 정해진 분량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든 분들의 글이 여행지에서 이동한 장소와 먹은 것, 그곳에서 한 일을 따라가느라 바빴다. 그곳에 머물러 보다 따뜻한, 인간적인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길 기대했는데 깊게 그러지 못했다. 여행에 동행한 이병률 작가가 그들을 바라본 시선에서 모든 글을 썼다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우리는 여행 지침서가 아닌 여행 에세이를 선택한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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