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자들의 도시 블랙 캣(Black Cat) 19
릴리안 파싱거 지음, 문항심 옮김 / 영림카디널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독일 추리작가협회 '프리드리히 글라우저 상'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해서 언제 사건이 일어나고 어떻게 전개되는지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건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 다소 황당하지만 나름 독특한 작품이다. 독일 추리작가협회라는 말에 나는 자꾸 배경인 비엔나를 독일로 착각을 했다. 오스트리아인데도. 이렇게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마티아스가 여자친구 트릭시와 싸우고 벌거벗은 채 나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기타도 잘 치지 못하면서 기타를 소중히 여기고 늘 노래를 부른다. 여자에 대한 아쉬움이 없는 마티아스는 기타를 던진 것에 화가 나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동물원에 들르는데 거기에서 자살 시도를 한 벨라를 발견하고 그녀의 생명의 은인이 된다. 그리고 벨라는 마티아스를 찾아와서 그들은 연인이 된다. 

이렇게 마티아스가 일인칭 화자로 등장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한편에서 박사 학위까지 있는, 하지만 대학에서 학생수 미달로 잘린 역사학자 엠마가 앞에 새로운 미용실이 생기는 바람에 망한 미용사 믹과 함께 탐정 사무소를 차린다. 그들이 하는 일은 그저 아프다고 병가를 낸 노동자가 그 기간에 일을 하는 건 아닌지 감시하는 일, 바람 피우는 남편의 현장 잡기, 등 소소한 일들이다. 물론 이마저도 꽃가루 알러지에 뚱뚱한 몸에 힘겨워하며 놓치기 일수인 조수 믹에의해 지지부진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때 한 의뢰인이 입양을 보낸 아들을 찾는 의뢰를 하는데 그가 바로 마티아스다. 이렇게 그들 사이에는 접점을 갖게 된다.  

어린 시절 입양된 집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자란 마티아스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는 늘 나이 든 여자들을 등처먹고 사는, 한마디로 나쁜 놈이다. 그러면서 그녀들을 경멸하지만 그녀들은 그와의 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런 그에게 난데없이 자신을 버린 엄마가 찾아왔다고 해서 반가운 일은 아니다. 그에게 세상 모든 나이 든 여자는, 아니 여자들은 모두 마녀일 뿐이다.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벨라도 마찬가지다. 더 놀라운 사실은 가끔 누군가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혼동하는 일이 있어서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진짜 그에게 쌍둥이 형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형은 엄마가 키우고 자신만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그는 분노한다. 

끈적끈적한 더위가 달라붙어 찜찜한 기분을 털어버릴 수 없는 그런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비라도 한바탕 퍼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 딱히 추리소설이라고 정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추리 소설, 범죄소설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경계가 무너진 것도 아니다. 이 작품은 어떻게 보면 카뮈의 <이방인>이 연상되는 작품이다. 카뮈의 <이방인>을 추리소설이라고 본다면 볼 수도 있다. 살인이 있고 범죄자를 잡고 재판을 하니까. 이런 내 관점에서 보면 살인과 범죄가 등장하는 모든 작품은 추리소설이다. 경계가 무너지고 모호해진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도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독특한 것은 작품이 마치 두 가지 별 개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지게 쓰였다는 점이다. 마티아스를 중심으로 한 조마조마하게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같은 이야기 전개가 한편있고, 그 변두리에 그 이야기와 스쳐 지나가면서 무심하게 자신들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엠마와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로 엇갈려 진행된다. 마티아스의 이야기를 접하면 답답하고 서글프고 찜찜하고 엠마의 이야기가 나오면 웃기고 풀어지고 사건의 중심에서 벗어난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대신 인간의 무심함에 죄책감이 더 들게 되지만. 마지막 엔딩도 두 가지로 나뉜다. 그들의 스침은 거대했지만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고 각자의 길을 가는 두 이방인의 이야기로. 현대인은 이방인들일 뿐이다. 관계는 한정적이고 소통은 일방적이다.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것이었던 것 같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면 누구나 삐딱한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가끔 욕도 나오고 화도 나고 폭력적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런 '나'가 객관성을 띄게 되면 그런 것이 조금 완화된다. 그런 이유로 마티아스는 '나'로 등장하고 '엠마'는 나로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엠마도 '나'가 되면 마티아스처럼 불만이 생길 거리는 많다. 믹도 그렇고 필립도 그렇고 엠마의 주변인 누구나 마찬가지다. '나'만 봐도 이 도시 비엔나는 패배자 마티아스의 도시다. 엠마의 망령난 나치 시대를 살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또한 나치의 패배한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엠마의 탐정으로서의 자질 부족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할머니에게도 패배한 도시다. 누구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산다는 게 결국 그런 패배에 익숙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패배에 길들여지는 것이야말로 진짜 패배자들의 도시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의미심장한 제목과 함께 나른한 여름 또 다른 뫼르소를 본 느낌을 준 작품이었다. 조금은 나약하고 지금의 시대에 맞게 패배한 젊은이가 등장하는. 뫼르소는 아랍인을 살해하지만 믹은 무슬림이 되고자 하는 그런 시대의 이야기.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있던 시대와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조차 버겁게 되어 버린 시대의 모습을 담은 작품. 하지만 여전히 태양이 뜨겁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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