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 라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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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가는 글을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쓰고 어떤 작가는 몇 단어로 함축해서 쓴다. 어떤 작품은 그런 미사여구가 어울리고 어떤 작품은 간결한 문체가 어울린다. 이런 점이 딱 맞아 떨어질 때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작가의 작품은 내 선호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연히 이 작품에 경찰과 사건이 등장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무작정 달려들었다.

나는 지금도 4부작으로 쓰여 진 레오나르도 파두라의 <마스카라>를 단 한편밖에 못 읽었다는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다. 아무리 출판사에 얘기를 해도 또 다른 출판사에 문의를 해도 이 시리즈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때 내가 대리 만족한 작품이 아멜리 노통의 <적의 화장법>이었다. 그 작품을 보고 오, 맘에 드는 작가 발견! 이렇게 외쳤었는데 <살인자의 건강법>에서 작가는 나를 실망시켰다. 아니 이 말은 어패가 있다. 작가가 왜 나를 실망시키겠는가. 내가 실망하고 만 것이지. 그리고 지금 또 한 작가를 알게 되었다. 오래도록 누군가 알아야만 한다고 했던 작가지만 외면하던 작가... 나는 항상 이리 더디 만남을 갖는다.

작품은 간단하다. 너무 얇은 책이라서 이 안에 어떤 것이 있으랴 생각했지만 작가는 이 안에 간단하지만 내 양심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말을 담고 있다. 우리와 비슷한 군부 독재를 겪은 칠레... 아직도 어머니들은 실종된 자식의 사진을 끓어 안고 시위를 하는 나라...

이 작품 이전에 공선옥의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를 읽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아픔을 한 작가는 수필로, 한 작가는 소설로 풀어 놓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은 슬픔과 분노의 감정으로 인해 차분히 생각할 여유가 적었다. 하지만 남의 나라 작가가 쓴 마치 내 나라 이야기 같은 얘기를 읽으니 그 사람 눈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느낌이 들어 차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보다 더 복잡한 남미 특유의 인디오 문제... 그런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시골뜨기 인디오 형사의 행동은 어찌보면 과장스럽고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배웠다.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연의 작은 생물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듯이 그 과장된 몸짓에서 반성을 배웠다. 소시민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할 수 없지 않은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핫 라인은 그런 의미다. 전화가 처음 벨에 의해 만들어졌을 때는 벨의 사랑이 담겨있는 고귀한 발명품이었지만 나중에 이렇게 변질되었다. 폰섹스라는 것으로. 민주주의라는 것, 정치라는 것, 그리고 정의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누구나 좋은 뜻으로 출발을 하지만 나중에는 폰섹스와 같이 변질되고 만다. 하지만 차라리 폰섹스는 낫다. 독재라는, 민주주의 안에 숨은 독버섯보다는 말이다. 세풀베다가 이 작품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나는 내 역사, 동 시대의 역사에 얼마나 많이 눈 감고 귀 닫고 살아 왔는가. 나는 내가 뭐, 또는 나 아니라도, 혹은 나만 잘 살면... 이라는 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가. 또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도 그러했다. 나는 지금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거나 어떤 실천, 총을 쏘는 그런 상징적 행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내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외면한 것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었음을...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나는 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잊은 듯이 살겠지만 이 글을 읽으며 내가 깨달은 것을 잊지는 않으려 노력하고 싶다. 간직하고 있다가 진실이, 사실이 왜곡되는 먼 훗날 누군가에게 그것은 사실이 아님을 말이라도 하고 싶다.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하나의 죄는 또 다른 죄를 낳는 법이다. 그것은 모두가 같이 씻지 않으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도 우린 그 안에 갇혀있다. 민주주의라는 또 다른 독재의 감옥 안에...

내게 이런 사실을 알게 해 준 세풀베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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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7 1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만두 2005-05-27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감사...

로드무비 2005-05-27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할게요.

물만두 2005-05-27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추천까지... 감사합니다^^:;;

beefjuic 2005-05-30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할께요

물만두 2005-05-30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