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은 처음에는 한 베네치아인이 바다에서 납치되어 이스탐불의 노예가 되는 과정을 담은 단순한 작품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과 닮은 호자라는 인물을 만나고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며 서로에 대한 생각을 알려고 하고 서로의 과거에 대한 책을 마주 앉아 쓰면서 이야기는 점차 애매 모호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장자의 이야기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꾼 것인지...'를 말이다. 여기서 '나'와 호자는 장자의 '나'와 나비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제목이 하얀성인 것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하얀성은 기독교를 상징한다는데 이 작품에서 나는 그 어떤 종교적 색채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종교적 편가르기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겠다. 작가는 이슬람과 기독교를 이분법적으로 놓고 쓰지 않았다. 작가가 무슬림이기 때문에 이슬람을 더 옹호하는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은 작가로서의 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마지막에 등장하는 하얀성은 내가 보기에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내면에 도달할 수 없는, 도달하고자 애를 쓰지만 손에 닿지 않는 그 어떤 구원의 상징, 꿈, 헛된 희망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책 199쪽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그때 마침내 우리는 그 성을 보았다. 성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탑들은 깃발을 펄럭이며 석양을 받아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하얀 성이었다. 순백색의 성은 몹시 아름다웠다. 나는 왜 그 성이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답고도 도달할 수 없는 성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꿈속에서는, 어두운 숲 속을 꾸불꾸불 돌아 밝은 언덕 꼭대기에 겨우 도달하면 그 상아색 건물이 있었다. 꼭 들어가고 싶은 큰 무도회나 놓치기 싫은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걸음을 재촉해도 길은 끝나지 않았다.>

이 글을 볼때 기독교도인 ‘나’라는 인물이 기독교를 상징하는 하얀성을 만났을 때 그것에 대한 묘사로 도저히 도달할 수 없었다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하얀성이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기독교도인 ‘나’에게 그것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기독교도가 기독교를 꿈속의 동화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을까... 해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라는 인물이 호자라는 인물과의 인생을 바꾼 것인지, 그저 '나'라는 인물의 허구적 이야기인지 이 작품은 마지막까지 그 애매 모호함을 놓지 않고 있다. 그것 또한 인간이 버릴 수 없는, 버리고자 애를 쓰지만 결코 그렇게 되어지지 않는 미련과 욕심의 찌꺼기다.

내겐 너무 어렵고 버거운 작품이었다. 역시 오르한 파묵의 책은 나중에 나이가 들어 다시 읽어야 하리라는 생각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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