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탐구 메피스토(Mephisto) 12
필립 커 지음, 임종기 옮김 / 책세상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 주의 요망 : 우선 이 책을 읽기 전에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읽고 이 책을 읽으시길 독자들께 당부 드립니다. 이 책에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아닌데 저자의 실수인지, 역자의 실수인지 친절하게 각주를 달아 범인까지 상세히 알려주고 있으니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은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먼저 읽으시고 이 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작품은 처음 접한 순간 책 두께로 나를 질리게 만들었고, 내용 속에 심하게 철학적 문구들이 많이 등장해 읽는 내내 머리에 쥐가 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다 읽었다. 내가 대견스럽다. 롬브로소 프로그램, VMN형 인간과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반 VMN형 인간, 사형제도 대신 도입되는 코마형, 그리고 많이 나열되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의 인용 문구들. 이 작품을 표현할 수 있는 단순한 말들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2013년이라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지금 구성된공동체가 된 영국에서 범죄 예방 차원에서 롬브로소라는 프로그램을 수행한다. 그 프로그램은 뇌를 연구해서 VMN형과 반 VMN형으로 나누는 것인데 반 VMN형으로 선별된 사람은 잠재적 범죄자 타입으로 규정되어 국가에서 관리를 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각각의 다른 이름이 부여되고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된다. 자신이 반 VMN이라는 것을 알게 된 코드명 비트겐슈타인이라는 남자가 다른 반 VMN 남자들만을 연쇄 살인하고 그것을 경찰이 잡으려 한다는 필립 K. 딕의 <마이너리티리포트>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반 VMN형 인간으로 낙인 찍혀 자신의 이름 대신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코드명을 부여받은 사나이가 자신과 같은 인간들을 연쇄 살인하는 이 작품은 철학적 탐구가 자살이라는 니체의 말로 귀결되는 듯싶다. '나는 살인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것은 살인자가 자살 대신 선택한 또 다른 자살의 방법이었다. 살인을 한다는 것은 인간을 죽인다는 뜻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바로 신의 부산물이자 신 그 자체다. 그러므로 살인을 한다는 것은 신을 죽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니체가 말했듯이 이미 신은 죽었다. 죽은 신을 또 다시 죽일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내 살인은 정당하다. 이것이 살인자의 궤변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사회가 공공의 안전이라는 명목 하에 저지르는 것이 결국 또 다른 집단 살인이 아닌가 하는 문제 제기다. 인간의 뇌를 분석해 잠재적 범죄자로 감시한다는 것 자체가 국가 권력이 저지르는 폭력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또 다른 연쇄 살인범의 만행과 그가 반 VMN이라는 점을 보여주며 비교하게 만드는데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뿐이다. 우린 지금 빅 브라더의 감시로의 길로 서서히 접어들고 있다. 이미 조지 오웰이 예견했던 일들은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는가. 정말 인간은 신의 영역을 넘보다 과학에 의해 멸종 당하고 말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살인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평범한 시민이라 생각하고 자발적으로 이런 일에 참여했는데 잠재적 살인자로 낙인찍히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 뒤 남자는 자신과 같이 분류된 사람들을 한 명씩 살해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잠재적 살인자들이므로.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살인자, 잠재적 살인자도 쓸모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던가. 아무도 피해자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은 결국 살인자이고 국가 권력이다. 진짜 피해를 입는 살해당하는 자, 권력에 의해 핍박받는 자들에게는 어떤 스포트라이트도 비춰지지 않는다. 철학은 탐구해서 무얼 할 것이며 바뀌지 않을 것을 알면서 부르짖으면 무엇할 것인가. 

이것이 철학적 탐구의 의미인가. 결국 자살이 자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수단이라 살인을 한다고 정당화한다면 알리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는 대다수 무명씨들의 삶은 무가치한 것이라는. 마지막에 제이크가 느끼는 연민은 무엇인가. 코마형? 나는 물론 사형 반대론자다. 하지만 그것은 국가가 또 다른 살인을 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지 범죄자, 사형을 언도 받아 마땅한 인간 이하의 것들을 동정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죽이지 않았다면 잘 살았을 무명씨에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목소리 큰 사람만이 잘 살 수 있고,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지금이 영원하다면, 물론 영원하겠지만 이 작품은 말장난일 뿐이고 그럴싸한 제목만 붙여진 잘 팔릴 책일 뿐이다. 철학을 팔아서. 

나는 잘 만들어진 추리 소설을 읽었다. 작가가 왜 이 작품에 그렇게 많은 철학을 남발했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내가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공감하는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아름에 대한 언급뿐이었다. 그리고 이 말이 생각났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가 아니라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는 것이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 것이다'라는 영화 <황산벌>에서의 대사.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는 인간에게 철학적 탐구란 또 다른 이름 남기기일 뿐이고 그것은 정치인들의 롬브로소 프로그램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때는 인간이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추리 소설에 너무 많은 의미를 담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이런 작품을 읽는 나도 고통을 즐기려는 잠재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니. 끝없는 인간 존재의 증명이 철학적 탐구의 본질이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는 종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그리 중요한 일일까. 이런 말을 한다면 중요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라고 물을 지 모른다. 존재가 존재로 끝나지 않고 증명을 거쳐야 한다는 것, 이것이 서양 철학의 문제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모래사장, 그 중 하나의 모래사장 속의 단 한 알의 작은 모래알인 인간. 이것이 과연 증명의 대상이 될 필요가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읽었음에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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