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다섯 조각
조안 해리스 지음, 송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유년의 기억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잘 포장되고 그럴듯하게 희화된 그리움이기 쉽다. 당시의 기억들... 안타깝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갈등하고, 미워하고, 악의적인 거짓말을 한 것을 우린 대부분 잊거나 저 가슴 밑바닥에 침전시켜 떠오르지 못하게 의식의 한 귀퉁이를 봉해 버린다. 그리고 당시 재미있고, 즐겁고, 기쁘고, 행복했던 기억만을 남겨 얘기하고 미화시켜 버린다.
이 작품은 그런 보통 사람들의 유년의 기억보다 진실한 유년의 기억을 말하고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어린 시절 부모를 미워하고 업신여기며 자신이 그들보다 낫다고 증명하려 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또한 형제들과 경쟁도 하고 질투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반항하던 기억 또한 있을 것이다. 또래 친구를 따돌리기도 하고 우월함을 내보이거나 영웅 행세를 하던, 하려던 기억들이... 그 기억이 안 좋은 시대와 맞물리면 어떻게 되는 지를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언제였던가. 에디뜨 띠아프가 프랑스의 독일 시 독일인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나치의 앞잡이로 낙인찍혔던 적이 있다는 것을 읽은 기억이 있다. 아님 다른 누군가였던지... 그 시대를 대부분 사람들은 유대인만이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하지만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었다. 전쟁 속에 살아 남으려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겪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나치의 앞잡이가 되는 길을 선택했든, 유대인을 돕는 길을 선택했든, 아니면 그저 한끼의 끼니를 위해 살아갔건 말이다. 그때도 사람들은 살았고 살기 위해 노력했고 아이를 낳았고 아이들은 자랐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잔인할 수 있다. 그들은 모르기 때문에 죄책감도 없다. 어른이 되어 보면 후회할 일이지만 그 당시 그들에게는 그들의 행동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고 성장 과정이며, 사랑의 열병일 뿐이다. 그 아이들에게 누가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다섯 조각의 오렌지는 결국 역사의 공범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든 동시대를 산 사람은 그 시대에 대한 짐을 하나씩 지고 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어른이든 아이든, 누구를 막론하고...
이 책을 읽으며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과연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기나 한 건지 묻고 싶다. 한 시대가 비극이었다면 그 시대를 산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 시대는 비극이었다. 그 비극 사이를 비집고 누구는 더 나쁘고 누구는 덜 나쁘고를 따진다는 것... 그 자체가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든다. 살아온 날이 다른 다음 세대는 그 전 세대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단죄할 수는 없다. 다음 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노력뿐이다. 그것이 뒤를 따르는 자들의 몫인 것이다.
나도 한 시대를 사는 사람이다. 내가 산 시대는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나와 같은 시대를 산 사람 모두의 책임이다. 경범죄가 죄이듯이 말이다. 작은 죄라도 죄는 죄다. 그것을 인정하고 유년의 기억하기 싫은 기억까지 떠올려 내보일 수 있을 때에만이 비로소 역사는 바로 설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 책은 작은 것으로 시작해서 거대함으로 막을 내린다. 가정 내의 작은 관심과 사랑에 대한 갈망으로 시작해서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의 사람들 이야기, 그리고 그 뒤 남은 자의 필사적인 과거에 대한 비밀 지키기로 이어진다. 이 작품은 또 다른 시각에서 2차 대전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며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한 개인, 한 가족의 역사도 역사이고 그들 하나 하나의 역사가 모여서 거대한 역사 한 장을 쓰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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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 2005-02-05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인것 같군요. 볼 기회를 만들어 꼭 봐야겠네요. 그런데 이렇게 적어가고 있는 책의 리스트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

물만두 2005-02-05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사서 보세요^^ 그러는 저도 무지 밀려 있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